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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작성자
Personacon 검우(劒友)
작성
03.02.10 18:45
조회
3,733

*의복

옷은 넓은 뜻과 좁은 뜻의 두가지가 있다. 넓은 뜻의 옷은 몸을 가리

는 직물을 가리키는 말로서 두의(頭衣,모자), 경의(脛衣,바지), 족의

(足衣,버선,양말) 등을 포함한다. 좁은 뜻의 옷은 몸에 입은 것을 가

리키는데, 의(衣)와 상(裳)을 병칭할 때에는 그것은 오직 윗옷만을 가

리켜서 말하는 것이다.

상고시대의 두의(頭衣)는 주로 관(冠), 면(冕), 변(弁)의 3가지가 있

었다.

관(冠)은 귀족 남자가 쓰던 모자였지만 그 양식과 용도는 후세의 이

른바 모자와는 달랐다. <설문>에는 '관(冠)은 묶는다는 뜻으로 머리카

락을 묶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대인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비녀

를 꽂아 상투를 튼 후에 다시 관을 가지고 묶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

면, 초기의 관은 단지 관량(冠梁)만이 있었는데 관량은 폭이 그렇게

넓지 않았고 주름이 있었으며 양쪽 끝은 관의 테두리에 연결되어 있어

서 관량을 쓰게 되면 마치 활 모양의 띠와 같이 앞에서부터 뒤까지 머

리털 위를 덮었다. 상고시대의 관은 결코 후세의 모자처럼 정수리 부

분을 완전히 덮지 않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관의 테두리 양쪽

곁에는 갓끈(영,纓)이 있는데 이것은 두개의 작은 명주 띠로 턱 밑에

서 묶도록 되어 있다. <사기,골계열전>에는 '순우곤이 하늘을 우러러

보고 크게 웃자, 관의 끈이 다 끊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纓)

과 유(실 사+禾+女)는 동의어이다. 구별해서 말한다면, 유는 매고 난

나머지 아래로 늘어진 부분으로 장식역할을 하였다.

고대의 관은 한 종류에 그치치 않았으며 재료와 색깔도 또한 모두 꼭

같지는 않았다. 진(秦), 한(漢) 이후 관량은 점점 넓어졌고 관의 테두

리와 연결되어 술잔을 엎어 놓은 모양이 되었다. 관의 명칭과 형태도

또한 더욱 복잡해졌다.

관은 또 면(冕)과 변(弁)의 총칭이다. 면은 검은 색으로 가장 존귀한

예관(禮冠)이다. 최초에는 천자, 제후, 대부들이 제사를 지낼 때 모두

면을 썼기 때문에 후에는 관면당황(冠冕堂皇,당당하고 훌륭하다)이라

는 성어가 생기게 되었다. 관면(冠冕)은 또 벼슬아치의 대칭으로도 쓰

였고, 또 우두머리에 있는 것을 비유하는데 쓰이기도 하였다. 면의 형

태는 보통의 관과 달랐다. 면의 윗부분에는 장방형의 판이 있어서 연

(延)이라고 하였는데, 그 아랫 부분이 머리 위에 덮이는 것이다. 연의

앞 가에는 줄에 꿴 작고 둥근 옥이 매달려 있는데 유(旒에서 갓벗긴

것)라고 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자는 12류를 달았고 제후 이하

의 유수(琉數)는 각각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다만 제왕만이

면을 쓸 수 있었으므로 면류(棉旒)는 제왕의 대칭으로 사용되었다. 왕

유의 <화가지사인조조대명궁지작>에는 '만국의 의관을 갖춘 벼슬아치

들이 면류(제왕)에 절을 하네'라고 하였다.

변(弁)도 역시 비교적 존귀한 관으로 작변(爵弁)과 피변(皮弁)이 있

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작변은 바로 유(旒)가 없는 면(冕)이다. 피

변은 백록피(白鹿皮)로 만든 것으로, 꼭대기가 뾰족하여 후세의 과피

모(瓜皮帽)와 유사하였다. 녹피를 봉합한 솔기에는 줄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옥석(玉石)을 달아 놓아서 별처럼 보였으므로, <시경, 위

풍, 기욱>에는 '장식한 피변(皮弁)이 별처럼 빛나네'라고 하였다.

