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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99 惡賭鬼
작성
14.07.09 03:46
조회
5,099

제목 : 경혼기 지존록

작가 : 풍종호

출판사 : 북박스


풍종호 경혼기-지존록지존록은 유니크한 글이다. 접근성부터 문체, 글이 쓰여진 맥락, 그리고 완결되지 않았다는 점,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이 이미 알려졌다는 점까지. 이러한 지존록의 특징은 평론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특징이 나로 하여금 철학적 분석을 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글은 정말 다시 만날 수 없다. 지존록은 무협소설 매니아들에게서도 매니악하기로 악명 높은 글이다. 기존의 무협소설의 클리셰란 클리셰는 모조리 사용하면서도, 잘 살펴보면 모두 교묘하게 뒤틀어 놓았다는 점, 그러한 비틀림이 철저히 무협이라는 장르의 문법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뒤틀림이 독특한 철학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좌백의 소설은 무협이라는 문법의 거슬림만 참을 수 있다면 소설로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풍종호의 소설, 특히 지존록은 무협에 빠져든 독자가 아니면 결코 읽을 수 없다. 단순히 빠져든 정도가 아니라 무협지-무협소설이라는 이 너무나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장르의 계보를 쫙 꿰고 있지 않으면 알아먹을 수 없는 소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러한 장르를 꿰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장르 특유의 단순함, 명쾌함, 폭력성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방식으로 내용전개가 되다보니 정말 매니아 중의 매니아밖에 읽을 수 없다. 지존록이란 작품 자체가 다른 무협 작가의 오마쥬 - 물론 원작을 일찌감치 초월해버린 - 라는 대목까지 가버리면, 정말 이 작품은 매니악함을 넘어선다. 무협소설 중 비교적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김용의 영웅문 3부작을 기억해보는 것은 지존록을 읽어내고, 이해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존록은 내용 구성의 8할이 무공수련과 기연이다. 무협소설에서 항상 등장하는 무적의 초인이 되려면 이 정도의 기연은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대부분의 무협매니아들도 이 정도의 기연 러쉬에는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이러한 기연들, 무공들의 열람을 참아내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사연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기연들, 무공들 하나하나는 각자의 드라마를 지니고 있으며, 좀 더 나아가 이들은 현실의 수많은 사건들, 사상들에 대한 극도의 상징화로 볼 수 있다.

JRR톨킨의 말에 따르면 판타지라는 장르는 현실의 극한의 왜곡이다. 이러한 정의를 인정한다면, 무협이라는 장르는 태생적으로 판타지라는 장르의 일부이다. 인간의 폭력에 대한 태도,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도덕적 선택의 옳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르가 무협이기 때문이다. 이름부터가 武와 俠이지 않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무협은 다른 현실들을 너무나 왜곡하는데다가, 폭력의 미학과 명쾌함의 쾌락에 취해 장르의 한계에 갇혀 있다. 좌백은 이를 노골적인 무협의 철학화를 통해 극복한다. 물론 무협 특유의 폭력의 미학을 유지하면서 철학화에 성공한 것은 좌백의 독보적인 재능이다. 반면 풍종호는. 수많은 설정과 그 설정을 통한 곁가지들을 통해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자체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풍종호만의 글쓰기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이 궁극의 지점(혹은 변환의 지점)이 바로 지존록이다.

 

2. 시차적 관점(마교라는 일부 소재에 대한 분석)

 

풍종호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을 단 한 가지만 뽑으라면, 사실과 진실의 구성방식의 차별성을 뽑고 싶다. 철학 입문에서, 상대주의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시청각 자료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다. 관점에 따른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다룬다는 점만을 본다면, 지존록은 라쇼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띄고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흐름을 구성해낸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들이 접한 것을 볼 뿐이다. 심지어 무협 전반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쓰이는, 그래서 무협이란 장르의 철학, 문학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무공이란 요소조차도 지존록 안에선 그 확실성을 보장 할 수 없다. 같은 무공에 대해서도 각각의 주체들마다 내리는 평가, 알고 있는 사실들은 모두 다르다. 심지어 이 모든 사건과 무공들의 기준점이 되는 풍현마저도, 같은 사건과 같은 무공을 대하는 관점들이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독자조차도 이러한 관점들이 모이는 진정한 최종 지점을 완전히 자인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구성상, 지존록이 그려내는 세계 속의 사실과 진실은 주체들 각각의 맥락 속에서만 그 맥락의 방식으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맥락 속에서만 그 방식으로 유효하다는 사실과 진실의 문제는 얼핏보면 극단적인 상대주의라는 인식을 주지만, 이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존록에서 드러나는 풍종호의 사실과 진실의 구도를 분석하기 위한 좋은 예시가 있다.

