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작성자
Lv.1 가일
작성
08.06.29 22:30
조회
469

1.  꽤 지난 일입니다만, 우연히 제 글에 대한 감상평이 어딘가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이게 왠걸 어허허헣...'하는 기분으로 반 페이지 남짓한 짧은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보았죠.(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겠죠? 설마 이 정도를 두고 속물!이라며 쫀쫀하게 잣대를 세우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달콤쌉싸름한 감상이었습니다. 덕담으로 채워진 전반부와 아쉬움을 토로하는 마무리가 합쳐져서 정말 정확하게 그런 느낌으로 와 닿았어요. <장르성을 탈피하려는 노력은 좋지만 지나치게 자극이 부족함. 대중성을 피하려고만 드는게 아쉽다.>가 요지였지요. 감상을 쓰신 분은 결국 그 살인적인 비대중성에 읽는 것을 그만 두셨지요. 그러나 카카오72%같은 느낌의 감상(전 아주 좋아합니다. 한 통이 근처에 있으면 느는 비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몇 분 안에 싹 쓸어담아버리죠.) 덕분에 막연하게 넘겨왔던 것들을 이모저모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2.  우선 장르성에 대한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은 것이, 저는 처음부터 장르성을 탈피하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습니다.(오덕스러움으로 부터의 탈출이라면 열심히 시도하고 있지만요;)  제 글을 판타지라는 카테고리로 걸어놓은 것은 애초에 '그것 이외에는 그나마 비슷한게 없다.'는 한심한 이유에서 출발했죠. 장르물을 쓰겠다고 도전해 볼만한 기본이 제게는 없어요.

  훌륭한 장르물은 매체를 막론하고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창의력을 요구하는 예술인 동시에, 끔찍하게 극성맞은 팬심을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환상을 다룬다고 해서 그 모두를 판타지 장르로 분류하지는 못합니다. 판타지 장르가 그동안 갈고 닦은 형식과 고유의 서사구조 같은 특징들, 흔히 장르문법이라는 것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할 수 있어야 걸작 장르물이 탄생합니다. 문법을 어설프게 다루면 장르의 특징을 잃고 삐걱거리고, 문법에만 지나치게 의지하면 소위 양산형이라는 마수에 빠져들고 마는거죠.(양산형 판정 여부는 결국 '얼마나 작가가 스스로 머리를 썼는가'에 달려있다는 거지요.) 소위 장르의 역사성(! 이렇게 말하니 뭔가 굉장히 거창한 개념 같이 느껴지지 않나요?)에 함몰되지 않도록 머리를 굴리면서도 그 장르 본연의 느낌을 살려야 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차라리 일반문학이라 불리는 것을 쓰는 것이 소재 다루기 측면에서는 편해요. 적어도 '팬심으로 공부해야 하는 역사성'따위의 굴레는 없잖아요.(물론 일반문학이라는 요상한 구분이 풍기는 거대한 정체불명의 아우라와 질적 완성도에 대한 기대에 관한 썰은 여기서는 빼놓도록 하지요.)

  결국 장르성이라는 측면에서 제 글을 정리해보면 아래 같은 요상한 꼴이 됩니다.

[판타지 장르의 주된 주제&소재]=>[글쓴이 취향과는 안드로메다]

                                       +

[판타지 장르에 대한 팬심]=>[글쓴이의 충성도는 거의 바닥]

                                      ||

                   [적어도 판타지 장르는 아닌 뭔가......]

  이런 물건을 판타지 카테고리에 걸어놓고 있었으니 결과는 엉뚱하게 되어버린거죠. 처음부터 특정 장르의 독자들을 노리고 계산한 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판타지 장르 특유의 자극을 기대하고 온 사람은 실망할 수 밖에요. 뭐 어쩔 수 없지요. 원인을 따지자면 푸줏간으로 생선을 팔겠다고 들고온 장사꾼한테 일차 책임이 있는걸요. 네? 삼겹살이요? 에이 고등어 자반도 별미랍니다 손님!