면과 변을 상투 위의 쓸 때에는 모두 비교적 긴 비녀를 횡으로 꽂아

야 했는데, 비녀를 상투에 꽂고 면, 변을 그 위에 별도로 썼다. 그런

다음 비녀의 한쪽 끝에 작은 명주 띠를 묶어서 턱 아래로 돌려서 다시

비녀의 다른 한쪽 끝에 묶었다. 이 띠는 영(纓)이라 하지 않고 굉(紘)

이라고 하였다. 이외에 비녀의 양끝에는 각각 담(枕에서 木이 아니라

실 사)이라고 하는 명주 끈으로 하나의 옥을 늘어뜨리는데, 이것을 진

(瑨,晉이 아니라 眞,귀막이 옥)이라고 하였다. 두개의 진은 바로 좌우

두귀에서 만나기 때문에, 일명 충이(充耳) 또는 색이(塞耳)라고도 하

였다. <시경,위풍,기욱>에 '아름다운 옥돌 귀막이'라고 한 것은 바로

진(瑨)을 가리키는 것이다.

덧붙여서 말한다면, 옛날에는 귀족만이 비로서 관을 쓰고 수레를 탔

는데 수레에는 수레 덮개가 있었으므로 고대인들은 관개(冠蓋)를 귀인

의 대칭으로 썼다. 관개는 또 벼슬아치의 관복(官服)과 차개(車蓋)를

가리켰으므로 또한 벼슬아치의 대칭으로도 쓰였다.

서민들의 두의(頭衣)는 통치계급과 달랐다. 그들은 관변(冠弁)을 만

들 재력도 없을 뿐 아니라 또한 통치계급도 그들에게 관변을 쓸 수 있

는 권리를 주지 않았다. <석명,석수식>에는 '선비는 관을 쓰고 서민은

두건을 쓴다'라고 하였는데 서민들은 오직 두건만 쓸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옥편>에는 '건(巾)은 허리에 차는 수건으로 본래는 물건을

닦았지만, 후인들은 그것을 머리에 썼다'라고 하였다. 서민들이 쓰는

두건은 아마 일을 할 때 땀을 닦는 헝겊이었을 것인데, 한가지 물건으

로 두 가지에 사용하여 모자로 머리를 쌀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대에 이르기까지 두건은 여전히 서민들과 은사(隱士)들에게 사용되었

다.

책(積,禾가 아니라 巾,머리싸개)은 바로 머리를 싸는 헝겊이다. 채옹

의 <독단>에는 '책이란 옛날에 비천한 집사(執事)와 관을 쓰지 않는

자가 쓰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민의 머리싸개는 검은 색이나 푸른

색이었는데, 서민들은 이미 관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다만 건

이나 책만을 쓰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으므로 두의(頭衣)의 제도에 있

어서도 심각한 계급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대(秦代)에는 '백

성을 검수(黔首,검(黔)은 검은색)라고 하였고, 한대에는 노복을 창두

(蒼頭,창(蒼)은 푸른색)'라고 하였는데 모두 두의로 구별한 것이다.

책은 머리카락을 눌러서 관을 안정되게 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후에는 귀족들도 또한 책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책 위에 다시 관을

올려 쓰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은 앞이 약간 높고 뒤가 약간 낮게 되

어 있고 중간에는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오늘날의 연극 무대에 등장하

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관 밑에도 모두 책을 쓰고 있는데 관을 벗으

면 책이 드러난다. 이외에 또 하나의 비교적 격식을 갖춘 책이 있었는

데 곧 책에 덮개(모자의 꼭대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책을 쓰면 다

시 관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책은 본래 이마를 덮는 것으로 책을 써

도 앞이마가 노출되면 고대인들은 안책(岸積,안(岸)은 드러난다는 뜻)

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소탈하여 예절에 구애되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진서,사혁전>에는 '두건을 벗어 이마를 내놓고 웃고 읆조려

평소와 다름없었다'라고 하였다.

