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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랑도

작성자
Lv.1 최윤호
작성
03.01.09 17:28
조회
1,249

신라 화랑도에 관한 연구

1990년 서정범

목차

들어가는 말

制度的 起源

社會的 成分

組織과 修鍊

國軍으로서의 花郞徒

나오는 말

丹재 申采浩는 '朝鮮上古史', 제 9편, '三國血戰의 始作'에서 이렇게 말했다.

화랑은 일시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외래 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인심,풍속,학술을 지배하려는 판에 또 이를 반항,배척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화랑이다.(중략) 간접으로 화랑의 遺風,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朝鮮史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 가지인 愚策이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국사 교재인 '韓民族의 歷史', 제 3장,'民族國家의 統一'에서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라가 6세기 중엽부터 치열해진 대외 전쟁을 극복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화랑도에 있었다. 화랑들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위의 두가지 인용에서 화랑도가 가지는 중요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화랑도 정신은 우리 민족정신의 맥을 이루었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화랑들의 업적은 국가위기의 극복과 역사적 상승을 이루었다.현재의 분단상황을 극복해야 할 우리에게 그들에 대한 연구는 단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함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많은 史家들이 연구하여 왔지만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로 충분히 모습을 밝혀주지는 못하였다.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만 설명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화랑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史料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를 위주로 다시 한 번 객관적인 입장에서 화랑도를 밝혀 보겠다.

1.制度的 起源

화랑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내려온 것을 眞興王이 국가제도로서 확립시킨 것이다. '三國史記' 진흥왕편에 의하면 제도로서 확립된 목적과 과정을 알아볼 수 았다.

三十七年(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처음에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무리지어 놀게하여 그들의 행실을 보아가지고 이를 등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았었는데 하나는 南毛라 하였고, 하나는 俊貞이라 하였다. 그들은 그 무리를 3백여명이나 모았는데 두 여자는 차츰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게 되고,(중략) 그 후에 다시 아름다운 여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花郞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歌樂을 즐기면서 山水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데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되고 그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뽑아 이를 朝廷에 추천하게 되었다.

같은 '三國史記', 金歆運편에 위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번에는 '三國 遺史'에 나오는 기사를 보기로 하자.

王은 또한 천성이 온아하여 크게 神仙을 崇尙해서 娘子의 아름다운 자를 가리어 原化를 삼았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 人物을 선발하고, 孝悌忠信으로써 이들을 가르키려 함이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大要이었다. 이에 남모랑과 교정랑 두 原花를 선출하니 聚徒가 삼사백인이었다.(중략) 이에 대왕은 令을 내려 원화를 廢하더니 그후 여러 해에 또 생각하되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된다고 하여 다시 영을 내리어 良家 남자의 덕행있는 자를 뽑아 花郞이라고 개칭하였다. 처음에 薛嫄郞을 받들어 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花郞國仙의 始初였다.

이렇듯 화랑도는 576년에 국가제도로서 확립되었다. 하지만 화랑도는 그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화랑도를 지칭하고 있는 말로 '國仙徒, 風月徒, 源花徒, 風流徒'등 여러가지가 있는 것을 보아 발생이 체계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三國史記', 斯多含傳을 보자.

사다함은 본래 높은 가문에서 나서 풍모가 뛰어나게 맑고 志氣가 방정하므로 때에 사람들이 花郞으로 받들기를 드디어는 花郞이 되었는데 그 무리가 무려 천여명이나 되었고 모두 그 환심을 얻게 되었다. 진흥왕은(중략) 가야국을 습격하게 되었는데, 이 때 사다함은 나이가 15,6세로서 종군할 것을(후략)

진흥왕의 가야정벌은 562년에 있었다. 사다함은 그 이전에 화랑이 되었다. 또 다른 증거로 徐巨正등이 엮은 '東國通鑑'에는 '진흥왕 원년(540)에 사내아이로 용모가 단정한 자를 가려 風月主로 이름하고 善士를 그 무리로 삼았다.'고 한다.이 두 가지 사실은 화랑도가 576년에 국가제도로서 확립되기 이전에 화랑도가 존재했던 것을 보여준다. 화랑도의 기원은 일종의 종교집단이었을 것이다. 토착신앙이었던 집단의식과 행동들이 527년 法興王에 의해 공인된 불교에 밀려나, 종교적 요소가 사라지면서 화랑도의 모습을 갖추었다. '三國史記', 金庾信傳을 보면,

