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린외전 양장본 전 삼권을 앞에 놓고 흐뭇해하다가, 일권부터 다시 읽으면서 감격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나 보던 책갈피용 끈이 달려있지 뭡니까.
접거나 쪽수를 외우지 않고 편하게 끈을 당겨서 덮는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들고 읽기엔 좀 무겁다는 것 외에는 그야말로 만족입니다.
그날 영풍문고에서 경혼기 지존록을 찾았더니 아직 안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그랬는데 제 손에 지금 두권이 있습니다.
숨도 안쉬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에 빠졌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자세로 같은 내용의 책을 읽었던 것만 같은 느낌.
"기시감" 혹은 "데자뷰"라고 하지요.
나중에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질문/답변 865 도한경님의 글을 보시면 몇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마 풍종호님이 금강님에게 무언가 말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995년에 나온 금강님의 "절대지존"을 다시 읽으면서, 또 같은 해에 나왔고 이미 열번 이상 읽었던 "경혼기 분뢰수편"을 다시 펴면서 느꼈던 "경혼기 지존록"에 대한 느낌을 간단하게 적으려 합니다.
타자가 느린 관계로 한 글자라도 줄이기 위해 평어를 사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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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것에 반항하고 많은 것에 굶주린 시기였다, 그때는.
닥치는대로 하루에도 네댓권의 책을 읽어내리며 무엇인가를 찾고자 했으며, 그 일부를 채워준 고마운 상대가 "무협"이다.
그 중에서도 풍종호의 "경혼기"는 독특한 "맛"을 남겼다.
소위 "박스무협"에 질려 무협을 포기했다가 몇몇 뛰어난 작가의 글에 반해 다시 무협을 손에 들게 되었지만 "경혼기"는 그 중에서도 별난 글이었다.
괴기스럽다고나 해야 할까.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글이 없던 것은 아니다.
별 이유도 없이 죽었다 살아나고, 프랑켄슈타인이 무협에서 환생한 듯이 사지를 잘도 떼었다붙였다하곤 했다.
일갑자도 아닌 십갑자의 내공도 모라자 천년내공이 흔한 시절이었다.
경혼기 역시 그런 범주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새롭게 느끼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며 몇번씩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무었이었을까.
그중 하나는 "변사"가 없다는 점이다.
"경혼기 분뢰수편"은 구질구질한 설명은 아예 하지 않는다.
얼굴도 안보이게 칭칭 동여맨 녀석 하나가 처음부터 나오는데, 싸움만 잘할 뿐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다.
글이 흘러가면서 나오겠거니했지만 나올 듯 말 듯 간질이기만 하고 결국 끝까지 안 나온다.
이렇게 끝나기엔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최근에서야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곳에서 "지존록"이라는 부분을 연재도 했다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본 적이 없으니.
긴가 민가 하다가 결국 "경혼기 지존록" 두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지존록"은 "분뢰수" 이전의 내용이다.
분뢰수편에서 "지존" 혹은 "그"라고 나왔던 미지의 인물, "그"와 관련있다는 "구룡", "화대공"을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장면의 이전 내용을 보게 되면 항상 느끼듯이 일종의 "번외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분뢰수편을 여러 번 읽으며 새겨 두었던 기억들이 조각 퍼즐처럼 맞춰지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사건의 중심에서 웃음을 던져 주던 "화대공"이 그 이전에도 똑같이 만보루의 숨은 기인 "화노인"으로 등장한다.
그렇게도 벗고 싶어했던 "천변만화의"가 나오고, "절대지존환, 천녀산화도, 천상일월륜, 복마신룡검" 등의 기보가 알려진다.
또한 그렇게도 궁금하게 만들었던 "분뢰수"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아마 이 부분이 가장 통쾌했던 것 같다.
무려 거의 십년간 간직하던 궁금증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지존록"은 지루하다.
아마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풍현"의 무공 익히는 과정이 한권 이상의 분량으로 계속 이어진다.
약간은 몽환적이기도 한 그 과정은 무의식의 세계가 대부분인데 색다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일면 재미가 있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지루하다고 느꼈다.
현란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길들여진 탓일 수도 있지만 분뢰수편에서 느꼈던 "질주"가 부족한 것은 분명하다.
풍종호의 글을 처음 대하며 지존록을 펼칠 독자의 다수가 같은 느낌으로 책을 접을 가능성도 있다.
대여점에는 수많은 신간이 있고, 분명 수준이 떨어짐에도 속도감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존록"은 재미있다.
풍현이 분뢰수라고 가정한다면, 아니 가정하도록 만드는 장치가 곳곳에 보인다.
계속 익혀가는 무공들과 얽히는 사연들, 제세칠성과 절대천마의 격돌, 운명처럼 이어진 풍현의 기연 등.
분뢰수가 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작은 귀띔도 있다.
간간이 사건을 이루는 조연들과 유독 빛을 발하는 구룡의 등장도 빼먹을 수 없는 맛난 찬이다.
영화의 대본으로도 적당할 정도로 공간을 잘 이용하는 것이 또 하나의 별난 구경거리이다.
여러 개의 장면을 위해 꾸민 하나의 커다란 영화 세트를 생각해 본다.
작가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하나하나의 장면에 담을 수 있는 상상력을 부여한다는 점이 내가 느끼는 큰 재미라고 할 수 있다.
금강의 "절대지존"을 다시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흡족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 시절 무협의 특징이 지금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새삼 금강의 글에 감탄했고, 예나 지금이나 그리 변한 게 없지 않은가하여 고소를 짓기도 했다.
"절대지존"과 "경혼기 지존록"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단어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사대기보와 여러가지 무공 등은 몇 글자를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음침한 구석이 있는 건 아니다.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 너무 확연하기에 오히려 떳떳하다.
십여개의 장신구를 똑같이 달았지만 너무도 닮지 않은 두 사람을 보는 듯하기에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다.
아마 신인이었던 풍종호가 외경의 마음으로 한 구석을 채웠던 듯하다.
마치 아버지를 좋아하는 아이가 몰래 셔츠 속 담개 한개피를 훔쳐 입에 물어 보듯이.
두 작가 사이에는 이에 대한 교류가 있었던 것이라 확신한다.
간만에 나온 두권이라 너무 아쉽다.
겨우 두권임에도 근 삼십을 셀 수 있는 오탈자도 아쉽다.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작가의 책이기에 더욱 그 아쉬움이 크다.
경기가 어렵다고 이해는 하지만 "출판 장사"에 바쁘더라도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기본적인 위상을 갖추지 않고서야 어찌 더 나은 대접을 바랄 수가 있을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채, 한동안 다음 권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한숨이 나오다 문득 웃음을 짓는다.
지금도 좋은 글을 만드느라 밤을 밝히는 작가들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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