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토요일 저녁/일요일 새벽을 맞아서 그동안 생각했던 잡설하나를 해볼까 합니다.
재미로 쓰는 헛소리니까 진지하게 보실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에 이야기 할 내용은 바로 무협지의 ‘전통적인 자기소개 어법’이 되겠습니다.
(영어로 치자면 “let me introduce myself~” 정도와 유사한 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꽤 많이 달라진것 같기도합니다만, 옛날 작품에는 뻔질나게 쓰였고, 요즘도 심심하면 한번씩 나오고 있는 표현이죠.
이는 매우 정형화된 틀로 고정되어있어서 사용시에 주의를 요하지만,
전 후의 표현을 바꿈으로서 다양하게 재생산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등장해서, 혼잣말로)
[ ~~, 나, (명호) (이름) (조사) ~~~ ]
예를 들자면, 이야기 처음에 등장해서, 혼자서 온갖 가오를 잡으면서
“천살성의 기운이 하늘을 덮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니, 나, 무극일원현검진인 독고민준이 다시 세상에 나갈때가 되었음인가...”
같은 말을 내뱉는 식입니다.
사실상 중심 틀 주변에 배치되는 앞 뒤의 장식들도 일정한 규칙성을 갖습니다.
앞부분에는 주로 상황설명, 뒤에는 [분노][감탄][탄식]과 같은 감정이 드러납니다.
“겨우 2천 5백의 혈마지옥천독생강시로 덤비다니, 나, 패도파천황고독한혈객 남궁현우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더냐!”
“수많은 기관진식을 뚫고 이렇게 나, 화중화 소수서시다정신녀 이서연의 지척까지 접근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요”
“칠주야를 대막흑룡천마혈부의 천라지망에서 헤메게 되다니, 나, 태현만통풍진제갈신수노옹 모용중수의 명운도 여기까지란 말인가...”
특히 이러한 어법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름있는 노고수, 예쁘다고 소문난 여협객, 특정 문파의 지도급 인사 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정사는 가리지 않습니다. 정파의 은거기인이든 숨은 세력의 하수인이든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죠.
(자기 이름 광고하는게 무슨 개콘 출연진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이름)이 ~~했다”가 아니라 “내가 ~~했다”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 했던 것 처럼, 무협 속의 인물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꼭 자기를 삼인칭화 시켜서 “(명호+이름)이 ~~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삼인칭화는 보통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자의식 과잉 인물이나, 1인칭과 3인칭의 구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아이 혹은 귀척을 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케릭터 등이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지금 나이 좀 있는 친구 중에 아무나 한명 떠올려서 그 친구가 “어, 민재는 저기가서 아이스크림 먹고싶어”하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녀석 턱주가리에 죽빵을 갈기던지, 벽을 붙들고 구토를 하는게 일반적인 반응일겁니다.) 무림인들은 허세력자부심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아마도 전자인 자의식 과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노고수들 중에 검마니 검성이니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 명호를 이름 대신 사용하고는 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일상적인 대화에서까지 자기이름을 들이대면서 대화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없습니다. 차라리 그게 말버릇이라고 하면...
한번 이러한 형식을 현대에 적용해봅시다.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명호의 사용양식을 보자면, 일종의 공식 직함, 혹은 별명 등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아파트 옥상에서, 혹은 한강다리 중간에서 가슴속을 패기로 채우고 외칩시다.
“이까짓 사회제도의 구속으로 나, 대한중학교 2학년 4반 출석번호 13번 부회장 무협덕후 김지훈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실행 이후의 사회적 평판에 대해선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저런 인생밑바닥 티나는 직함으로는 폼이 안나나요?
그러면 정말로 자의식 과잉을 할만한 사회적 스테이터스를 가진 인물로 해볼까요?
“10시간의 연속 수술에도 나, 서울대의대 흉부외과장 의사 John Nase는 쓰러지지 않는다. 이 수술은 내가 집도한다!”
“이제 한국의 음악무대는 나, 최강아이돌 동방빅비스샤이인피엠 리더 절대준영의 발 아래 있다”
(아이돌중에 설마 준영이란 이름 있나요? 없죠? 막 지은건데... 그리고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서울대의대 관련자분들, 어떻게 고소만은 좀 사양을...)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작중에서 다시는 [나, (명호) (이름)~~]의 형식을 사용하는 적은 없다는 겁니다. 단지 최초의 등장에서, 혼잣말로 하는 것이 유일한 케이스입니다. 이후에도 “이 (명호)에 도전하다니!”하면서 명호나 이름만이 사용되는 모습들은 한두번씩 나오지만... 이러한 [나, (명호) (이름)~~] 형식은 무협지 속의 인물들에게 있어서 꿀벌의 독침처럼 인생에 단 한번 사용할 수 있는 그런 특수한 마법의 말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자신을 부각시키고자 매사에 절치부심하며 준비하다가, 무협지 독자의 카메라가 드디어 자신을 비춘 순간, 감회에 젖어들며 준비해왔던 ‘일반적인 상황에선 절대 사용하지 않고 앞으로도 사용할 일 없는 그 말’을 읊는 거지요. 그리고 이후에 어떠한 개별행동을 하든, 주인공한테 몇번을 어필을 하든 그 표현이 다시 사용되는 일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하면, 만약 작품 처음에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는 주인공’과 같은 경우에는 특례가 적용됩니다. 여기서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한두문장으로 자기 이름을 어필하는 것에 그쳤다면,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 내력과 성공과 좌절, 만난 기연의 종류와 먹은 영약의 품목, 익히게 된 무공의 이름과 종류와 특성과 강점, 자신의 생사대적과 약점, 앞으로의 비전과 당면과제들을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좔좔좔좔 읊는 것이 가능합니다. 어디 취직하려고 자소서 준비라도 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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