3. 더 나은 오락을 제공하기 위하여 참신한 소재와 설정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볼까요? 충격적인 컨셉이라면 투명드래곤이 있었군요. 저를 웃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조아라의 투명드래곤도 오락성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저의 경우는 초반 10회 정도까지는 그렇게 즐길 수 있었어요. 그 뒤로는 글쎄요......글의 퀄리티를 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못쓴 것 자체를 즐기자는 컨셉아닙니까?

   새로운 아이디어의(혹은 '깨는') 작품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가지 발상 가운데는 잠깐 동안 웃고 땡인 것도 분명 있습니다.(소설적 완성도에서 투명드래곤'따위'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뛰어난 작품들도 자주 보이는 모습입니다!) 장편을 끌어나가기에는 턱없이 포스가 모자란 '작은 떡밥'들이죠. 왠만한 '새로운 설정'은 에피소드 한두 개 정도면 밑천이 다 드러나게 마련이거든요. 그것 만으로 지루하지 않게 장편을 완성하는 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겠다고 덤비는 것과 똑같습니다. 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지탱하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하지요.

  주제와 컨셉과 철학이라는 것은 언뜻 거창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현학적일 이유가 없는 요소들입니다. 특히나 철학은 그중에서 가장 오해가 많지요. 사실 철학은 조금만 삐끗하게 다루면 개똥철학, 지적 나르시시즘등으로 조롱꺼리가 되기 딱 좋죠.(아예 철학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은 논외로 치지요. 맛깔나게 철학적 담론을 소개하는데도 목적이 있는 작품을 두고 누가 감히 개똥철학 운운할 수 있습니까?) 작품의 모습을 결정하는 주제와 컨셉은 결국 철학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히자면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플라톤에서부터 헤겔 칸트 등등으로 이어지는 수면 병기만을 지칭하는게 아닙니다. 창작자가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재구성하는 기준인 세계관이 바로 철학의 범주이죠. 글쓴이의 고민과 관점이 없이 좋은 아이디어만 가지고 시작한 글은 아이디어의 약발이 떨어졌을 때에 가서 결정을 내려야만 하죠.-연중하느냐, 기존의 장르문법을 그대로 활용하여 어떻게든 뒤를 이어나가느냐! 처음에 '좋은 아이디어&설정'을 도입하려고 애쓴 이유를 생각한다면 후자는 연중보다도 더 나쁜 엔딩입니다. 애초에 그저 그런 조립식 장르물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아이디어에 집착한것이 아니었던가요?

  단단한 지반을 바탕으로 정해진 주제와 컨셉은 아이디어의 효력을 훨씬 더 길게 연장시켜줍니다.'장편을 완성시키자!'라는 과업에 넉넉할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철학을 넣었다! 주제를 넣었다!'라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려고 애쓰면 개똥철학으로 놀림을 받는 것이고요. 뭐든 적당히,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새로운 설정만 갑자기 공개하고 '이것 어때요? 대박인가요?'하고 평가를 요청하는 것은 난감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설정이 활용될 세상의 법칙(작가의 철학과 작품의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명작가라면, 아이디어를 다룰 필력조차도 불투명하니 말 다한 거죠. 아 한가지는 평가할 수 있겠네요. "이 설정은 30분짜리 단막극/1만자 분량의 단편 꽁트에 충분히 어울리는 좋은 농담꺼리입니다."정도는 누구나 판단할 수 있을 거예요.

