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가사님 댓글 달아주신거 보고 올릴게요. 이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스타트 지점을 골라 주세요. 부탁드려요. 시작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고 있어서....
죄송해요. 이런건 본인이 정해야 하는건데. 그래도 혹시나 시간 남으시는 분들은 이거 그리 길지 않은 거니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면 안될까요? (9번 추가했어요.)
1번. 막상 입을 떼려니 마음 한 구석, 잔존하던 망설임이 고개를 들고 제동을 걸어온다. 답답함이 긴 한숨만이 입술에서 새어나온다. 무엇부터 말해야 하는 걸까, 이것으로 나아지긴 하는 걸까 하는 물음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자신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정면을 바라본다. 이미 내겐, 걸레짝이 되어버린 자신을 외면할 여력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한계에 봉착한 자신은 끊임없이 바스러져 가고 있었다.
이 푸념의 기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자인 자신의 기억은 잘게 토막 난 채로 허공을 부유할 따름이다. 다만 나는, 그저 조각난 파편들을 이어 내뱉고 싶을 뿐이다.
2번. 거짓이길, 부디 악몽이길 바랬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잔혹하리만큼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주저앉을 듯, 맥이 풀린 다리를 추슬러 벽에 몸을 기댔다. 여태 감내하며 살아왔던 나날들이 무의미해지는, 내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믿어왔던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지는, 위태로이 자신을 지탱해 왔던 버팀목이 잘려나가는, 허무한 공허감에 실소를 금치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3번. 입김이 하얗게 말려 부서졌다. 한 해의 끝에 접어들어 부는 바람은 앙상하고도 삭막한 고요를 대지에 내리 앉혔다. 별이 자취를 감춘 도심하늘 아래 잿빛 구조물들은 흉물스런 외양을 벗어던지고 이지러지는 색으로 가장해 새벽의 공허를 지워 버렸다. 바글거리는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고독한 시야에는 어지러운 빛을 뿌려대는 간판들이 혼탁하게 녹아들었다.
4번.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멋대로 널브러진 채 썩어 뭉그러지는 시체 더미가 보인다. 온전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시체는 단 한구도 없었다. 머리가 잘렸거나 또는, 사지가 뜯겨나간 채로… 무언가에 의해 물어뜯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살점이 없는 앙상한 뼈들조차 곳곳에 이빨자국이 박힌 채, 짓눌리거나 부러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몸이 썩고 남은 해골이 하얗게 바스러지는 걸 보며 대강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할 뿐이다.
5번. 목이 말라 숨이 쓰다. 잠에서 깨어났으나 이어지는 현기증으로 빙글빙글 도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물결무늬가 새겨진 회백색 천장이 보였다. 어딘지 모를 유리창을 투과한 햇살이 방 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6번. 심연의 못에 잠겨 있던 의식이 파문을 일으키며 수면으로 떠오른다. 동시에 무지각했던 감각들이 시나브로 회복되어간다. 명멸하는 시야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창공이 담겨온다. 혼탁한 정신 사이로 바늘이 살을 찌르는 고통이 비집고 들어온다.
7번. 오래 전 소식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술이나 한 잔 마시자고. 학창시절 면식만 있던 사이였지만 잠긴 목소리로 만남을 청하는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 할 수 없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8번. 아직은 한산한 번화가를 지나치며 옷깃을 여몄다. 평소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여름에도 긴팔을 입는 나에겐, 겨울이 찾아올 때면 뼈 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진저리쳤다. 유독 한기만은 범인보다 잘 타기에 겹겹이 챙겨 입었는데도 그마저 부족했었는지 유리에 비친 내 입술은 퍼렇게 변해 있었다. 꼴사나운 작태에 긴 숨을 내쉬며 환락의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밤이 되면 그 어디보다 호화롭고 다채로운 색으로 행인들을 유혹하는 거리로.
9번. 눈이 내린다. 이른 새벽 즈음부터 편편히 낙하하던 눈송이들은, 멎을 기미 없이 계속해서 지상에 쌓여간다. 재차 하늘을 바라봐도 드리운 잿빛 구름은 걷힐 낌새조차 없다. 뿌연 습기를 닦고 차창 너머로 시선을 향해보지만, 실상은 무지각한 응시일 뿐. 고정된 시야 속, 하얗게 덮여버린 백색의 설경엔 의미가 없다. 기약 없는 바람만 수 시간, 무거운 정적을 들어내며 겨우 입을 떼 본다.
“내가…, 너무 늦었지?”
대답 대신 무미건조한 오실로스코프 기계음만 고요히 들려온다. 색색이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가련한 육신은 도구를 빌어 미약한 호흡을 이어간다. 앙상히 드러난 가죽이, 하얗게 일어나는 살결이, 뿌옇게 동공에 차오른다. 가습기가 토해내는 수증기가 허공중에 유유히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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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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