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의 판타지소설들을 보면, 무겁고 진중하진 않더라도(그런 소설들은 언제나 비주류였으니) 자극적인 클리셰와 가벼운 전개를 가진 소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가벼운 소설들이 큰 인기를 끌었고, 과거에도 양판소가 출판된 판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죠. 전 그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문제는, “가벼운 소설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가 아니라 “대중성을 다소 포기하고 작품성을 내세우는 소설들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겁니다. 편식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거죠. 이게 현실이에요. 이전에 나름 무거운 소설을 쓰던 작가들도, 근래에 와서는 무게감을 확연히 줄이고 클리셰 위주의 단순한 전개를 사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전 그 이유가 독자들의 수준이 떨어졌다거나, 작가들의 수준이 떨어졌기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이렇게 가볍고 단순한 스토리가 득세하는 이유가, 시간이 갈수록 옛날 환경에 비해서 대중 소비자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고 매니아층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판타지소설을 이용하는 계층이 매우 좁았죠. 1세대 판타지소설이 등장할 당시에는, 판타지소설이라는 장르를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이 대다수였을겁니다. 따라서 당시의 판타지소설은 비교적 소수의 매니아층 독자를 만족하기 위한 소설이었고, 매니아층 독자의 까다로운 기준을 맞출 필요가 컸습니다.
시간이 가고 대여점이 등장하고 판타지소설이 붐을 일으켰죠. 가볍고 자극적인 대중성만으로 밀어붙이는 소설들이 큰 힘을 얻기시작했습니다. 소수의 매니아층보다 대중이 더 큰 수요를 가지게 된겁니다. 인터넷의 성장도 여기에 큰 기여를 했죠. 그래도 여전히 매니아층은 어느정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수권 단위로 물리적으로 책을 구매하는건 일반대중이 하기에는 힘들었고, 책 자체도 한권에 몇천원씩 하는걸 일반인들이 사기에는 부담되었으니 대부분 대여점에서 빌려봤죠. 여전히 매니아층이 대중에 비해 훨씬 더 강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는 어떤가요? 매니아층이 대중독자층에 비해 가지는 강점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인터넷 공간에서는 누구나 거리낌없이 책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화당 백원씩 결제하면서 쉽게 볼 수 있죠. 책을 물리적으로 쌓아놓을필요도 없으니, 구매하는데 부담이 훨씬 덜합니다. 물론 여전히 매니아층이 구매력이 더 높겠죠. 하지만 한명의 매니아층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열명의 대중독자층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쉽고 또 더 큰 수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가벼운 소설을 쓰는거죠. 웹소설판의 시스템도 그렇죠. 매니아의 정성어린 비평이나 추천보단, 열명의 대중독자가 주는 추천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집니다.
전 이게 큰 문제라고 봅니다. 특정 매니아층만이 향유하는 장르는, 과도하게 한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습니다(고인물이라고하죠). 하지만 동시에 특정 매니아층은 자기가 집착하는 장르에 대한 높은 기준(나름대로의)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작가는 대중적인 트랜드를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글을 발전시킬 여지가 생깁니다.
갈수록 대중성만이 부각되는 환경에서, 매니아를 위한 소설은 없어져가고 있고, 동시에 (그들을 만족시키는 소설이 없으니) 매니아층 역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외국 판타지소설이나 옛날 판소들을 전전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물론 작가들이 더 힘들겁니다. 새로 유입되는 작가들이 참고할 방향이 대중성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제와서 대중성 바깥으로 나가려면, 완전히 새로운 매니아층을 바닥부터 만들어나가야합니다. 거기가 훨씬 험난한 길인건 말할 것도 없구요.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선, 아직 남아있는 매니아층분들이 양질의 글에 대한 비평활동과 추천활동 그리고 적극적인 구매를 통해 매니아층이 아직 있음을, 대중성 바깥에도 분명한 수요가 있음을 보여줘야합니다. 저는 아직 그들이 남아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대중성 바깥에서 힘겹게 고민하는 작가분들, 그리고 좋은 글을 쓰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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