마교는 지존록의 주요 등장 집단 중 하나로, 얼핏 본다면 그저 다른 무협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마교와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를 상세히 파고든다면,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훨씬 다양한 해석들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사실 관계의 혼동, 알 수 없음은 지존록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자주 언급되기에 생략하고, 진실을 위주로 분석해보겠다.

지존록에서의 마교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도덕과 윤리도 없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상의 선이다. 그런데 이들의 목적은 모두 제각각이다. 가장 자주 언급된 마교의 분파인 음풍강시옥은 강시를 만드는데 미친 자들이다. 이들은 강시를 만들기 위한 좋은 시체를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 타자뿐만 아니라 혈육, 친지,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의 몸까지도 도구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한 욕망,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지존록 안의 마교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욕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마교도의 기본 조건이 특정 무공을 터득한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흥미로운 것은 무공 수위 운운하는 설정 노름이 아니다. 그 설정의 의미가 흥미로운 것이다. 마교도의 기본 조건은 환롱진을 터득하고 이겨내는 것인데, 환롱진은 진실을 환상으로 만드는 무공이다. 겪고 있는 것들을 겪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것, 쾌락을 쾌락이 아닌 것으로,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환롱진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것을 타자에게 도구로 쓰면서 자신은 스스로를 유지하는, 욕망의 목적을 유지하는 것이 마교도의 조건이다. 이는 철저히 특정한 욕망에 대한 갈구를 통해 인식적 확실성을 확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이러한 구도는 사실 검신무라는 다른 작품 속의 주인공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검신무에서의 환롱진은 극을 이끄는 주요 도구이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파괴적 욕망을 추구하지만, 그 욕망의 달성을 위한 경로에서 헤매지 않는 자들, 자기 자신마저도 철저하게 욕망의 도구로 쓸 수 있어야 하는 자들이 풍종호 세계의, 지존록의 마교, 마교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마교에 대한 평가 역시 제각각이다. 마교는 일반적인 무협에서처럼 만악의 근원이고 타도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최종 해결점이 아니다. 세상의 악을 걱정하여 등선마저 포기하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가문까지 남긴 선인 남천화에게 마교는 세속적 악인 마천루를 몰아낸 다른 세력일뿐이다. 하지만 단심칠우에게는 영혼까지 걸고 영원히 봉인해야 할 지상 최악의 세력이었다. 인간의 의지를 조롱하는 탈혼마제의 숙적, 협객 암천향에게 마교 교주는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자였고, 마교는 탈혼마제를 영원히 없앨 유일한 해답일뿐이었다. 각각의 관점에서 이는 모두 진실이다. 선인 남천화가 보는 악은 세속의 권력을 독점하는 자들, 각각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욕망에 편입하는 자들이기에 마교는 그의 적이 아니다. 그의 후예들 역시 세가를 이루며 세속권력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했던 단심칠우에게 마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고 싶었던’ 최고의 악일뿐이지만, 마교의 활동이 이미 끊어지고 그들의 무공에 대한 구전만이 남은 시대에 살던 암천향에게는 마교에 대해 판단할 근거 자체가 없었다. 또한 그의 눈앞엔 또 다른 절망적인 악이 있었고, 그에게 해결책은 마교의 유산뿐이었다.

마교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분석은 지존록 전체에서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지만, 이러한 구도는 다른 양태로 무한히 반복된다. 즉, 이러한 시차적 관점들, 객관성의 이름 하에 양립 불가능한 판단들 각각의 고유함을 보여주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구도들은 그들의 욕망, 그들의 맥락의 고유성이 가지는 의미를 재고시킨다. 그들의 ‘세계’에서 이들은 모두 사실이고, 진실이며, 이 모든 것들을 통합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다면 서로 모순적이며 판단 불가능한 총체에 불과하다. 통합을 보다 높이 산다고 할지라도, 통합은 절대의 진리값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한 선택의 길을 열어 둘 뿐이다.