모(帽)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관(冠), 면(冕)이 생겨나기 이전의 두

의(頭衣)였다. <순자,예공>편에는 '애공이 공자에게 순(舜)임금의 관

을 물었는데 공자는 "옛날의 임금 중에는 무(務,모자의 일종)를 쓰고

옷깃이 둥근 옷을 입었던 사람이 있었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

다. 양량은 '무(務)는 모(帽)로 읽는다'라고 하였는데 무(務)가 모

(帽)의 뜻임을 말한 것이다.

<설문>에는 모(曰)는 어린아이와 오랑캐들의 두의라고 하였는데, 모

(曰)는 옛날의 모(帽)이다. 그러나 상고의 문헌 중에는 모(帽)를 언급

한 것이 거의 없다. 위(魏), 진(晋) 이전에 한족들이 썼던 모자는 일

종의 편모(便帽,평상모)로 <세설신어,임탄>편에는 사상이 '책을 벗고

모를 쓰고서 환자야의 집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라고 하였다. 당

시의 모(帽)도 역시 일종의 편모(便帽)였음을 알 수 있다. 후에는 모

는 정식의 두의가 되었는데, 두보의 <음중팔선가>에는 장욱이 '왕공의

앞에서 모자를 벗고 정수리를 드러내었네'라고 하였는데, 탈모는 무례

한 짓이고 모자를 쓰는 것이 예의바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고대에는 의상(衣裳)을 병칭할 때 의(衣)는 단지 윗

옷만을 가리킬 뿐이었다. 아래옷은 상(裳)이라고 하였다. <시경,패풍,

녹의>에는 '녹색의 윗옷에 누런 아래옷이라네'라고 하였고, <시경,제

풍,동방미명>에는 '윗옷과 아래옷을 거꾸로 입었네'라고 하였다. 그러

나 상(裳)은 바지가 아니라 치마였다. <설문>에는 '상(裳)은 치마다'

라고 하였다. 의(衣), 상(裳)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은 심의(深衣)

라고 하였다.

고대인들은 옷섶을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여 덮었으며 끈으로 고름을

맨 후에 허리에서 속대(束帶)를 하였다. <논어,헌문>에는 '공자께서

관중이 없었더라면 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섶을 왼쪽으로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옷섶을 왼쪽으로 하는 것은 중국의

습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대(帶,띠)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

는 명주를 짜서 만든 대대(大帶)이고, 다른 하나는 가죽으로 만든 혁

대(革帶)였다. 대대는 옷을 묶는데 쓰인 것으로 신(紳)이라고 하였고,

신은 또 특히 묶은 후 남아서 아래로 늘어진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였

다. 고대인들은 흔히 진신(搢紳)이라고 하였는데 입조(入朝)할때 잡는

수판(手版,홀(笏))을 대(帶) 사이에 꽂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신은

벼슬아치의 대칭이 되었으며 신사(紳士)라는 뜻도 여기에서 발전한 것

이다. 혁대는 반(槃-木+革)이라고 하는데 패옥같은 장식물을 차는데

사용되었다.

고대인들은 옥(玉)을 매우 진귀한 것으로 여겼다. 옥으로 만든 물건

은 제사나 외교, 그리고 사교 등의 방면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식(服飾)에도 사용되었다. <예기,옥조>에는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옥을 찼다'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일이 없이는 옥을 몸에서 떼지 않

았다'라고 하였다. 패옥은 귀족들이 매우 중히 여기는 옷장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복(禮服)에는 두쌍의 똑같은 패옥

이 따르는데, 허리의 좌우에 각각 한쌍씩을 찼다. 매쌍의 패옥은 모두

명주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단에는 형(衡)이라는 활모양의 옥이 하

나 있고, 형(衡)의 양끝에는 각각 황(璜)이라는 반원형의 옥이 하나씩

달려 있고, 가운데에는 거(王+居)와 우(瑀)라는 하나의 옥이 매어 있

으며, 양쪽 황(璜) 사이에는 형아(衡牙)라는 하나의 옥이 달려 있다.

