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완결되지 않은 소설은 가급적 보지 않는다.
정 읽을 게 없으면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거나, 아예 읽지를 않을 지언정, 완결되지 않은 소설에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는다.
완결되지 않은 소설을 읽는 것은, 마치 강의 중간쯤에서 끊어져버린 다리를 걸어가는 처럼 무용한 짓이라는 게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리는 아예 처음부터 걸어갈 일이 아니다. 예전에 강을 건넜던 다리를 다시 걸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차라리 강을 건너지 않을 일이다.
또한 나는 신인의 작품은 가급적 보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그 방향은 내 마음과 같지 않아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가치체계가 정반대를 지향할수도 있다지만, 신인의 작품을 외면하려는 나의 요즘 경향은 10년 전의 나와는 정확히 대조된다.
10년 전의 나는 기존작가의 소설은 절대로 보지 않았고, 신인작가의 작품이라면 일단 호의를 가지고 탐독하기를 즐겼다.
아마 1994년도 즈음이라고 기억되는, 뫼 출판사의 신인들이 등장한 시기의 내 경향이었다. 사마달과 야설록과 검궁인등에 의해서 무협의 첫경험과 이후의 숱한 단련을 쌓은 나였지만, 1994년도 이후로 나는 오직 신인작가의 작품들만을 찾아 읽었고, 새로운 신인의 신작이 나오지 않는 동안에는 그 신인작가들의 과거작, 혹은 데뷰작들 되풀이해서 읽었다. 절대로, 누가 뭐라고 해도 신인이 아닌 작가들의 작품은 읽지 않았다.
과거에는 완결되지 않은 작품이 출판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굳이 완결된 작품들만을 찾아다닐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완결의 여부로 읽을 작품을 선별하는 점에서는 과거의 나나 지금의 나나 변한 게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자, 그런데...이제 내가 거의 절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인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떨까? 정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정반대로 변한 것일까?
외형적으로는 정반대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거의 변하지 않은 듯 하다.
내가 과거에는 신인들만의 작품을 읽었던 이유와, 현재의 내가 신인들의 작품은 읽지 않는 이유, 이 둘은 모두 한가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신인들은, 과거 내가 철저하게도 배신하고 외면했던 사마달등과 닮아있다."
한 때, 나를 비롯한 절대다수의 무협매니아층을 열광시키며 번성했던 구무협(이러한 구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편의상 1990년대 이전의 기성작가들이 주도하던 무협을 '구무협'이라고 하겠다.)의 몰락에 대한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등장하는 여러가지의 비난과, 그 비난들을 근거하는 갖가지 혐오스런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공장무협과 가필, 대필의 폐해를 겨냥하고 있다. 짜집기에 의한 사이비 창작의 문제도 심심찮게 거론되었으며, 제목만 바꿔서 재판, 삼판 팔아먹는 기만적 상술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누어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간간이 등장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것이야말로 구무협 몰락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었을 하나가 더 있다.
천편일률적인 이야기 구조의 무분별한 반복재생이 그것이다.
전형적인 주인공, 전형적인 배경, 전형적인 전개, 전형적인 결말.
이러한 구무협의 천편일률에 대한 문제는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에 의해 토론되었으며 한결같은 비난을 받은 것이니, 이 문제에 대한 담론은 생략해도 좋으리라. 그것은 이미 몰락해버린 과거의 문제이며, 현재에는 어느 누구도 답습하지 않도록 잊혀진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재의 작가들은 어느 누구도 과거 구무협의 전형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형을 조금이라도 닮지 않기 위해 노력할 정도이다. 그러니 과거 구무협의 그 질리다 못해 진저리가 처지는 전형은 더 이상 거론할 이유가 없다 하겠다.
그러나, 그 10여년 전, 구무협을 몰락시켰던 전형은 이제 없다지만, 그 전형의 근원이 되었던 '천편일률'의 망령이 1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그러한 '천편일률'의 망령에 잡혀버린 이들이 현재의 신인들, 이후의 한국무협을 이끌어갈 다음 세대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현재의 신인들을 과거 구무협의 그들에 비유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요 며칠간 작정을 하고 새로이 출판된, 미완결된 신인작가들의 작품을 찾아읽었다.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요즈음의 무협경향을 점검해 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동안 대략 40여권, 20여편의 신작들을 읽어낸 듯 하다.
구체적인 작품명은 말하지 않겠다.
작가연재에 연재중인 작품들 중 현재 출판중이지만 내가 읽지 않아왔던 작품들과 일반연재 작품들 중 현재 출판중인 몇몇 작품들, 그러니까 적어도 이곳 고무림에 연재되면서 출판되고 있는 작품들의 반수 정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일주일은, 나에게 다시 없는 고역의 시간들이었다.
하루에도 서너차례씩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속의 화를 진정시켜야 했으며,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나 자신을 긴장시켜야 했다. 특히나 중반쯤이 지나서는 이미 읽었던 작품들과 지금 읽고 있는 작품들을 구분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해야만 했다.(비록 내가 기억력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고작 어제나 그저께 읽은 소설의 내용을 헷갈려 할 정도까지는 아닌데도 말이다.)
물론, 그 일주일간 내가 읽어치운 모든 작품들이 나에게 고역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완결되지 않았음에도 나에게 책읽기의 즐거움과, 책읽고 난 뒤의 흐믓한 여운을 누리게 해 주었던 작품도 두어 편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두어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 신작들은 나를 힘들게 하였고, 그 결과 이런 위험하고도 나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글을 쓰게 만들 정도로 나를 걱정시켰다.
