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하지은
작품명 : 얼음나무 숲
출판사 : 로크미디어
평대로 쓰겠습니다.
몇 달 전에 구입했다고 전혀 읽어보지도 않고 다른 친구에서 선물로 줬다가 역시 몇 주 전에 공짜 상품권이 있어 구입한 걸 지금에서야 읽었다. 막상 읽으려고 책을 펴고 다 읽고 덮기까지는 3시간도 체 걸리지 않았는데 왜 몇 달이란 시간을 소비했는지 모르겠다. 책을 사면 여유가 있는지 잘 안 읽게 되는 이 버릇을 고쳐야 되는데……
암튼 어렵게(?) 완독한 이 책은 나름 재미가 있었다. 한 때 문피아를 열광시켰던 이야기라 어느 정도일지 생각은 해봤는데 상당한 수작이라고 할만하다. 얼음나무 숲이란 독특한 설정과 예술과의 접목, 악마란 초월적 존재의 개념은 이 작가의 소기의 성과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상당히 위태하다는 생각이었다. 양날의 면도칼을 쓰다듬고 있어 언제 날에 손이 베일지 모를 상황이나 장치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합친 느낌의 모토벤이라는 음악의 신의 이름이나,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영화 아마데우스의 대립각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읽으면서 쉽게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 글의 장점이자 단점일 것이다. 천재와 수재의 대립각은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다루어져왔기 때문에 더 이상 신선한 소재가 아니라는 것은 작가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설정과 달리 천재라 불리 우는 열등감 가득한 노력형의 존재, 남들에겐 수재이나 천재에겐 천재로 보이며 천재만을 바라보는 수재의 관계를 설정하였다. 이는 언뜻 신선한 듯 하나 이 또한 이미 많이 쓰인 소재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얼핏 생각나는 만화 베르세르크의 가츠와 그리피스의 관계(둘의 특성을 절묘히 섞어서 둘로 나눈 느낌)와도 비슷할만한 상황이니 신선한 재미가 사라진다. 고요와 바옐의 관계를 파악하는 시점부터(책 초반 수십 페이지 이내) 그 후까지 둘의 상관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독자에게 긴장감으로 작용해야할 둘의 관계가 이렇게 초반에 들통나버린 설정이라면 긴박한 긴장감을 형성하긴 힘들었다고 본다.
나는 예술에 문외한이다. 음악과 미술로 대표되는 이 예술이란 것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겠으나 어떠한 감상을 주기엔 갖춰진 지식이 매우 미천하다. 그럼에도 이미 몇몇 만화책(급히 생각을 더듬으니 만화책밖에 생각이 안남) 등에서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그 감동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그런 책들이 독자에게 감상 및 감동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묘사와 은유 대유 등의 기법이다. 음악을 소재로 하는 텍스트인 얼음나무 숲에서 이러한 감동을 기대하는 것은 독자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헌데 이 글에선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없다. 주인공 고요와 바옐의 감정에 공조는 할 수 있지만 위대한 바옐의 연주 기법이나 관객을 울리는 고요의 풍요로운 감성 따윈 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대단하다는 식의 표현 등만 존재할 뿐 바옐과 고요가 아닌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감성은 독자에게 와닫지 않는다. 텍스트로 아름답다고 하면 아름답다고 이해는 하지만 느끼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처음 얼음나무 숲에 진입했을 때 얼핏 느낄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표현은 한결 같이 아름답다 대단하다 위대하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은 예술이란 소재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결실이 아닌가 한다. 예술의 도시라는 에단에 음악 말고 다른 매체가 등장하지 않는 다는 것도 소재의 단순함을 야기해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음악의 도시였다면……
이 글의 배경이 되는 에단이란 도시의 최대 관심사는 바옐이라는 천재와 더불어 키세라는 평민층 예언가로부터 기인한 종말론과 평민층의 정치적 움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는 에단이라는 도시의 특성인지는 모르지만 일반과 달리 평민의 대우가 좋기는 하나 그다지 차이를 느낄만한 요소는 차이는 아니다. 고요의 어머니가 바옐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평민과 귀족의 갈등은 그 사회의 암적인 존재임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종말론이라는 도화선에 불이 붙여졌다. 키세가 말하는 세상은 진실로 종말을 맞이하지만 대중이 속한 현실의 세계는 여전히 평화가 지속되는 현실이다. 충분히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다루어진 만큼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파탄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음악을 듣기위해 광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청중이라는 시민들의 태도나 글 곳곳에 드러나는 대립들로 보면 종말(?) 10년후에 아무런 계기 없이 오히려 평민층의 세력이 확장한 듯 한 묘사는 글이 속한 사회 배경에 회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소설의 주 내용이 아니긴 할지라도 주인공만 사라지니 세상은 다시 평화롭더라는 식은 이해하기 힘들지 않나 한다.
