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년전에 A란 수렵채집꾼이 살았다고 합시다. A는 하루에 2천칼로리를 소모하지만, 어느날 3천칼로리만큼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만약 A에게 지방축적 유전자가 없었다면 이 1천칼로리 여유분은 그냥 낭비 된 채 사라졌을겁니다. 하지만 A에겐 지방축적 유전자가 있었고, 덕분에 A는 훗날 사용할 수 있는 여분의 에너지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분의 에너지는 A의 생존확률을 높여주었겠고, A에게 큰 이점이 되어주었겠죠.
1만년 후인 지금으로 되돌아가봅시다. 여러분이 하루에 2천칼로리를 소모하는 반면 어느날 3천칼로리만큼의 음식을 먹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죠. 여러분에게는 지방축적 유전자가 있기에 여러분은 1천칼로리 여유분을 그냥 날려버리는 대신 지방으로 축적합니다. 하지만 1만년전과 달리 그것은 더 이상 여러분의 생존확률을 높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춰줍니다. 여러 다양한 성인병은 직접적인 위협으로 존재하고, 비만이기에 얻는 여러 사회적 불이익들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악영향을 끼치며, 그 여유 지방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시간, 노력, 그리고 자본을 소모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라고 그 사람들은 말하죠. 잠시 자제력을 잃고 식탐에 빠졌으니 그 죄악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그것이 무슨 물리법칙이라도 되는양 들먹이면서요.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고, 무슨 절대적인 물리법칙인 것도 아닙니다. 잉여 에너지가 지방으로 축적되는 것은 하나의 생물학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생물학적 과정은 ‘식탐은 죄악이다’라는 절대적인 도덕률을 가진 전능자가 유전자에 새겨넣은게 아닙니다.
그 생물학적 과정은 생존-번식확률을 높이기 위해 진화 된 ‘생물학적 이점’입니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써먹기 위해서요. 너무나도 과도하게 축적한 나머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지방축적의 목적과 매우 무관합니다. 지방축적은 저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저희에게 해악을 끼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저희 죄악을 엄중한 천칭으로 검사하며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심판자가 아니에요. 1만년전의 수렵채집인이 그딴 쓸데없는 심판자를 왜 대리고 다니겠습니까?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매우 편향적인 기준으로 죄책감만 불러일으키는 놈을 여러분이라면 대리고 다니겠습니까? 저라면 안 대리고 다닐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그 쓰잘데기 없는 놈을 대리고 다닌다는거죠. 원래는 저희의 도우미였던 이들이 이제는 쓰잘데기 없는 심판자로 변해버렸고, 안타깝지만 저희는 그놈들을 원하는대로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나중에 기술이 발전하면 가능하겠지만, 아직까지는 불가능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걸까요? 여러 복잡한 대답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핵심은 모두 동일합니다. 환경이 바뀌었으니까. 1만년전의 수렵채집인들이 살아가던 세계와 지금 저희가 살아가는 현대세계는 여러 극단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의 힘을 빌려 저희는 저희가 살아가는 환경 자체를 저희에게 맞도록 요리조리 뜯어고쳤고, 그 결과 현대사회라는 불후의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현대사회는 지금까지 수천년의 세월간 이 땅 위를 걸어다닌 이들이, 변덕스런 기후와 살인적인 재앙들 속에 신음하면서도, 벽돌 하나씩 꿋꿋이 만들어내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작품입니다. 저희는 수많은 위협들로 가득찬 이 행성을 수도없이 저희의 취향에 따라 뜯어고쳤고, 이제 이 세상은 사람이 살아가기에 참 편한 곳이 되었습니다. 1만년전 수렵채집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 환경은 너무나도 바뀌어져버렸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수렵채집인이 남아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저희의 몸속에 남아있는 수렵채집인의 유산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것들도 많지만, 저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들이 대다수입니다. 저희의 뿌리는 수렵채집인에 있지만, 그것은 너무 뒤떨어졌습니다. 생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그래서 두뇌의 진화에서 부스러기만을 겨우 주어먹을 수 있던 추상적 사고 능력은 이제 공을 던졌을 때 어느 궤도가 그려질지를 예측하는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생존에 큰 도움이 됬던 지방축적 능력은 이제 생존을 위협합니다. 유전자를 퍼트리는데 도움이 됬던 강간 충동은 이제 사회적 인생을 통채로 말아먹는 위험한 충동이 되어버렸고, 그외 여러 말초적인 충동들 역시 다들 대강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아주 강렬하고 원초적입니다. 삶이란 것에 총천연색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세계에서의 생존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모두 비효율적인데다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비호환성’을 찬양하죠. 그건 그냥 너무 낡아빠져 원래 목적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는 구닥다리 알고리즘일 뿐인데 말이에요. 그러한 비논리적 찬양은 다시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생물이 얼마나 낡아빠진 구닥다리 기계인지를 더욱 부각시켜줍니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죠.
