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건설노동자
작품명 : 플레이어
감상에 : 미리니름 없음
이 소설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페이지 늘이기에나 사용될 구구절절함에 한점 미혹됨 없이 대단히 세련된 구성으로 독특한 스토리의 뼈대 위에 군살없고 탄탄한 근육과 피부를 씌워 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뭇 사람들에게 무수한 칭찬을 받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작가가 마치 천부적 재능인 양 놀랍도록 손쉽게 이용하고 있는 다섯가지 요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다섯가지는 하나씩 있을 때는 단지 특이한 맛에 불과하지만 그 모두가 모여 일으키는 상승효과는 놀랍도록 자극적이라 전류와도 같습니다.
그 전류는 우리의 대뇌를 자극하여 바로 "청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 그와 동시에 머리 속에서 음악이 재생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읽은 많은 분이 느끼셨을 겁니다. 이 음악은 딱히 음률이 존재하지 않는 파동입니다. 이 파동이 우리의 감정을 움직입니다.
그럼 이 소설이 뛰어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소설이 시원하고 재미있는 이유의 첫번째 요소로 먼저 '분노'를 들겠습니다.
놀랍게도 작가는 갈등과 해소라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이용해 손쉽게 분노를 조합하고 축적했다가 일정 수준이 되면 터트립니다.
라면을 잘 끓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타이밍이 대단히 감각적이고 절묘하기 때문에 독자는 미처 축적의 시간 중에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며 울분의 미해소에 대한 불만이 촉발해 마치 그것이 소설 자체의 문제인양 판단하는 일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두번째 요소는 이 분노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바로 작가의 '현실적 감각'입니다. 픽션에서 느껴지는 억울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적절하여 현실에까지 덧씌워지고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우리가 현재 살고있는 현실의 냉혹함과 모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한치의 과장이나 축소를 하지 않고 마치 고기 살 발라내듯 소설에 필요한 요소만 골라내어 우리의 위기의식을 자극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가 사회생활하며 느꼈던 울분 또한 이에 녹아들어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니 몰입할 수밖에요.
여기에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신문기사와 뉴스 등을 이용해 현실성과 사실성을 부각하는 것은 이 작가가 사용하는 특별한 기교입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자주 으스스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세태에 대한 공감입니다. 그리고 그 공감에서 나오는 것은 유대감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가까운 주변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잠재의식을 소설가의 의도가 잠식합니다.
"너희의 상황이 이와 같지 않느냐.",
혹은 "너희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세번째 요소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사건의 피해자가 된 듯한 "공포"
소설 시작부터 긴박하게 맞물리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는 도중에도 계속 머리 속에 리플레이 되며 이것이 촉발할 참혹한 결과과 무엇일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공포에 대한 무의식적인 탐색이자 증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밤거리를 헤맬 때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에 대한 두려움(탐색), 그리고 저 멀리 앞에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천조각이 귀신의 얼굴과도 같아 보일 때의 착각(증폭).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미지의 무언가에 대한 공포는 처음엔 긴박함이나 호기심에 가려 잘 느껴지지 않지만 아래과 같은 상황을 접할 때마다 우리의 머릿속에 반복 재생됩니다.
그것은 차 한잔을 마주한 것과 같은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 속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침범할 때입니다.
주인공이 힘든 직장일을 벗어나 편안히 휴식하는 그 공간적 상황에서 마치 배경음처럼 깔리는 참혹한 사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제 3자의 일인 것처럼 사소하게 깔리는 뉴스보도지만, 이면에 벌어진 최초 사건을 알고 있는 우리는 비밀을 일부 접한 것에서 오는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밀을 발설하고 싶어하는 전파의 욕구"
"하지만 그 비밀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에 정황적으로 끊임없이 추측하고 판단하고자 하는 욕구."
이 와중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항상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율의 형태로 우리의 체온을 낮추고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고 피부의 감각을 극대화시킵니다.
우리는 이 공포에 대해 설명하고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리는 것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주인공에게 설명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것을 주인공에게 전할 방법이 없으니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말하게 되는 셈입니다. 이 때에 우리 머릿속에는 첫 프롤로그의 장면이 유일하고 가장 핵심적인 단서로서 끊임없이 재생되게 됩니다.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다."라는 의미를 담아...
하지만 그것을 설명코자 하면 사실은 우리가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때문에 사건의 목적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두고 끊임없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넷째, '음악적 요소'를 통해 극대화 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소설 속의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림 그리듯 그려 냅니다. 그리고 글을 따라서 이를 재생해 나갑니다.
그런데 이 플레이어란 소설에서는 항상 음악이란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처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파헤치는 사건을 제 3자의 시각에서 근원적으로 탐구해 가는 독자의 뇌는 어쩔 수 없이 무의식 중에 이 음악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재생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되고 이 때문에 주인공이 4번 트랙을 돌릴 때면 우리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템포와 음량.. 높낮이로 음이 재생되는 것입니다. 이 음은 마치 이청이나 환청 같기도 하고 가장 중요히는 마치 우리의 뇌파가 아우르는 "파동"에 다다르는 듯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1번 트랙을 듣는 장면에서는 그를 따라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듯 했고, 4번 트랙을 듣는 장면에서는 무의식 중에 머릿속에 빠른 템포의 음이 재생되어 온몸의 혈관을 도는 피가 속도를 높이고, 심장박동마저 증가하는 듯 느꼈습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몸까지 소설에 몰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극을 통제하는 것이 다섯번째 'SKIP'이란 요소입니다.
플레이어란 소설의 구조인 "트랙"에서 우리가 무심코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스킵이란 존재입니다. 음악과 음악 사이의 공백이지요.
이것은 마치 서로 다른 포도주를 마실 때의 입가심과 같은 요소로서, 귀를 위한 휴식의 공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음 트랙을 위한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 공간에는 이전 곡에 대한 분석도 들어있습니다.
과거의 일에 대한 생각의 정리와 종결이 자리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연재를 끝내는 부분이 다음 장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애타는 갈망과 물음으로 여운의 울림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재량 하나 하나마다 우리의 뇌는 사건을 제대로 종결시키지 못합니다. 종결되지 못한 이야기는 마치 뻑난 시디처럼 그 부분에서 우리가 느낀 감정을 반복해 재생하고, 우리의 머리는 그것을 멋대로 판단해 그 반복 횟수만큼 중요도를 높입니다.
결국 이 소설은, 이 SKIP이란 요소 때문에 그 맛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다섯가지 요소가 서로 연계를 이루며 상승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플레이어란 소설에 대해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몰입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은 강풀작가와 연계해 만화로 제작된다면 충무로까지 진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독자적인 가능성은 확답할 수 없지만 마치 강풀작가의 타이밍의 절단신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가졌기에 전작품이 영화화 된 강풀작가의 손에서 이 이야기가 똑같이 만화로 펼쳐진다면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봅니다.
이 소설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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