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설봉
작품명 : 환희밀공
출판사 : 청어람
관심 있는 분들은 다들 아시는 얘기겠지만..
환희밀교의 성적인 면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 사상적인 면이 어떨까 잠깐 생각해봅니다. 분명 환희밀교는 탄트라 사상의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환희밀교를 보면 비로자나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나오고 불교적인 색채가 없는 것을 보아 불교보다는 탄트라 사상의 투영이 아닐까 합니다.
환희밀공을 보고 느낀 점들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적어볼까 합니다. 물론 아직 2권까지 밖에 안 나왔으므로 단정적인 판단은 곤란합니다만 대충 드러난 것들에 대해서 말해 보는 것이지요.
인도사상의 근간은 윤회입니다. 전생의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 되고 현생의 업에 따라 내생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육체, '몸'을 통하여 발현됩니다. 그러니 인도에서 요가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가의 입장에서는 윤회가 발현이 되는 것은 결국 육체이고 이것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지요.
반면 탄트라 사상(환희밀교??)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요가와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같다. 그것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여 이끌어라' 라고요. 그들이 성욕을 택한 것은 그것이 가장 쉽게 가장 강력하게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부정적인 에너지로 분노가 있는데 그들은 분노도 자비와 똑같은 씨앗이라고 봅니다. 분노와 자비는 같은 에너지이고 분노와 싸우려 든다면 그때는 그 에너지는 자비로 변형될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분노와 싸우고 억압을 계속한다면 점점 모든 에너지 자체가 저하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노도 일어날 수 없다면 어떤 자비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이 결국 같은 에너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화를 내고 섹스를 갈망하고 삶에 대해 집착하는 이 모든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것들은 변형될 수 있고 무한을 향해 열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구석이 없으나 그것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되면 거기에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씨앗을 내던져 버리면 꽃도 함께 내던지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가와 탄트라의 생각의 차이는, 결국은 수행 방법의 차이로 귀결됩니다. 마치 고대 중국의 치수사업에서, 곤이 강을 막는 것을 방책으로 나간 것과 우가 강의 흐름을 조정하는 방책으로 나간 것처럼 다릅니다.
크리스트교에서는 간단한 것입니다. 신의 말씀에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럼 하지 말아야 하고 그걸로 문제없이 끝입니다.
반면 탄트라 사상나 중국 도가의 사상에서는 해라, 하지 말아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생(生)의 근원을 지키고 키울 수 있을까에 핵심을 맞춥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무엇'인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생의 근본을 충실히 할까(특히 도가)에 모든 관심이 쏟아져 있습니다.
욕망의 근본적 문제는 우리가 '욕망의 사다리 효과'라고 부르는, '만족을 모르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세상의 종교를 탄생시키지 않았나 합니다.
그 종교에서 말하지요. '너희가 너희 욕망에만 충실하면 너희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야. 끝없는 영원한 고통만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야.' 아니면 '너희가 죄를 지으면 너희는 다음 생에 추한 축생으로 태어나 고통받을 것이야.'
그런데 재미있게도 중국의 경우에는 - 영혼이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죽은 다음에 혼과 백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는 기(氣)로 보았기에 - 세속적인 '명성'으로 통제를 합니다.
'너희가 죄를 지으면 세세손손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욕할 것이야'라고요.
협객(俠客)은 전자의 세상들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지만 후자의 세상에서는 불멸의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에서 더욱 협객들이 '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환희밀교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환희밀교에서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고문을 받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의 에너지를 받되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이끌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분은 흔들림없는 마음의 단련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제가 위에서 장황하게 말한 것들 중에서 요가적인 접근 태도입니다. 즉 강을 막아 댐을 막는 방식입니다. 크고 튼튼하고 흔들림 없는 댐을 만들어 물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지요.
탄트라 사상에서는 그러한 억제가 아니라 부드럽게 이끌고 하나 됨을 통해서, 근원적 에너지를 이끌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정신이 '깨어 있'되 그것은 대적해서 싸우는 고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응해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이지요.
이건 단점을 극복하여 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더욱 살려서 나를 발전시킨다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좀 언밸런스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 물론 작가분이 생각하시는 환희밀교가 탄트라 사상과 같으면서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 이야기가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바꿀 수도 있고요.
하지만 사상적인 일관성이라는 면에서는 좀 안 맞지 않나 합니다.
성에 몰입 하여도 자신을 잃지 않거나 고통에도 흔들림 없는 부동심을 갖는 것은 환희밀교보다는 소림사의 방식이겠지요.
그러므로 교주가 죽으면서 마지막에 남기는 말은 “삶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이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주와 환희밀교에 들어온 파락호들의 차이는, 똑같이 성교를 해도 깨어 있음의 차이이고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결국은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래저래 말해도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권이 기다려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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