길을 걸으면 충아(衡牙)와 두개의 황이 서로 부딧혀서 듣기 좋은 소리

가 났다. <시경,정풍,여왈계명>에는 '여러가지 패옥을 드리네'라고 하

였는데, 구주(舊注)에 의하면 잡패(雜佩)는 바로 이러한 패옥이었다.

이외에도 고서에는 또 항상 패환(佩環), 패결(佩訣,결(訣-言+王)은 이

빠진 부분이 있는 패환(佩環)임)을 언급하였다. 부녀자들도 옥가락지

(玉環)을 끼고 패옥을 하였다.

갖옷(가죽겉옷)과 솜옷(袍)은 추위를 막는 의복이다. <시경,회풍,고

구>에는 '염소 갖옷은 윤기가 흘러 햇빛에 번쩍이네'라고 하였고, <시

경,소아,도인사>에는 '저 서울 양반의 갖옷이 누렇기도 하네'라고 하

였다. 고대인들은 갖옷을 입었으며 그 털은 밖으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갖옷의 털의 색깔이나 윤기를 보기 어려

웠을 것이다. 손님에게 인삿말을 하거나 혹은 손님을 맞을 때에는 갖

옷 위에 외투같은 것을 걸쳤는데 그것을 석의((錫-金+衣)衣,웃옷)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공경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석의와

갖옷은 색깔이 서로 어울려야 했으므로, <논어,향당>에는 '검은 옷에

는 염소 갖옷, 흰 옷에는 사슴새끼 갖옷, 누런 옷에는 여우 갖옷을 입

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집에 있을 때에는 갖옷 위에 석의를 걸치지

않았다. 서민들은 개 갖옷과 양 갖옷을 입었으며 역시 석의는 걸치지

않았다.

솜옷(袍)은 장오(長(衣+奧),긴 웃옷)로 그 속에는 난마(亂麻,온(縕))

를 깔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가난하여 갖옷을 입을 수 없는 사람들

이 겨우 이 포(袍)를 입었다. <논어,자한>에는 '해진 온포(縕袍)를 입

고 여우와 이리 털로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유(由)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포를 입는 것과 갖옷을 입

는 것에는 빈부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漢) 이후에는 강사

포(絳紗袍), 조사포((白+七)紗袍)가 있었으므로, 포는 조복(朝服)이

되었다.

곤(袞)은 천자와 최상급 관리의 예복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곤 위

에는 웅크린 모양의 용을 수놓았다고 한다. 후대의 이른바 용포(龍袍)

는 곤의 유제(遺制)이다.

상고시대에는 아직 면화를 재배할 줄을 몰랐다. 이른바 서(絮)나 면

(綿)은 모두 사면(絲棉)일 뿐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상고시대의 이른

바 포(布)는 결코 면직품(棉織品)이 아니라 마직품(麻織品) 또는 갈직

품(葛織品)이었던 것이다. 백(帛)은 사직품(絲織品)의 총칭이다. 포

(布)와 백(帛)도 역시 저급의복과 고급의복의 대비를 이루었는데, 가

난한 사람은 사직품은 입을 수가 없고 오직 마직품만을 입을 수 있었

기 때문에 포의(布衣)라는 말은 서민의 대칭이 되었다. 가장 보잘것

없는 의복은 갈(褐)이라고 하였는데, 거칠은 털로 짰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갈부(褐夫)라고 불렀다. <맹자,등문공 상>에는 허행의 무리들

이 '모두 갈옷을 입고 신을 삼고 자리를 짜면서 끼니를 해결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노동자의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양옹의 <해조>에는

'혹은 갈옷을 벗어버리고 태부(太傳)가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보잘것없는 의복을 벗어버리고 높은 관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후세에

과거에서 새로운 진사가 급제하여 벼슬을 제수받는 것도 역시 그대로

석갈(釋褐)이라고 하였다.

