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대항해시대의 환상에 잠겨볼 때가 있습니다.
직접 해볼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든 의문은 대항해시대의 무역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그 부분에 흥미를 가져보았습니다.
18세기까지의 세계 무역은 대부분 현금 거래, 즉 은이나 금을 대금으로 지급받는 관행에 놓여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백지어음과 같은 사실상의 수표 거래가 정착되기 시작하므로, 사실 그 이전의 무역이라는 것은 대부분 금이나 은을 배에 꽉꽉 채워와 특산물을 사가는 형태에 꽤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 대서양 무역 이외의 무역 부분, 즉 인도양이나 태평양 무역은 전 세계 물동량의 10% 남짓한 수준에 머무른 것이 대항해시대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나마 경제 규모가 거대한 중국이나 일본은 일구통상 정책으로 항구를 하나만 열어 무역 규모를 인위적으로 축소하였으니, 사정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대서양을 벗어난 무역을 어렵게 만든 것은 현지 네트워크를 장악할 수 없었던 유럽인 스스로의 한계도 있었습니다.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질적인 풍토와 기후에 노출된 유럽인들은 생존율이 매우 극악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무역에 나서는 유럽인은 매우 적었고, 때문에 그들의 급여는 매우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인도회사가 중국에 파견한 대반(일종의 파견직 지사장격)들은 실제 전체 이익률의 3% 이상을 제 수입으로 챙길 수 있는 특혜를 받을 정도였습니다(급여를 그만큼 주기보다는 배에 장사할 수 있는 쿼터량을 배분해주는 성격입니다).
급여가 세다보니, 거꾸로 다수를 고용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식민지 네트워크가 구축된 동남아에서도 유럽인의 경제적 역할은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지처를 두고 그를 경제적 파트너로 둔 유럽인이 사망하면 그 전재산이 홀랑 현지인에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현지의 관습법을 유럽 표준의 법률이 제어하지 못하는 면도 나타났습니다.
대항해시대가 문자 그대로의 ‘대항해시대’였다면.. 그러기는 어려웠을 것이지요.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인식된 세계는 목숨을 내놓고 고수익을 보장받는, 일종의 사자 이빨닦는 아르바이트같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항해시대라는 용어에 진정 걸맞은 세계 무역은 아편 전쟁 이후에나 성립되는 개념이 아닌가 하는 짧은 생각을 품어보고 있습니다.
저의 짧은 단견이고 개인적인 생각이오니..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주시오소서!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