3. 충동의 주체, 대상의 주체(풍현)

그러나 이러한 구도가 상대주의의 한계점인, 윤리적 판단이 거세된 구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교나 마도에 대한 풍종호의 입장이 단순히 악인 것만은 아니지만 (절대천마라는 인물에게는 분명 그 무언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종호는 어떤 면에선 보수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협에 충실한 작가이다. 그 협의 구도가 많은 무협보다 훨씬 복잡하고 현실적이며, 여러 고민들의 충돌이 드러날뿐, 지존록뿐만 아니라 전체 작품 세계를 살펴보더라도 상당히 일관적인 가치관의 ‘협’을 그리는 작가이다. 이 시점에서 협을 강조하는 까닭은, 욕망의 구도 및 실현과 관련되서 드러나는 또 다른 독특한 구도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풍현은 캐릭터성이 거의 없다. 주인공의 캐릭터성의 부재는 최근의 풍종호 소설들에서 어느 정도의 변주를 거쳐 반복되는 현상인데,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주인공 풍현이다. 이를 작가의 역량 부족으로 보기에는 그의 전작들 속의 주인공들이 너무 화려하고, 조연들의 개성이 뛰어나다.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지존록에서의 이런 특징은 주인공의 변화와 성장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현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분석은 지존록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풍종호의 욕망과 주체에 대한 입장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풍현은 지존록의 팔할을 차지하는 기연의 독식자이다. 혹자는 무협 전체를 통들어봐도(심지어 구무협을 포함해도) 가장 많은 기연을 얻는 캐릭터라고 말할 정도이다. 하지만 지존록에서의 기연과 무공은 타자의 삶의 이야기, 맥락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현 전개 시점까지 봤을 때 풍현 자신의 삶은 이미 완전히 망가져 있으며, 그 자신은 타인들의 맥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타인의 맥락들은 풍현 안에 영혼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침투해 있기까지 하다. 절대천마와 단심칠우에게 문자 그대로 씌어있었고, 작품의 후반부까지 간접적으로 공격성과 분노, 증오를 주입 받아온 것이 풍현이다. 이를 물론 판타지-무협 소설 특유의 맛으로만 읽을 수도 있으나, 나는 지금껏 해왔듯이 이러한 구도에 철학적인 의미를 노골적으로 부여하려 한다.

풍현의 캐릭터성과 배경, 지존록의 여러 구도들을 고려한다면, 풍현이란 인물은 인간 주체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가 무수한 기연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타자들의 삶의 맥락들로 구성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절대천마와 단심칠우의 이혼전겁을 통해 보다 노골적인 메시지를 띄게 된다. ‘나의 모든 주장, 나의 모든 맥락은 사실 타자이다’라캉주의 정신분석의 느낌이 아주 강력하게 어필되는 이러한 구도는 소설이라는 표현요소를 거치면, 보다 강한 울림으로 변한다. 결국 풍현은 타자와의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타자들의 주장과 요구에 매몰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바로 우리 자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지존마와 풍현의 구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작품 안의 지존마는 완전한 욕망의 대상이자 실현자, 정신분석의 팔루스를 의미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지존마 자신이 무림사상 최고의 고수이며(무협이란 장르에서 최고의 고수라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단 한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풍현을 둘러싼 직접적인 사건들은 모두 지존마와 관련되어 있다. 게다가 풍현이 지존마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상징체계는 비교적 명확하다. 작 중 대부분의 인물들이 지존마를 그들의 욕망의 최종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지존마는 확실히 지존록의 ‘팔루스’이다. 이러한 풍현-지존마의 구도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풍현이 지존환을 개방하여 지존마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풍현은 온몸이 으스러진채 죽어가지만, 힘을 주겠으니 그저 승낙만 하라는 지존마의 요구를 거절한다. 복수심에 불타면서도 이유없이 주는 힘은 거부하겠다는 풍현의 주장은 비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본다면, 이러한 상황은 주체에 대한 팔루스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 자신-주체는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인 팔루스를 직접 얻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물론 그럴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착각’, 오인은 욕망을 달성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서 인정된다. 다만 궁극적 욕망의 대상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라캉-지젝 노선에서 극렬한 비판의 대상이다. 작중에서 지존마의 이러한 요구에 넘어갈 경우, 지존영이라는 자아를 상실한 인형이 되며, 이를 거부한 풍현만이 주체로서 남았고, 진정한 후계자가 됐다는 점은 이러한 구도의 연장선 상에 있다. 팔루스에 의한 주체의 침탈은 아주 인상깊은 구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라캉의 욕망론에서의 대타자의 위상을 의미한다고 읽을 수 있다. 주체가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주체를 선택한다는 구도는 대타자(헤게모니, 이데올로기)가 주체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보다 보수적인 라캉에서 이러한 구도는 때로 감수해야만 하는 구도이지만, 지젝의 경우 이러한 구도는 잘못된 욕망 달성의 구도이며,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대표적인 구도로 간주한다. 풍현의 고집스러운 거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지젝에서의 윤리적인 주체는 오직 이러한 고집스러운 거부, 사회적 합리성과 이성성에 근거한 것이 아닌 주체 본연의 윤리적 고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거부를 통해서만 성립한다. 그리고 풍현은, 사회적 맥락이 박탈당한 텅빈 주체로서의 풍현은, 이러한 고집스러운 거부를 통해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팔루스와 만나는 것이다.