결국 저희는 21세기 안에 세개의 선택지중 하나를 맞이해야합니다.
1. 기술발전을 강제적으로 퇴보시키고 저희의 육체가 최적화되어있는 과거의 환경으로 되돌아가거나,
2. 현 상황을 유지하며 저희의 수렵채집인 두뇌가 불쾌하고 불편하다 느끼는 주제들을 회피하거나,
3.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인간의 취향’대로 뜯어고치기 시작하거나.
이 선택지 역시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발전이란 시작하기 어려운만큼 멈추기도 어렵다는거죠. 그래서 선택지 1과 2는 강제적으로 지워질 수 밖에 없고, 결국 실질적인 선택지는 3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선택지는 사실상 선택지가 아니란 아주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감안하고 다시 수정해본다면 결국 이 양자선택으로 나뉘죠.
1. 발전을 중단하고 지금까지 쌓여온 발전의 역설에 폭격당하거나,
2. 계속 발전해나가거나.
만약 저희가 지금 발전을 멈춘다고해도 지구온난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 위험한 기술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지구온난화는 이미 시작되버렸고, 저희 인간이 뭔 짓을 하던 이젠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저희 인간이 뭔 짓을 하던간에 지구온난화는 계속 이어질겁니다. 하루하루 더 심해지면서요. 빙하는 계속 녹아없어지겠고, 해수면은 계속 높아질 것이며, 농업생산과 경제활동의 중심지인 해안가 평지들은 서서히 침수되어갈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험한 기술을 의도적으로 악용하며 해악을 끼치는 조직이 나타날 경우 그걸 방지할 능력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 저희는 계속 기술을 발전시켜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가복제 나노로봇, 인공 전염병, 핵오염, 지구온난화, 그리고 여러 기타 다양한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저희는 계속 기술을 발전시켜나가야만합니다. 기술이 발전해나가면 그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나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이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문명의 발전이란게 아무리 불안하고 두렵게 느껴지더라도, 저희는 그걸 도저히 버릴 수가 없습니다. 호가지세란 말처럼, 내리고 싶어도 이젠 내릴 수가 없게 됬어요. 그리고 이미 구닥다리로 변해버린 인류는, 점차 불가해하게 변해가는 세계속에서 계속 더 낡아갈겁니다.
저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수를 더하면 -1/12란 답이 나오고, 물질 역시 본질적으론 파동이고, 여러 감정은 그저 전기화학적 신호와 연산일 뿐이고, 하나의 양자가 2개의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고, 한 양자가 시공을 초월해 다른 양자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리고 우리 우주 너머에 완전히 다른 물리법칙을 가진 또다른 우주들이 샐수없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리고 우리의 존재 자체부터가 그저 2차원 표면으로부터 투영 된 홀로그램일지 모르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저희 인류가 다시 재설계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기술의 힘을 빌려서, 인류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핵심을 수정하고, 현실이라는 개념의 가장 근원적인 정의를 바꿔나가면서요.
섬뜩하리만치 매혹적이고, 매혹적이리만치 섬뜩한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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