비축분이 없으면 아무래도 초조해지죠. 일일연재를 하면서도 사건의 진행과 개연성을 맞춰내는 대굇수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정도까진 아니니 비축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게다가 일일연재 하시는 분들 중에서 상당수는 또 그 부작용, 즉 글의 앞뒤가 안 맞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읽다가 선작 끊기도 하고... 그러니 같은 꼴을 내어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래서 엄청 써놨죠.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80만자 분량 정도 됩니다. 당분간의 과정은 쓰는게 아니라 편집, 아니면 일부 수정에 해당될 뿐이니 룰루랄라 배를 두들기면서 ‘앞으로 몇 달은 널럴하겠다’ 라고 즐거워하면서도... 깨닫지 못한 부작용이 비로소 슬슬...
연재하시는 모든 분의 공통점이라 생각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쓰면서도 읽는 이도 즐거워하고 선작이든 댓글이든 추천이든 교감의 증거로 삼으면서 연재라는 길을 걸어나가길 바랄 겁니다.
하지만 비축분을 쌓으면, 이런 것이 있죠. 디자이너 겸 모델이 스스로 만들어 입을 옷, 100일을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방 안 가득 있는데, 하루에 한 벌밖에 꺼내서 못 입는 거요. 그 옷을 입은 나를 보여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해서 100벌을 모두 꺼냈다가는 무슨 참상이 벌어질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미친 척 하고 그 옷을 다 태우고, 어디 한 번 매일 지어 입어볼까. 그러면 옷 짓는 솜씨가 더 나아질까 하면서도 미친 짓이다 라고 갈등이 되죠. 100벌을 한 번 다 꺼내면, 그 중 한 벌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죠.
만든 옷이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 중 한 벌이 마음에 들어 앞으로 나올 옷을 기대하는 분이 있거나, 처음 몇 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앞으로 나올 옷을 포기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디자이너의 마음은 그 양자를 모두 만족시키고 싶지만, 쉽지 않은 일이겠죠.
비축분은 좋습니다. 자신의 글을 가다듬고, 또한 개연성도 맞출 수 있으며 터무니없는 설정미스를 줄일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글을 정체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이 글을 지우고 다시 쓰면, 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갖는다면, 비축이 없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이에게 비축분을 권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권하지 않을 겁니다. 매일 쓰는 즐거움을 알아버렸으니까요. 비축분이 많아 마음은 편하지만 즐겁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 내가 만들어놓은 표현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편안함이냐 즐거움이냐, 개인 취향이겠지만, 장단점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정체된 것 같아 한담에 글을 남깁니다. 비축 없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많다고 너무 푸근해하시지는 마시길 ^^
Comment '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