두 번째 지점은 보다 인상 깊은데, 이후 풍현은 무수히 많은 기연, 즉 타자들의 맥락을 받아들이며 변화하게 된다. 이 타자들의 맥락은 지존마라는 팔루스를 직접 겨냥하지 않거나, 때로는 지존마에 대한 노골적인 대항이기도 한데, 이러한 맥락들은 그 자체의 작동뿐만 아니라 지존마의 유산을 보다 완성시켜 가는 과정으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욕망의 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타자들의 맥락은 팔루스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닌, 우회적인 방식이다. 이는 때로는 팔루스 자체에 대한 거부의 방식이기도 하다. 주체을 통한 이러한 시도들은 팔루스를 달성하는 여러 방식들을 보여준다. 이 중 특히 라캉-지젝 노선에서 욕망을 넘어서는 충동의 구도를 상징하는 부분은 지존마에 대한 대항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썩 매끄럽지만은 않다. 무적신마라는 또 다른 이질적인 타자, 지존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타자의 존재의 문제가 이러한 구도를 어지럽게 만든다.

 

세 번째 지점은 풍현의 복수심이다. 이는 지존록 자체만으로는 어렵고, 풍종호의 다른 작품들과의 연계를 통해 그 독특한 위상을 해석해낼 수 있다. 풍종호의 모든 주인공들은 특정한 사건과 대상에 대해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의 완결점은 사건의 해결, 대상의 해결이며, 이 이후 주인공들의 삶은 달라진다. 물론 이 이후 주인공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일은 없으며, 양태의 변화, 완전히 새로운 맥락의 시작이 있을 뿐이다.

이는 구체적인 사건,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풍종호의 ‘집착’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 풍종호가 보는 주체는 텅빈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집착을 가진 주체이다. 주체의 욕망은 항상 구체적인 사물, 구체적인 사건과의 접점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주체를 성립시키는 고집이나 타자를 통한 우회적인 욕망 달성과 같은 ‘실패를 통해 욕망 대신 충동을 충족시키는’ 정신분석의 핵심적이지만 고루한 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두 번째 지점에서 지존마에 대한 대항, 즉 팔루스에 대한 대항이 팔루스를 충족시킨다는 결론을 매끄럽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풍종호는 욕망에 대한 거부와 실패가 충동을 만족시킨다는 구도 자체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건과 구체적인 대상, 알 수 없는 타자의 개입은 지젝의 난삽한 이론에서도 그 단초들이 엿보이지만, 풍종호의 것만큼 명확하게 주제화되고 있지 못하다. 근본적으로 타자-주체의 구도는 정신분석 내에서 욕망과 충동의 변증법 안으로 환원되고 만다는 점이 지젝에게서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 어렵게 만든다. 무적신마라는 이질적 타자의 존재-뿐만 아니라 지존마의 대항자로서의 풍객 역시-는 구체적 사건, 구체적 사물로서의 타자의 위상에 대한 재설립으로 볼 수 있다. 대타자 및 다른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구체적인 삶의 맥락은 유효하며, 욕망은 충동으로 대체 불가능하다. 지존록에서 대부분의 무공들, 대부분의 사건들은 대체 불가능하다. 이는 그 맥락 안에서만 작동하는 대체불가능한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충족의 대상들을 의미한다. 무적신마는 이러한 차원에 대한 상징화이다. 이때 풍현이 무적신마와의 싸움을 통해 스스로의 욕망을 인정하고 체념한다는 사실들이 중요하다. 이는 타자와 대상의 존재는 그 자체로만 대체 불가능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대체불가능한 것으로 작동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풍종호는 지존록을 통해 주체해석에서 이러한 차원을 열어두고 있으며, 이러한 주체해석은 이후의 <검심무>나 <카오스 사이클>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반복된다.


