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듯이 이루어지는 클리셰 파괴가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농노들의 비참한 삶이나 실종된 위생관념, 무식한 기사들 등,
현대인 입장에서 소위 '미개한' 중세의 사회상이 굉장히 잘 그려져 있으며, 그 자체로 소설의 한 축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깊게 파고 들어가면야 전대륙 공용화폐 보급이라던가, 압도적으로 수직적인 귀족체제 등 고증이 안 맞는 부분들이 꽤 있어서
'고증이 완벽한 게 장점인' 소설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판타지 소설인 만큼 고증이 완벽할 필요도 없구요.
그보다는 중세 판타지에서 대개 무시되기 마련이었던 시궁창스런 사회상을 정교하게 그려내어 몰입감을 높이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클리셰들을 파괴하는 것이 이 소설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현대인인 주제에 중세인보다 더 야만적인 면모를 가진, 시궁창 컨셉에 꼭 들어맞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면서도 거대한 과거와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인물이기도 하죠.
그런 주인공이 소박하지만(?) 파괴적인 일상(??)을 즐기는 가운데 사건들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 전개 과정에서는 절대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되 끝은 주인공의 묵직한 활약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글의 재미와 깊이를 더해 줍니다.
특히 제가 앞서 '숨쉬듯이' 라고 표현했었는데요.
빈도 면에서도 그렇지만, 정말 숨을 쉬듯이 자연스럽게 클리셰를 비틀면서 전개를 이어나가는 것이 이 소설의 특장점이 되겠습니다.
무능한 영주, 오만한 영애, 부패한 성직자, 고귀한 기사, 신실한 성기사, 광폭한 드래곤 등 중세 판타지가 전형적으로 차용하는 클리셰들이 하나씩 파괴되는데,
그 과정이 어떤 작위적인 전개나 묘사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조연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듯한 고유의 캐릭터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어찌나 캐릭터 완성도가 높은지 아무거나 대사 하나만 집어서 보여줘도 누구 대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작가님이 글에 굉장히 공을 들이시는 편으로,
작가님 본인부터 후기에 탈고 때문에 늦어지는 것을 토로하신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탈자는 물론이고 흔하디흔한 문법 오류와 비문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글의 완성도가 높고,
심지어 분량조차 문피아 평균의 두 배를 상회하는 정도라 만족감이 대단한 소설입니다.
굳이 걱정스러운 점을 꼽아보자면 주인공의 과거 설정인데요.
처음에는 중세에 떨어진 평범한 현대인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경비조장이 되기 전 굉장히 비범한 과거를 보냈음이 점점 드러나고 있죠.
이 과거사 자체가 소설의 핵심 소재이기도 합니다.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주인공의 과거에 거대한 설정이 붙으면 붙을수록 독자들의 기대도 부풀어오르긴 하지만,
시작이 창대할수록 마무리에 조금만 실수가 있어도 반향이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작가님이 철두철미한 구상과 함께 흔들림 없는 멘탈로 글의 마지막까지 잘 이끌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모쪼록 건필하시기 바라며,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에서 조촐한 추천글을 남겨 봅니다.
Commen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