4.  화두로 꺼낸 감상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분은 제 글에서 어떤 나르시즘 비슷한 것을 느끼신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대중성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쪽으로만 파고들고 있다고요. 음, 까놓고 털어놓지요. 그건 한 글자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분명 어느정도의 도취를 가지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퀄리티가 얼마나 잘나고 엉망이건간에, 예술활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니까요. 돌이 날아오기 전에 또 밝히건데 예술이란 질적 완성도를 성취한 거장의 창조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여가를 위해 만들어낸 모든 오락물이 다 그 범주에 들어가는 거죠. 그 안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예술품, 소위 저질적인 작품 따위가 있는 것 뿐이예요.-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느끼는 도취감이란 창작품 자체의 질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거죠 '-'

  대중성이란 무엇일까요. 일단은 오락적 매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가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쳐보겠습니다. 감상자의 말과 달리 의외로 저는 제 글이 대중성의 핀트에서 완벽하게 어긋난 매니아 냄새가 짙은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복잡하게 미리 공부해야할 설정 같은 것도 없고, 흔히 빠지기 쉬운 긴 서양이름 페티쉬도 없습니다. 오타쿠 코드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그 '대중'의 정체가 판타지 장르의 팬층이라면 현상은 180도 뒤집어집니다. 기대하고 있는 오락성의 종류가 매우 어긋나있는겁니다!(1. 단락에서 밝혔듯이 이건 순전히 저에게 책임이 있지요.) 아드레날린이 칠공으로 뿜어져나오는 호쾌한 마쵸판타지를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온갖 고상한 척 치장을 두르려 애쓰는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것을 내놓으면 당연히 뚜껑이 열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중성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차차하고, 이번에는 순수하게 오락성에 대해서만 성토를 해볼께요. 많은 사람들의 취향에서 벗어난다고 그게 떨어지는 오락성의 반증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질적 완성도는 일정하다는 가정 아래에서 말이죠.

  채팅방에서 어느 분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걸작이라고는 칭해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조롱했지만, 그것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까라마조프...같은 지루한 글을 정말로 재미있어서 충분한 오락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저 대중적 취향(?)과 핀트가 안맞을 뿐이죠.

5. 열심히 휘몰아치던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하다 보니 내용이 만만찮게 길어졌네요. 다시한번 쭉 스크롤 해서 쓴 내용들을 살펴보니 정말 대책없이 뻔뻔한 나르시시스트의 사설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렇다고 내용을 갈아엎지는 않으렵니다. 재미있게 열심히 써내려 간 것을 지우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입니다. '작품을 위해!'라는 묘한 파시즘 아래서라면 뭐 눈물을 머금고 싹수를 고쳐주는 것이 미덕이겠지만, 어차피 이 글은 제 이력에 두고두고 남을 글도 아니잖아요? 그저 즐겁게 무언가를 쓰고 만들고, 앞으로 고쳐야할 병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만으로 지금은 만족하렵니다.(이런 뻘글을 쓰고 있을 동안에 차라리 글을 써라 라는 협박도 왠지 들리는듯 하네요;)※


