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 번 겁먹어 버린 일은 극복이 잘 안 되나 봅니다.
옛날에요. 저는 거의 매주 1호선 용산역을 이용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1호선을 타려면 용산 전자상가 안을 통과를 해서 올라갔다가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야 했거든요. 그런데 역 자체도 그렇고, 전자상가에도 돌아다니는 여자 사람이 없었어요. 정말 보기 힘들었습니다. 판매자도 그렇고 행인도 다 남자 사람들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몰라요)
그 시절에 제가 막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용산 전자상가가 제게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어요.
전 정말 남방 쪼가리에 청바지. 그렇게만 입고 다니는 스타일로,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쇼트커트에 푸석푸석. 전혀 아가씨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곳을 지나려고 하면 거기 입점해 있는 모든 가게의 직원들이 다 한마디씩 하는 거였어요.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도 내고 휘파람도 삑삑 부르고. 하면서 "언니! 언니 어디가! 물건 좀 보고 가!" "언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 “언니! 뭐 찾아? 우리 집에 다 있어!" "언니! 바빠?" 등등....
그 왜, 바이오 하자드 게임 보면 벽에서 손이 나와서 손으로 아우성치는 코스도 있어요.. 마치 그런 코스를 지나는 것 같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도 절 해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그 아우성 속을 뚫고 걸어간다는 게 그 시절에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무서웠었는데…. 문제는 그때 겪었던 공포가 지금도 극복이 안 되어서요. 용산= 엄청나게 무서운 곳. / 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그간 기계식 키보드 알아보면서 모두 직접 가서 타건해 보면 좋다고 감사한 의견을 주시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도저히. 도저히... 지금은 뭐, 가 봐야 누구 하나 절 쳐다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지요. 그런데도 용산 전자상가를 떠올리기만 해도 손끝이 싸늘해질 정도로 무섭답니다. 사람의 기억이 그렇게 신기한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고민 고민 끝에 결국 타건 한 번 안 해보고 운에 맡긴 갈축을 질렀어요.
건초염이 있는 손가락에 좋으라고 적축과 흑축을 끝까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많이 알아본 결과, 적축이 키압은 너무 적어서 누르는 것은 편하게 느껴지지만 키압이 적은 탓에 다른 축보다 바닥을 치는 충격이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하네요. 손가락 아픈 사람에겐 그걸 무시할 수 없다고요. 하지만 흑축은 원하는 모델에는 안 나와 있고 누르는 것 자체가 무거우면 그것도 사실 장시간 작업에는 손에 무리가 오겠다 싶어서 갈축으로 선택했어요.
물론 한 번 가서 타타타타 쳐 보면 전혀 다른 세상을 볼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후덜덜덜 겁이 나서 결국 운에 맡기는 이 상황이 참 한심하면서도 딱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이 상처를 주고받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오늘따라 강하게 들었습니다. 한 번 받은 상처나 공포의 기억은 참 극복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은 옛 기억과 키보드 문제로 그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하지 말자. 간단하지만 사실 실천은 어렵죠. 특히나 온라인 세상에서는 싸움도 잦고 험한 소리도 자주 오가잖아요. 끼어들지는 않지만 지켜보면 참 무섭더라고요. 하지만 멘탈이 강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세상엔 그런 분위기에도 무서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또 보기에 따라서는 별것도 아닌 그 무서움을 극복 못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걸 생각하며 저는 앞으로 많은 걸 양보해야겠다. 싶었어요. 저를 겪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떠올릴 때마다 무서워하지 않게 말이지요.
아무튼 감으로 주문했지만, 그 체리 3497갈축이 아픈 제 손에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가장 좋은 건 손을 혹사하지 않고 많이 쉬어주는 것이겠지만요.
으핳핳핳... (쉴 수가 없잖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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