홀로 中嶽의 石堀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깨끗하게 갖추고 하늘에게 맹세하여 빌기를 (중략) 하고 기도하였는데, 4일만에 갑자기 한 노인이 褐衣를 입고 와서 말하기를 (중략) 말을 마치고, 한 二里쯤 가므로 따라가 보았으나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산 위에 빛만 남았는데 빛나기를 오색이 찬란한 것과 같았다. (중략) 공은 드디어 장한 마음이 끓어올라, 홀로 보검을 가지고 咽薄山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향불을 피우고 먼저 中嶽에서 축언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맹세하고 기도하니 하늘에서 갑자기 靈光이 내려 그 보검에 실리고, 3일째 되는 날 밤 에는 虛星과 角星의 두 별 빛이 아득히 빛나며 칼에 내려 움직이니 보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이것과 같이 화랑도 내에도 종교적 요소를 볼 수 있다. 풍월도라 하여 산천을 찾아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 社會的 成分

花郞徒의 중심인물이었던 花郞은 眞骨이었다. '三國遺事'에 唐나라 令狐登의 '신라국기'에서 인용된 부분이 있다.

貴人의 子弟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서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섬 긴다.

위와 같이 수백명의 낭도를 이끄는 중심인물인 화랑이 가장 높은 귀족인 진골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낭도내에도 진골 자제들이 있었다. 金歆運의 부친은 잡찬 達福이었다. '三國史記', 金歆運편에 '김흠운은 어려서 花郞文努의 門에서 놀 때 徒衆들이 말하기를'이란 대목에서 그가 郎徒였음을 알 수 있다. 부친이 잡찬이었다는 것은 그가 진골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렇듯 신분의 구분이 엄격하였던 骨品制社會에서 六頭品이나 그 이하의 신분이 진골을 제치고 花郞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신성분이 明記된 화랑은 거의 진골이다. 斯多含(眞骨의 系統으로 奈勿王의 7세손이고 그의 부친은 급찬벼슬의 仇梨知이다.), 金庾信/金欽春(祖父 武力은 新州道行軍總管, 그 부친은 蘇判-3급간), 近郞(이때 이찬大日의 아들이 花郞이 되어 近郞이라 하였던 것이다.이찬-2급간), 竹旨郞(품주를 고쳐서 집사부라 했고, 파진찬 竹旨를 執事中侍로 명하여, 2-5급간), 官昌(신라의 장군 品日의 아들로서, 王은 이찬 品日을-2급간), 孝宗郞(第三宰相인 舒發瀚 仁慶의 아들로,舒發翰=이벌찬-1급간) 등은 모두 5급간 이상의 직책과 맺어져 있으므로 眞骨임을 알 수 있다.

3. 組織과 修鍊

花郞徒의 조직은 한 명의 화랑과 僧侶花郞, 그리고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郎徒들로 구성되었다. '三國史記', 斯多含편을 보면 화랑의 조건에 대해 나온다.

斯多含은 본래 높은 가문에서 나서 풍모가 뛰어나게 맑고 志氣가 방정함으로 때에 사람들의 花郞으로 받들기를 청하여 드디어는 花郞이 되었는데 낭도의 수가 무려 1천명이나 되었고 모두 그 환심을 얻게 되었다.

화랑은 용모가 뛰어나고 덕이 있는 진골의 자제 중에서 낭도들의 추천을 받아 오르게 되는 자리였다. 또한 그 화랑의 德望에 따라 낭도들이 그 집단에 모여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僧侶郎徒는 학문과 도덕을 가르치고 시를 지어 낭도들의 교양을 높이는 일을 하였다. '삼국유사',竹旨郞편에 "처음에 得烏谷이 郞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가로되" 라고 승려의 역할이 부분적으로 나온다. 낭도는 金大門의 '화랑세기'에 "良將勇卒"이라 나오듯이, 주로 평민을 위주로 용감한 병사나 하사관을 만들기 위해 교육되었을 것이다. '화랑도의 기원'에서 이야기했듯이 화랑도는 국가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삼국사기"에 화랑도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그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花郞世記에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빠져나오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생겨났다."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玄妙한 道가 있다. 이를 風流라고 하는데 이 교를 설치한 근원은 仙史에 상세히 실려있거니와 실로 이는 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敎化하였다. 또한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魯나라 司冠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周나라 柱史의 宗旨였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행실만을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로 화하는 것이다."