이 글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요소는 마법사라 불리는 악마란 존재와 엮이는 몇몇 사건이다. ‘너그러운 용서’와 ‘고결한 복수’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익세의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 익세가 사랑한 모든 것을 불태웠다는 악마. 그 악마로부터 자신을 태워 익세를 2000년이나 지켜낸 얼음나무. 얼음나무 가지로 만든 바이올린 여명으로 이제 스스로 악마가 되어버린 익세를 다시 깨운 바옐. 바옐의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는 익세. 이 모든 것을 알지만 그저 지켜볼 뿐인 악마 키욜. 그리고 키세와 고요. 이들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의 의문점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완결에 다다랐을 때 카타르시스로 다가와야 하는 장치가 아닌가 한다. 헌데 다 읽고 난 후에도 그 관계를 정립하기가 쉽지 않다.
악마란 초월적인 존재란 대체 무엇이며 어떠한 특성을 지녔는지, 키세는 어떻게 미래를 볼 수 있었으며 키욜과의 정확한 관계는 무엇인지(단지 운명에서 키욜의 피앙세로 정해진 것인지), 키세가 사랑한 이가 트리스탄인지 고요인지. 가피르 부인과 고요의 관계는 어떠한지. 다 읽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들이 많다. 이는 작가가 알려준 것을 내가 읽지 못한 것인지 미처 알려주지 못하고 책을 완결 낸 것인지 조차 지금은 잘 모르겠다.
10권이 넘는 글이 대세인 장르 시장이지만, 1권짜리 분량의 소설은 장편에 속한다. 장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론 카타르시스라고 본다. 감정을 점진적으로 고조시키다가 일 순간에 해소시켜주는 그 마약과 같은 쾌감이 내가 소설을 보는 동기이다. 이 얼음나무 숲에서도 그러한 기법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세상 유일의 자신만의 청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바옐, 그런 바옐의 유일한 청자이고 싶으나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고요, 바옐의 언어를 알아듣고 이해하지만 느낄 수 없고 (바옐을 통해) 그러고 싶지도 않은 키욜, 바옐을 언어를 알아듣고 이해하고 느끼지만 어긋난 방식의 익세. 이 뒤틀린 관계를 풀어줄 수단이 되어야했던 이차원의 환상 얼음나무숲. 비극으로 치닫는 수단으로써는 훌륭히 사용되었으나 과연 이를 통해 실타래가 제대로 풀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바옐의 ‘고결한 복수’를 통해 실타래가 풀렸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독자로써는 어떻게 풀렸는지를 알기 힘들기에 그에 따른 카타르시스가 황홀했다고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앞서 말한 바처럼 아름답다니 아름답겠거니 한 것처럼 죽었으니 죽었나 보다하는 식으로 갑작스런 감정의 하락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방법이다. 아마 이는 ‘악마(마법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수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 괴롭히고 보는 도깨비 속성의 그것인지 진정한 악마(惡魔)인 것인지……
후에 엘리제가 자기 스스로가 유일한 청중이라고 하는 점을 볼 때 악마란 자신 마음속에 숨은 어떠한 공명심, 경쟁심, 질투, 부러움, 시기 등을 상징 하는 것 아닌가 한다. 다만 그런 것이라면 보다 몽환적인 장치를 사용하거나 현실적인 장치로써 ‘얼음나무 숲’을 다루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나중에 엘리제가 에단에 와서 연주할 곡명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아닐는지. ^^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