상고시대에는 남녀복장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고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남녀 복장은 아직 엄격히 구분되지는 않았

다. 유(孺-子+衣)와 군(裙)을 예로 들어 본다. 악부시 <맥상상>에는

'담황색 비단으로 치마(裙)을 만들고, 자줏빛 비단으로는 윗저고리

(孺)를 만드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유와 군은 부녀자의 복장이

다. 그러나 <장자,외물>에서 '아직 치마와 저고리를 벗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결코 부녀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남사,장기전>에는

양무제가 장기에게 치마와 저고리(裙孺)를 하사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자도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규(珪-王

+衣))만은 부녀자의 웃옷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대개 믿을 만하다. 송

옥의 <신녀부>에는 '웃옷(珪)과 치마를 입었네'라고 하였고, 조식의

<낙신부>에는 '가벼운 웃옷(珪)이 아름답게 드날리네'라고 하였으므로

증거로 삼을 수 있다. 당(唐), 송(宋) 이후에는 부녀자들이 치마를 입

는 기풍이 크게 성행하여 남자들은 포(袍)를 평상복으로 입었고 여자

들은 치마를 평상복으로 입게 되었다.

상고시대에는 상(裳)은 있었으나, 고(庫+衣)는 없었다. 상고시대의

문헌 속에 고(袴-衣+絲)자가 있고 또 고(袴)라고도 썼는데 자음으로

볼때 이것은 바로 후대의 고(庫)자다. 그러나 상고시대의 이른바 고

(袴)는 결코 오늘날의 이른바 고(庫)와는 달랐다. <설문>에는 '고(袴-

衣+絲)는 바지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이른바 고(袴)는 오늘날의 투고

(套庫)와 아주 흡사하였으나, 차이점은 그것은 바지의 밖에 덮어 씌우

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고(袴)의 역할은 추위를 막는 것이었

다. <태평어람>에는 <열사전>을 인용하여 '풍원은 겨우내 바지(袴)가

없었고 얼굴에는 굶주린 빛이 돌았다'라고 하였고, 또 <고사전>을 인

용하여 '손략은 겨울에 가난한 선비를 보면 바지를 벗어주었다'라고

했는데 모두 예증이 될 것이다.

잠방이가 있는 바지를 곤(衣+軍)이라고 하는데 또 곤(巾+軍)이라고도

썼다. <석명, 석의복>에는 '곤(衣+軍)은 꿰는 것으로 두 다리를 꿰어

위로 허리를 묶는다'라고 하였다. 이외에 또 한종류의 곤이 있는데 후

세의 단고차(短(衣+庫)叉)와 비슷하였다. 그 형태가 송아지의 코와 비

슷해서 독비곤(犢鼻(衣+軍))이라고 하였는데 입으면 일하는 데 편리했

다. <사기, 사마상여열전>에는 사마상여가 임공에서 '몸소 독비곤을

입고' 노비들과 함께 식기를 씼었다고 하였다.

고대인들은 헝겊으로 종아리를 비스듬히 싸매었는데 이를 사폭(邪幅)

혹은 폭(幅)이라고 하였다. <좌전,환공 2년>에는 '띠(帶), 바지(裳),

각반(幅) 그리고 신발(潟-水)'이라고 하였고 <시경,소아,채숙>에는

'밑에는 사폭을 묶었네'라고 하였으며, 정현의 주에는 '사폭은 지금

(漢代)의 행등(行謄)과 같은 것으로, 정강이 곧 발목에서 무릎까지를

묶기 때문에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상고시대의 사폭은

한대의 행등과 같고, 후세의 각반에 해당한다.

상고시대에는 신을 구(尸+數)라고 하였으며, 삼신(麻(尸+數)), 칡신

(葛구)등이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칡신은 여름에 신고 겨울에

는 가죽신(皮구)을 신었다고 한다. 보통의 신은 삼줄로 삼은 것이다.

신을 삼을때에는 엮고 단단히 두드려 질기게 만들었기 때문에 <맹자,

등문공,상>에는 '신을 두드려 삼고 자리를 짠다'라고 하였다.

