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미술시간에 상당한 시간을 보장하는 경우가 잦았었다. 그 시절 그 초등학교의 방침이었는지, 교육계의 방침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년이 오르면서 새로 만나는 친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봄은 아이들이 그림 그리기에 좋은 계절이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진학했을 때도 그랬었다. 학교 화단의 꽃나무들에 봉오리가 생기기 시작하고, 학교를 향하는 길목에 개나리 꽃봉오리가 노랗게 길을 밝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여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을 특별히 존경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머리가 여물지도 않았었고, 스승을 평가할 수준은 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선생님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보통의 다른 선생님들처럼 시끄러운 아이들에 대해서 피곤해 하셨고, 그 시절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매질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셨던 선생님이었다.
다른 미술시간에는 특정 주제를 제시하였었는데, 오늘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제일 잘 그린 그림을 뽑아서 연필 한 다스를 상품으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미 연필이 귀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상품으로 주신다는 타이틀이라는 게 아이들의 의욕을 부추겼었다.
사실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 있는 초등학생들의 미술시간에 굉장한 침묵이 일었다. 한두 명은 꼭 준비물을 준비 안하는 미술시간에 모두가 준비물을 준비했었다. 초등학생들에게는 기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특별한 이벤트에 아이들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던 것 같다.
2시간의 미술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다음 시간은 선생님이 각자 그린 그림을 들고 교단위에 올라서서 그림을 설명하라고 하셨다. 어떤 여린 여자애들은 벌써부터 잘 그리지 못한 그림 때문에 울먹이는 것 같았고, 남자애들은 자신이 그린 로봇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걱정하기도 하고, 고래를 상어처럼 그린 아이는 급하게 등지느러미를 지우려고 했었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원근감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산을 그린다는 게 작은 나무들을 꼼꼼하게 그려 넣다가 지쳐서 이상한 모자이크 같은 그림을 그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난 산이라고 주장했고, 친구들은 잔디밭이라고 외쳤었던 희미한 기억만 있다. 왜 산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없는 여자애가 있었다. 아직 너무 어려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조차 없었고, 왜 그 애는 엄마가 없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그 여자애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3학년 때도 그 여자애와 같은 반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행사에 모두가 엄마를 모시고 왔는데, 그 여자애만 아빠를 모시고 왔었다.
그 여자애가 그린 그림을 들고 교단위에 섰다. 그 여자애가 펼친 스케치북에는 분명히 어른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고, 그 여자애는 엄마를 그린 그림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 했다. 시끌벅적하던 그림 발표시간이 좀 전의 그림 그리던 시간만큼이나 조용해졌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철이 없어서, 짓궂은 아이들이 몇몇 있기도 했지만 잠시 동안 아무도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해 졌었다. 그래도 튀고 싶은 녀석들이 한둘은 있기 마련이고, 한 개구쟁이 녀석이 물었다.
“넌 엄마가 없잖아?”
“응”
“그런데, 어떻게 엄마 얼굴을 그렸어?”
“몰라”
선생님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런 질문을 한 그 개구쟁이 녀석이 혼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그 여자애도 담담하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모두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선생님이 가장 잘 그린 그림을 반장선거 하듯이 뽑으라고 하셨다. 아이들이 손을 들고 몇몇 그림들을 추천했고, 반장은 칠판에 그 그림의 주인 이름을 적었다.
그 여자애의 엄마 얼굴 그림도 추천을 받았다. 반장은 칠판에 적힌 이름 순서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은 손을 드는 복수투표를 제안했고 아이들이 거수투표를 시작했다. 그 여자애의 엄마 그림 순서가 되었을 때, 모든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약속하신대로 그 여자애에게 연필을 건네셨다. 그러다 갑자기 선생님이 눈물을 보이셨다. 그 나이 아이들에게 울음은 전염속도가 빠른 편이었고, 반 아이들 모두가 이유도 정확히 모른 채 울었지만, 그 여자애는 울지 않았다.
따스한 봄날에 생각난, 그 여자애의 엄마 얼굴 그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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