결론 - 비평 총평

이 비평 자체가 풍종호의 소설보다도 더 매니악하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 - 이 비평의 이론적 토대를 아는 사람들의 합집합이 너무나 적다는게 이 비평의 치명적인 문제이다.
사실 지식 자랑한다고 욕먹어도 할말은 없는 비평인데, 누군가는 재미있게 읽어
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램은 있다.


Comment ' 10

  • 작성자
    Lv.99 금원
    작성일
    14.07.09 09:00
    No. 1

    어려운 내용들이 나오는데 본문에 설명이 잘 되어있어서 읽는데 어렵지가 않네요. 좋은 글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2 응아랑
    작성일
    14.07.09 12:18
    No. 2

    으아.. 고생하셨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無我之境
    작성일
    14.07.10 11:57
    No. 3

    일부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진심으로 오랜만에 좋은 비평글을 읽었네요..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로드아톰
    작성일
    14.07.10 16:29
    No. 4

    빨리 완결이나 됐으면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탈퇴계정]
    작성일
    14.07.14 11:15
    No. 5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산악요정
    작성일
    14.07.20 10:51
    No. 6

    무협은 읽어본적이 없는데 ㅠ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日越
    작성일
    14.07.20 16:46
    No. 7

    음음..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무도 지적하시는 분이 없네요.
    [마천루->군마루]입니다.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3 호종인
    작성일
    14.08.09 17:29
    No. 8

    교집합도 아니고 합집합이..너무 적다라는건..참.슬프지만..뭐...^^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4.08.11 20:19
    No. 9

    왜 굳이 타인의 말을 빌어와 '걸러내기'를 하신 것인지 의문이 가는군요. 충분히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일 텐데요. 매니아화를 惡賭鬼님께서 원하신 것이라면 합집합 자체가 작아지는 것에 대해 누구에게 불평할 수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타인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진지한 노력을 쏟아주셨고 또 하나의 읽기 방식을 공유해주신 것에 감탄합니다.

    무협을 좋아하지 않아 지존록을 읽어보진 않겠지만, 위 비평만으로도 한 가지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할 의문점이 남는군요.
    '구체적인 사물, 사건에 대한 집착으로 충동과 욕망의 대체불가능성을 추구하고 타자의 위상에 대한 재설립으로 구체적인 삶의 맥락이 유효하고 그러한 배경 하에서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란 말에 대해서인데요.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어서 인간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희망적인 얘기겠죠. 좋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당연한 의문 하나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한 주체의 욕망은 우릴 위한 것일까요?
    지존록의 주인공처럼 그런 수많은 기연들을 얻지 못하는 좌절된 우리의 욕망은 언제까지 굶주려야하는 것인지. 대체불가능한 고유한 욕망들이 있다 해도 내가 다가설 수록 끊임없이 멀어지는 그림에 떡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은 불만족을 강화해서 만족에 이른다 한들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여길 순 없겠네요.
    그렇다면 제시하신 작품의 해석 내용이 우리에게 질서정연한 대리만족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 지 궁금합니다. 저라면 남의 욕망 해결을 멀리서 지켜보며 좋아할 바에 차라리 충동의 세계에서 살고 말겠습니다.

