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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제가 많이 생각하고 느낀 부분을 한번 정리해서 올려 보는 것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을 듯 한 글이지만, 제 개인적인 소견이고 또한 장르문학을 비판하지는 취지는 더더욱 아닙니다. 비평적인 댓글은 겸허히 수용하고, 질문에 대한 댓글은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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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는 수많은 사조 내지는 전통이 존재한다. 소위 말하는 고전주의, 리얼리즘, 모더니즘 같은 것들 뿐 아니라 그 하부개념의 여러 사조와 전통들이 어우러져 있다. 물론 무지개의 스팩트럼 같은 문학의 모호한 범위 때문에 딱 잘라 사조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유행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작가군 등을 범주화 하는 일은 문학의 학문적 편의성을 위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현대로 오면 올수록 문학의 범위는 광범위해지고 넓어져 단순히 소설이나 시 만을 문학이라 하지 않고, 그 안에는 비평과 서간등이 포함될 수 있으며 특히 문학이 대중화되면서 과거의 엘리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적’ 문학작품이 아닌 ‘상품화된’ 문학작품도 봇물을 이루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위 ‘장르문학’ 이라 일컫는 무협 혹은 판타지.로맨스 소설 등이다. 과거 20세기 초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며 일반 대중들과의 문학적 거리감을 형성했던 모더니즘이 점차 쇠퇴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을 계승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대두되면서 수많은 실험적 작품들이 형성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적어도 심미성을 강요하지 않고 문학을 사회와 대중속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 데서는 모더니즘과 차이점을 보이지만, 이름에서 보이듯이 포스트 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의 연속적인 작용이기에 일반 대중들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탈 장르화와 장르의 확대를 위한 시도가 계속되었고 그에는 재미와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탄생되었으며 이로인해 예술적 심미성보다 읽는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장르문학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협 혹은 판타지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아니다. 무협이나 판타지의 기원을 찾자면 오히려 고전주의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고소설-일테면 홍길동전 등이나 유럽의 아서왕 이야기 같은-은 이런 장르문학의 특징인 영웅주의를 취하고 있으며, 연대기적 서사방식을 취하여 언어를 예술로 형상화 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이끄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를 기점으로 무협이 부흥하기 시작해서 2000년대에는 신무협 혹은 퓨전판타지가 등장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확실한 하나의 문학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연령대별로 고른 독자층을 수용하게 되었고, 대여점 문화라는 국내의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중흥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장르문학은 딱히 문예사조나 전통에 구애받는 일이 없고, 오히려 과거의 고전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문학의 사조 내지는 전통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비단 문학 뿐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종교학 같은 여러 가지의 학문적 개념들이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페러다임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모더니즘의 경우에도 니체의 해체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문학의 경우 대중성-재미-과 상업적 특성을 우선시하기에 관념적인 철학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점은 장르문학의 한계와도 직결된다. 꼭 무협 등의 장르문학이 당대에 유행하는 사조나 문학적 전통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문예사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스토리의 정형화로 인한 획일적인 내용의 양산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신무협이니 퓨전 판타지니 하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장르문학이 과거를 답습한 채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구조상의 새로운 개념밖에는 이루지 못한다. 결국 이로인해 무협은 과거보다는 대중성을 많이 확보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적인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장르문학의 대중성은 어찌보면 현재의 반작용으로 인한 새로운 페러다임의 개척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메스미디어.혹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무협만 봐도 새로운 작가층이 형성되고 여러 방면으로 실험적인 방법이 계승되고 있지만 결국 고전주의적인 영웅사관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크나큰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일부 작품의 경우 이를 벗어나려고 시도는 하지만 현대문학의 가장 큰 과제인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결국 새로이 출간되는 신무협의 경우에도 장기적으로 구독한 매니아층이 아니고서는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긴다. 그러나 대중성(여기에서의 대중성은 좁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과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무협으로서는 새로운 프런티어적 문학관 보다는 과거를 답습하는, 특히 개인적 영웅을 내세운 정해진 범주안의 스토리라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로인해 현재 나날이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해 나가며 점차 발전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새로운 문학적 페러다임의 미확보는 기존 독자층을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단적으로 무협소설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중원을 배경으로, 특히 명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불문율처럼 되었고, 판타지의 경우는 무협처럼 중세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논픽션적 판타지소설을 구축하기 보단 오로지 작가의 세로운 새계관을 창출하는 데 주력하고, 그나마도 마법의 개념이나 여러 종족등의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해진 그릇 안에서만 이야기를 창출해내려는 한계를 지닌다.