"로드무비식의 에피소드 나열에 의한 전개, 한 명의 강하고도 진정한 친구 혹은 부하와의 우연한 만남(그러나 그 친구는 언제나 주인공보다는 조금 약하다), 가는 곳마다 발생하는 '하필이면'식의 사건들, 또는 제멋대로 방랑하는 주인공만을 따라다니며 발생하는 중요한 사건들, 누구를 만나든 일단 싸우고 보는 첫대면..그리고 무엇보다도 '건방지고 즉흥적이며 나는 항상 남보다 잘났다는 독선으로 무장된 주인공', 아..더 중요한 게 있다. 주인공은 촛불이고, 주변인물은 모두가 불나방이다."
요 근래 발간된 신인의 작품들 중에서 위에 언급된 특징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은 몇이나 될까?
내가 비난하고 싶은 것은 위의 특징들이 아니다.
위의 특징들은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닌 까닭이다.
어느 한 작가가 위의 특징들만으로 엮어진 작품을 한 편 쓴다고 했을 때, 그는 어쩌면 매우 훌륭한 작품을 써 낼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위의 특징들은 현재 무협을 읽는 독자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일종의 '코드'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특징들이 어느 한 작가가 아닌 대다수의 작가들에 의해서 공통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과거 구무협의 천편일률적인 전형 역시, 그 자체로는 전혀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도 안정적인 이야기구조였기에 하나의 전형으로까지 굳어졌다 할 수 있으니, 차라리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을 수도 있지가 않을까?
그런 전형이 구무협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 것은 어느 한 작가, 어느 한 작품에서가 아니라 모든 작가의 모든 작품들에서 다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대충 백여편 정도만 읽고나면 더 이상의 새로운 이야기는 읽을 수가 없어졌고, 따라서 독자들은 백여편 정도만 읽고 나면, 더 이상 무협을 읽지 않았다. 읽을 필요가 없었다. 첫 장, 혹은 첫 권의 반 정도만 슥 훑어보면 전체의 이야기가 훤하니 읽혀지는
소설따위 무엇하러 읽겠는가. (고작 백여편인 것이다. 사실 무협소설 백여편이란 편당 몇 권 해서 몇백권의 분량이라기보다는, 한 편이 한 권이 분량정도로만 읽혀질 뿐이다. 어느 독자를 그 하나의 장르에 잡아두기에는 너무 적지 않은가?)
자,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현재의 신인작가들은 어째서 그렇게 한결같은 이야기, 판에 박힌 구성만으로 작품을 쓰는가?
혹시 그런 이야기, 그런 구성이 쓰기 쉬워서인가?
실재로 그런 이야기, 그런 구성은 대단히 쓰기 쉽다. 특히나 로드무비식의 에피소드식 연결은 전체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이어나가야 하는 어려움으로부터 작가를 해방시켜 준다. 적당한 엑스트라를 등장시켜 적당한 길이의 에피소드만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그냥 연결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에피소드들은 자체완결적일 필요도 없다. 나중에 작품을 끝낼 즈음에 돌이켜봐서 필요하면 다시 등장시켜 완결시키면 되고, 아니면 그냥 그렇게 놓아두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편한가?
아니면, 그가 아직 독자일 때, 그런 구성으로 쓰여진 그런 이야기의 작품이 너무나 감명 깊어서 '나도 작가가 되면 그렇게 써야지' 라고 결심했던 것일까? 그런 '감명'을 주는 작품이 아니라 '그런 구성의 이야기'를..?
그도 아니면, 기존의 작품은 전혀 읽어보지 않아서 그런 구성의 그런 이야기들이 너도나도 쓰여지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이건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
또 무슨 이유가 더 있을까..?
뭐가 더 있던지, 나는 어떤 이유도 아니기를 바란다.
특히 첫 번째 이유만은 절대 아니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것은 쉽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글이 쉽지 않은 건 아니다. 단지 잠 못자고 밤을 새거나 자료조사때문에 두꺼운 책을 읽어내거나 남들 술마시고 노는 시간에 외롭게 자판이나 두드려야 한다는 따위를 두고 글쓰기가 어렵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밤새 술 마시며 고스톱 화투를 치는 건 정말 어렵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백일간 잠 한 숨 못자고 천권의 자료서를 독파하며 집안에서 두문불출 글만 쓰느라 건강이 망가졌다라고 해도, 그래서 나는 어렵게 글을 썼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새롭고도 낯선 뭔가를 창조하는 '창작'에의 지난함에 의미할 뿐이다.
그 '창작'에의 고통을 비껴서 그저 '노가다'적인 일품만 들여서 썼다면, 그 글은 결코 어렵게 쓴 게 아니다. 쉽게, 또는 '비겁하게' 쓴 글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련일률의 망령에 작가로서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결국 한국무협을 또 한 번 몰락시키는 행위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
뭐, 그렇다는 말이다...
p.s.
사실 좀 흥분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요즘의 심경이 안정되지 못한 까닭이고, 지난 일주일간 꾹꾹 참아온 화가 술 한잔에 솟구친 까닭입니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의 편협되고 고루한 성품 탓입니다.
게다가 취기때문인지 본래 제 사고가 정돈되지 못한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어지러운 글이기도 합니다.
혹여 이 글로 인해 기분이 상하시는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저를 꾸짖으셔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보편적으로 정당한 시선이 아니라는 건, 저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쯤 소리치고 싶었고, 그래서 이 다분히 부당하고 시비조인 글을 감히 이 게시판에 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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