    물론 인터넷 글쓰기의 특징 상 상당히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오해를 서로 간에 대화하면서 해결해 나간다면 이 글의 본 목적이 좀 더 되살아나지 않을까 해서 굳이 적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무심거사
    작성일
    14.08.15 23:06
    No. 10

    좋은 글 수고하셨습니다. 우리의 풍현은 언제나 우리 곁에 다시 올까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도귀님도 건강하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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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3 비평요청 제 글에 대해 비평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 Lv.15 깁흔가람 14.07.29 2,406 2 / 1
4292 퓨전 Inferior Struggle. 단점 편[스포일러 다수] +2 Lv.1 [탈퇴계정] 14.07.28 2,972 8 / 0
4291 퓨전 Inferior Struggle. 장점 편 +2 Lv.1 [탈퇴계정] 14.07.28 2,570 6 / 0
4290 비평요청 비평을 청합니다. +9 Lv.42 요개 14.07.26 2,531 5 / 12
4289 비평요청 제 글에 대한 비평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6 Lv.14 어쿼스틱 14.07.17 2,549 1 / 4
4288 현대물 Golden blackhole을 읽었습니다.그런데..(보충) +33 Lv.48 리얼쌍쌍 14.07.13 9,385 45 / 16
4287 현대물 웹소설로만 머물러야했던 소설 . 영웅2300을 봤습... +17 Lv.67 덕구킹 14.07.12 6,485 20 / 2
4286 무협 무림백서 +15 Lv.14 오븐구이 14.07.10 10,216 20 / 9
4285 현대물 플래티넘에 연재중인 시크릿서비스를 봤습니다. +7 Lv.67 덕구킹 14.07.10 3,601 8 / 3
4284 게임 '템페스트 러시' 를 읽고 +3 Lv.11 레듀미안 14.07.10 3,339 1 / 0
4283 판타지 [대체역사소설] 꿈의제국 +5 Lv.1 [탈퇴계정] 14.07.09 5,323 3 / 0
» 무협 풍종호의 경혼기 지존록의 주체와 욕망| +10 Lv.99 惡賭鬼 14.07.09 5,099 22 / 0
4281 무협 좌백의 비적유성탄 속의 현존재의 본질 +3 Lv.99 惡賭鬼 14.07.09 3,285 15 / 2
4280 비평요청 비평요청드립니다. +2 Lv.14 화사 14.07.08 2,099 0 / 0
4279 현대물 어울림에서 내놓은 장편소설(이라고읽고 현판) 신... +24 Lv.67 덕구킹 14.07.06 5,685 21 / 0
4278 비평요청 비평 부탁드립니다. +3 Lv.2 넷처 14.07.05 2,235 0 / 3
4277 판타지 한국호랑이를 읽고 +7 Lv.11 레듀미안 14.07.04 3,236 8 / 0
4276 비평요청 비평 부탁드립니다. +2 Lv.46 [탈퇴계정] 14.07.03 1,879 0 / 0
4275 무협 패도군림 +2 Lv.99 선위 14.07.03 3,038 3 / 1
4274 판타지 불멸의 대마법사 +1 Lv.3 (이성욱) 14.07.02 3,856 3 / 3
4273 현대물 멸망을 막는 자, 호 카테콘 -주인공의 매력이 너무... +4 Personacon 강춘봉 14.07.01 3,077 7 / 0
4272 비평요청 감히 비평을 요청합니다. +8 Personacon 작은불꽃 14.06.30 2,566 1 / 1
4271 현대물 진짜 세상물정 모르는 방구석폐인이 쓴듯한 소설 ... +62 Lv.1 Erszabat 14.06.26 11,188 51 / 4
4270 일반 진지하지만 쫄깃한 연재를 원할 때. 그 칠 주야 +3 Lv.33 뎀니 14.06.27 3,195 9 / 1
4269 비평요청 비평 부탁드립니다. +5 Lv.44 Nakk 14.06.26 2,577 4 / 0
4268 무협 등룡기 - 신무협을 가장한 무협야설 +21 Lv.2 폭화강권 14.06.25 17,154 12 / 5
4267 퓨전 플래티넘 작품에 정성을 보여주십시요. +7 Lv.63 루피z 14.06.24 3,780 34 / 2
4266 현대물 구름도시 이야기 +1 Lv.1 [탈퇴계정] 14.06.22 3,666 8 / 0
4265 퓨전 동국기 끽해서 불로 지지는거? +9 Lv.53 제이라노 14.06.21 3,132 8 / 5
4264 퓨전 열왕대전기 +16 Lv.14 오븐구이 14.06.20 3,415 11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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