물론 문학 자체가 수천년간 인류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제는 ‘창조(픽션)’의 개념보다는 ‘상호 텍스트성(쉽게 말해서 과거의 문학작품의 텍스트를 통한 재창조)’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만-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와 깊은 연관이 있다.-최소한 탈장르화를 통한 새로운 시도 없이는 더 이상의 대중성 확보는 힘든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장르문학 은 그 자체가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과거 텍스트의 재창조보다는 발전적으로 장르의 새로운 탈피 혹은 확대를 통한 새로운 개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나 도입은 단지 현재의 페러다임 안에서만 끝나고 비슷비슷한 내용을 이용한 재창조만이 성행하고 있으니, 장르문학, 특히 무협의 팬으로써는 상당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장르문학이 과거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장르화의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국내에서는 ‘퇴마록’이나 ‘치우천왕기’ 같은 한국형 판타지를 표방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현재진행형이고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무궁한 것이나, 아직 대세로 자리잡지는 못했고 그 개념마저도 모호한 상태이다. 거기다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이 아직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런류의 소설들이 자리잡기는 매우 힘든 실정이다.
유럽의 경우 톨킨으로부터 시작된 판타지 장르가 꽤 보편화 됐고, 대중화 되면서 일반 대중은 물론 학계에도 보급이 많이 된 상태인데다가 최근의 ‘해리포터 시리즈’로 새로운 판타지 장르의 지평을 열면서 전통적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선마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통해 서구의 판타지 문학은 거의 주류에 올라섰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여기엔 개방적인 사고의 개념을 가진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럽에서 출발했고, 문화적 특성상 다원성을 강조하는 그들의 사회적 상황이 맞물려 일어난 일이기에 아직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나라 문학계의 현실상 장르문학까지 취급하기에는 힘든 점이 많은 것은 인정한다. 게다가 보수적인 기성 작가들이 장르문학에는 알레르기반응마저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악조건들도 장르문학을 집필하는 작가들의 노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협. 판타지 소설의 독자 연령층이 낮아지며 작가들의 연령층도 덩달아 낮아져서 기성 문단의 코드와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가끔가다 습작수준의 작품들이 나오는 우리나라 장르문학계의 현실에서 장르문학을 비주류에서 주류문화로 옮기기 위해서는 작가들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건 사실이다. 그리고 우선 문체나 필력 혹은 플롯의 수준을 떠나 일정한 틀에 갇혀 진취적인 발전을 하지 못하는 장르문학의 현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르문학 특유의 새로운 사조를 끌어내는 것이다.
문예사조나 전통은 그만큼의 역사가 축적되어야 제대로 빛을 보는 법이다. 김용으로부터 시작된 무협도 이제는 어느정도 전통과 역사를 갖추게 되었고, 수많은 기성작가들과 후배 작가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물론 기존 주류문학계의 사조를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장르문학 나름의 사조를 형성해야지 그 개념과 틀을 확실하게 잡아 나름의 문학적.예술적 코드를 생산해 대중들과 접근하고 한국문학의 한 축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르문학도 표현은 언어로 하는 것이고, 언어라는 것은 일상적인 보편성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심미성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장르문학 나름의 예술성을 포함시킬수 있는 ‘그릇’인 사조를 형성해야지만 나름의 발전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물론 사조나 전통의 개념이 갑작스럽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처럼 쉽게 창조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장르문학의 발전을 위해 사조의 형성이 필요하다면 작가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확립되어야 하고 활발한 비평과 개념정립이 필요한 시점임에는 확실하다. 특히 장르문학계에 오래 있었던 기성 작가들이 그 일차적인 분류와 개념을 잡아놓는다면, 그 안에서 자성적인 비판과 수정이 일어나 장르문학 스스로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의 집을 지어나갈 것이다.
장르문학은 이제 비주류라고 보기엔 대중 깊숙이 침투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큰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매니아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에 주류문학에 편승되지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수천년의 역사를 쌓아온 주류문학에 비해 이제 걸음마 단계인 장르문학이 이정도까지 성장한 것도 괄목할 만한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여타 문학과 달리 인터넷상의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해서 대중의 확보가 쉬운 장점도 있다. 이제 장르문학은 이 상태로 답보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창조로 인해 더욱 발전하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작가들 뿐만 아니고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의지와도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대중문학을 지향하는 하나의 문학장르로써, 무협.판타지 소설은 소중한 첫 걸음을 떼어야 할 시기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할 장르문학의 발전을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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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글이 길어져서 쓰지 못했는데, 장르문학의 문예사조에 대한 자세한 소견은 후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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