Comment ' 1

  • 작성자
    Lv.6 달빛바다
    작성일
    08.06.30 19:02
    No. 1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겠다고 덤빈다
    재치 있는 분이시네요
    혹시 남은 빵과 물고기가 있으면 저도 나누어 주세요 ^^;
    배고파요 ^^*
    주제와 컨셉과 철학은 매우 어려운것 같아요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에 놀라운 필력으로 글에 녹여 흘려 버리지 않으면 돌아보지 않는 분들도 많죠
    언제쯤 글에 생각을 자연스럽게 녹여낼수 있으까 생각도 많이 하지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모르겠네요
    최근에 톨스토이의 단편집을 두개 읽었는데 좀 진부한 얘기라 재미가 없더라구요
    한개는 주변 인물에 대한 관찰과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그렸고 한개는 지지부진한 이야기 끝에 마음의 평화가 최고의 이상이라 썼더군요
    그래도 톨스토이처럼 무욕으로 살 자신이 없어요
    내용은 둘다 진부했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선 괜찮았지요
    카카오 72% 같은거 저도 좋아하죠 ^^
    담배대신 한동안 입에 물고 산적 있는데 몸무게 불리는데 최고의 공신이죠 ^^;;
    아~ 붉은 터럭 수염의 하사관하고 옆에 소녀 멋있게 잘 그리셨더군요
    그래픽 실기 보러 가서 23점 맞은 저는 상상하기 힘든 실력이예요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연재한담 게시판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65789 한담 과연, 문피아의 독자들은 인내심의 화신인 것인가!!! +8 Lv.15 문백경 08.07.08 1,037 0
65788 한담 가끔 무지 재미있는 꿈을 꿉니다. +15 Lv.1 유후(有逅) 08.07.08 511 0
65787 한담 '적당히'의 중요성,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 +23 Personacon 견미 08.07.08 879 0
65786 한담 게임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역시...중딩이라는 ... +2 眞殺 08.07.07 897 0
65785 한담 ...제가 아부나 좋아한다고요?... +136 Lv.11 강찬强璨 08.07.07 1,146 0
65784 한담 [한담] 드라고니아의 전설 연중 연장.. Lv.12 숲속얘기 08.07.07 1,618 0
65783 한담 우와아앙~ㅜㅜ +3 Lv.54 박한빈 08.07.06 235 0
65782 한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10 묘선(猫仙) 08.07.05 493 0
65781 한담 우후후후, 선작이 100을 향해... +5 묘선(猫仙) 08.07.05 480 0
65780 한담 연참대전의 시즌이 돌아왔군요 +11 Lv.1 [탈퇴계정] 08.07.04 350 0
65779 한담 100화 이상 쓰니 슬슬 욕심이 생기네요. +5 Lv.11 Gavin 08.07.04 1,200 0
65778 한담 고수님들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5 Lv.1 수제자 08.07.04 669 0
65777 한담 이런 댓글에는 화를 내야하는가..... +36 Lv.31 설랑(雪狼) 08.07.04 1,152 0
65776 한담 가우리님은 어디에.. +11 Lv.66 아따모야 08.07.03 1,345 0
65775 한담 작가님들을 힘들게 하는 나쁜 것(악플) +8 Lv.52 준한. 08.07.03 648 0
65774 한담 야설이라... 눈물이 나네요 정말. +56 묘선(猫仙) 08.07.03 3,250 0
65773 한담 으음... +2  휘리스 08.07.03 407 0
65772 한담 삼국지와 삼국지물을 보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 +5 Lv.37 단군한율 08.07.03 914 0
65771 한담 아부돼지에 대해서...^^* +16 Lv.68 이뿐똥글이 08.07.03 1,172 0
65770 한담 1~2권연재후 출판 과연 옳은 선택인가.. +19 Lv.1 인프라블랙 08.07.03 1,206 0
65769 한담 현실 참여적 이야기를 무협에 녹여낸다는 것이 정... +5 Lv.1 천지림 08.07.02 854 0
65768 한담 이야기를 들으면 발작적으로- +4 Lv.52 사신의연주 08.07.01 544 0
65767 한담 연담 게시판을 이용하시는 분들께... +6 성현(成賢) 08.06.30 767 0
65766 한담 글 안 쓰일 때 문피아에서 하는 일. +6 Lv.52 사신의연주 08.06.30 634 0
65765 한담 글이 막힐때는.... +3 Lv.1 [탈퇴계정] 08.06.30 437 0
65764 한담 아직도 서장인데.. .벌써 지치네요--" +5 Lv.1 [탈퇴계정] 08.06.30 472 0
65763 한담 추천 글들을 보고 +6 Lv.21 雪雨風雲 08.06.30 775 0
65762 한담 글이 막혔을 땐 어떻게 해야할까요? +17 Lv.5 열정돌이 08.06.30 728 0
65761 한담 심심해서 문서 통계를 봤습니다. +2 테프누트 08.06.30 756 0
» 한담 장르성, 설정, 오락성 등등에 관한 썰 +1 Lv.1 가일 08.06.29 469 0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