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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9 배산도해
작성
12.08.30 18:43
조회
4,066

작가명 : 풍종호

작품명 : 다수

출판사 : 북박스

재가 쓴건 아니고, 오래전에 인터넷 어디에선가 보고 페이스북에 올렸놨던 겁니다. 요즘들어서 노트를 뒤지다가 다시 보게 되었는데, 주변에 책방이 없어서 다시 이 책들을 볼 수 가 없네요. ㅠ

(개인적으로 이 글이 나오는 책을 보고 싶은데, 학교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더군요.)

[펌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서울대 중문과 교수 전형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p93~96]

<퍼온 거라서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좌백의 바로 뒤를 이은 작가는 풍종호이다. 1995년 8월에 출판된 풍종호의 처녀작 ‘경혼기’는 아마도 무협소설의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작품일 것이다. 주인공 분뢰수는 자아를 상실한, 아니 아예 자아가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이름도 없고(분뢰수라는 이름은 그의 무공 수법의 이름을 따름이다.), 얼굴도 없다(그는 얼굴과 손까지, 두 눈을 제외한 전신을 백포로 칭칭 감싸고 있는데, 그 백포는 벗길 수도 없고 심지어 칼로 자르거나 찢을 수도 없다.)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도 없다. 그의 기억은 2년전 그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천축에서 흑포인을 만나 분뢰수라는 무공을 배운 데서부터만 있을 뿐이다. 그는 무림의 온갖 인물들의 은밀한 사실들까지 다 알고 있는데 유독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인 것일까. 기억상실증은 대중문학에서 애용되는 모티프이고 한국 무협소설에서는 서효원의 ‘대자객교’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바 있는데, 이 모티프는 항상 인물이 본래의 자신을 되찾는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러나 ‘경혼기’의 분뢰수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 끝난 뒤에도 결국 자신을 되찾는데 실패한다.

분뢰수가 누구인지를 몇몇 인물들은 짐작한다. 2년 전 섭혼루라는 조직이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때 섭혼루주를 죽였던 ‘그’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단지 ‘그’라고만 호칭되는 그는 절대무적 무공의 소유자이며 섭혼루 사건 이후 실종되었다. 그러나 부활한 섭혼루주가 분뢰수에게 다시 죽음을 당하는 장면에서 그 짐작은 부정된다. 분뢰수는 ‘그’를 찾아 떠나고 그 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없다. 중간에 환혼노인이 방술을 사용하여 칠백년 전의 인물인 마교교주의 혼을 부르고 그 부름에 이끌려 온 분뢰수의 정체를 ‘그’라고 판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분뢰수가 마교 교주의 환생이고 ‘그’의 변신임을 암시한다. 종래의 무협소설 같으면 이 암시를 명시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경혼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실 여부에 대해서 서술자도 모르고 주인공 분뢰수도 모르며 다른 모든 인물들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모호성만이 서술을 지배한다. ‘경혼기’의 서술을 지배하는 모호성은 마왕선이라는 떠 있는 인공의 섬에 대한 묘사에서 극도에 달한다. 이 섬은 등장인물 모두가 모여드는 장소이고 분뢰수와 섭혼루주의 대결이 벌어지는 장소인데, 여기에서는 현실의 견고한 합리적 질서가 흐물흐물해져서 일종의 혼돈 상태 속으로 용해되어 버린다. 마치 이 섬이 이성과 의식의 빛이 가 닿지 않는, 끝 모를 어둠에 잠긴 무의식의 심연인 것과 같다. 이 도저한 모호성 속에서 붕괴되는 것은 자아의 정체성과 그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붕괴를 통해 풍종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가. 이에 대해서는 같은 해 10월에 출판된 풍종호의 후속작 ‘일대마도’가 유효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연적심은 그의 귀신 붙은 칼을 파괴하고서 ‘저는 이제 자유가 아닙니까? 저에게는 칼이 필요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위지관은 복수극이 종결된 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자유’를 깨우치게 된다. 그들에게는 사문의 복수가 생의 목적이 아니다. 무도의 완성이나 명예나 권력의 획득 등은 더더욱 아니다. 사부의 복수를 완수하는 것(연적심)이나 사부와의 계약을 이행하는 것(위지관)은 그들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사부, 즉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형성된 그들의 자아를 부정하고 그들은 그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하는 것이다. ‘경혼기’가 그리고 있는 자아의 정체성과 그 통일성에 대한 믿음의 붕괴는 바로 이 해방의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98년 출판되었지만, 실은 95년 12월부터 씌여지기 시작했다는 ‘호접몽’은 그 관계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호접몽’은 두 개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쌍둥이 형제 중 모용세가에 남은 모용호가 상징계의 문화 질서에 의해 구성된 자아라면 신강성 변방으로 보내어진 묵린영은 그 문화적 구성 이전에는 미분화 상태로 존재했었으나 문화적 구성에서 배제되고 억압되어버린 자아이다. ‘호접몽’은 그 중 후자의 복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용세가에서는 가전 무공의 부작용으로 인해 대대로 쌍둥이가 태어나는데 한 아이는 가문에 남고 다른 한 아이는 신강성으로 보내져 묵린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변방으로 보내어진 아이는 가문에 남은 아이가 변고를 당하는 경우에만 가문으로 돌아와 그 자리를 대신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변방에서 다음 대의 묵린영을 키우며 산다. 그러나 이번 대의 젊은 묵린영은 가문에 남았던 모용호가 죽어 대가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으로 복귀하지 못한다. 낳아 준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남긴 칼자국 때문이다. 그의 복귀는 가전 무공의 부작용을 극복하고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는 그 극복을 이루고 가문으로 돌아가 자신이 극복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증받지만(이때 낳아준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다.), 그러나 다시 변방으로 돌아간다. 그가 가문에 남는다면 묵린영이라는 또 하나의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변방으로 돌아가 묵린영의 정체성의 지속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배제되고 억압된 자아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복귀 속에서 실현되는 것은 자유이며 해방인 것이다. 그의 아내가 쌍둥이를 잉태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자유와 해방의 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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