석(潟-水)은 구의 별칭이다. 구별해서 말한다면 홑바닥으로 된 것을

구라고 하고 겹바닥으로 된 것을 석(潟-水)이라고 하였다. <방언(方

言)>에는 신안에 나무가 있는 것을 복석(複(潟-水))이라고 부르는데,

진흙속을 걸어도 진흙이 묻거나 물에 젖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이(履)는 원래 동사라 밟는다는 뜻이었다. <시경,위풍,갈구>에는 '엉

성하게 얽어 맨 칡신으로, 서리내린 땅이라도 밟겠네'라고 하였다. 전

국시대 이후에는 이(履)는 점차 명사로 쓰였다. <순자,정명>에는 '거

친 베옷과 거친 끈을 두른 신이라도 몸을 보호할 수 있다'라고 하였

고, <사기,유후세가>에는 '젋은이는 내려가서 신을 가져오라'라고 하

였다.

고대인들은 짚신을 사(尸+徙)라고도 하고, 또 갹(足+徙)이라고도 하

였다. <맹자,진심,상>에는 '순임금은 천하를 버리기를 해진 짚신을 버

리는 것과 같이 보았다'라 하였는데, 폐사(幣(足+徙))는 해진 짚신

이다. <사기,우경열전>에는 우경이 '짚신을 신고 삿갓을 둘러메고 조

나라의 효성왕을 유세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짚신을 신고 자루가 긴

삿갓(후대의 우산에 해당함)을 둘러메고 조나라 효성왕을 유세하러 갔

다는 뜻이다.

극(尸+人+支)은 나막신이다. 극과 석(潟-水)은 다르다. 석의 바닥은

단지 얇은 깔판만 깔든지 심지어는 바닥을 겹으로 하는 것이지만, 극

의 바닥은 두꺼운 판으로 되었고, 또 앞뒤에는 이빨같이 툭 튀어나온

굽이 있다. <송서,사영운전>에는 사영운은 늘 나막신을 신었는데, 산

에 오를 때는 앞굽을 빼어 버리고, 산을 내려올 때는 뒷굽을 빼어 버

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막신에는 이빨처럼 튀어나온 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 비로서 나막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장자,

천하>에는 묵자의 제자들이 나막신과 짚신을 신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의 나막신에 굽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고서에는 피구(皮(尸+數)), 혁석(革(潟-水)), 혁리(革履), 위리(韋

履) 등의 말로 가죽신을 가리켰다. 가죽신은 비교적 귀한 것으로 일반

서민들은 신을 수가 없었다. <설문>에는 '제(革+是)는 가죽신으로 오

랑캐들은 신을 정강이까지 올려 신었는데 그것을 낙제((洛-水+絲)(革+

是)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낙제는 후대의 이른바 화(靴,가죽신)로

이것이 외족으로부터 전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혜(鞋)는 옛날에 혜(溪-水+革)라고 썼다. <설문>에는 '혜(鞋)는 생가

죽신이다'라고 하였으므로, 혜(鞋)는 제(革+是)의 일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혜(鞋)는 변화되어 마혜(麻鞋), 초혜(草鞋), 망혜(芒鞋),

사혜(絲鞋) 등이 있게 되었다.

끝으로 말(襪)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설문>에는 '말(襪)은 버선이

다'라고 하였다. 아마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또한 제(革+是)이라

고 썼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맨발을 지극히 공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를 때에는 반드시 버선을 벗었다. <좌전,애공

25년>에는 '저사성자가 버선을 신고 자리에 올라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에 대하여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다. 말(襪)자는 후에 또

말(絲+末)이라고도 썼는데, 이것은 말(襪)의 재료가 바뀐 것을 암시한

다.

***출처 불명(-_-;;)***


Comment ' 2

  • 작성자
    Lv.1 無識漢
    작성일
    09.01.31 01:12
    No. 1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린마루
    작성일
    10.07.03 19:27
    No. 2

    잘 쓰겠습니다.하아....중국의 의식주는 끝이 없군요.또 다른 곳으로 자료 찾으러 갑니다.배경은 현대,한국이 제일 편한 것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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