화랑도의 수련방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것은 明山大川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키우는 것이요, 두번째 것은 가르침과 계율을 단체생활을 통해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화랑도는 이름난 산과 강을 유람하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때로는 歌樂을 통해 서로 단결하며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악을 즐기면서 山水를 찾아다니며 유람하는데 먼곳이라도 다니지 않는데가 없었다."라는 기록과 '삼국유사',景文王편에 "郞이 國仙이되어 사방에 돌아다니다가"라는 기록에서 이를 볼 수 있다. 또한 이같은 수련에서 샤마니즘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화랑은 깊은 산이나 계곡에서 홀로 기도하며 도를 닦기도 하였다. '삼국사기',김유신편을 보면 이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홀로 中嶽의 石堀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깨끗하게 갖추고 하늘에게 맹세하여 빌기를 (중략) 공은 드디어 장한 마음이 끓어올라, 홀로 보검을 가지고 咽薄山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향불을 피우고 먼저 中嶽에서 축언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맹세하고 기도하니(후략)

화랑도는 圓光法師의 世俗五械, 膺廉의 三德등을 이상으로 삼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것으로 인품을 닦았다. '삼국사기',貴山편에 세속오계의 기원이 나와 있다.

貴山은 어렸을 때 추항을 친우로 사귀어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士君子와 交遊하기를 기약하고,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로잡지 않으면 장차 치욕을 면치 못할까 두려움으로 곧 어진 사람의 곁으로 가서 옳은 도리를 듣기로 하자."하였다. 이때 원광법사가 (중략) 加悉寺에 머물러 있었는데 (중략) 貴山등은 원광법사를 찾아가서 공손한 태도로 말하기를 "속된 우리들은 (중략) 가르쳐 주시오면 몸에 맞도록 계명으로 삼겠나이다."하니, 원광법사는 말하기를 "(중략) 지금 세속에 알맞을 5계가 있는데, 一은 事君以忠이요, 二는 事親以孝요, 三은 交友以信요, 四는 臨戰無退요 五는 殺生有澤이라 하는 것인데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三德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景文大王편에 나와있다.

郞이 가로되 臣이 美行者 3인을 보았읍니다. (중략) 남의 윗자리에 있을만한 사람이 겸손하여 남의 밑에 앉은 사람이 있으니 그것이 첫째요, 豪富이면서 검소하게 옷입은 이가 있는데 그것이 둘째요, 본래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자가 있으니 그것이 셋째라 하였다.

앞에서 말한 계율들을 화랑은 목숨을 다하여 지켰다. "삼국사기" 武王편에 의하면,

貴山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일찍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군사는 싸움에 당하여 물러남이 없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물러나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어길 것인가"하며 그 아버지의 말을 받아타고 곧 小將추항과 함께 창칼을 휘두르며 힘써 싸우다가 죽음으로 남은 군사들은 더욱 분전하여 (후략).

또한, 斯多含편에 의하면,

사다함은 처음에 무관랑과 함께 死友로 사귈 것을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그는 심히 슬퍼 七日동안이나 통곡을 하다가 또한 죽었다.

劒君편에 의하면,

劒君은 웃으며 말하기를 "내 近郞의 낭도로 이름을 두고 그 風流를 修行하여 오로지 옳지 않은 일이면 천금의 이로움이 있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중략) "나의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은 사람들을 죄로 다스리게 하는 것은 인정으로서 차마 못 할 바라." (중략) "그 사람들이 마음이 굽고 내 마음이 정직한데 도리어 도망한다는 것은 장부의 취할 바가 아니다." (중략) 劒君은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이미 죽기를 결심하고 있었으므로 거리낌없이 이를 먹고 곧 죽었다.

孝女知恩편에서는 또한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때 효종랑이 나와 놀다가 이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청하여 집에 있는 粟穀一百石과 의복을 보내주고 또 효녀 지은을 산 주인에게 곡물을 변상하여 줌으로써 양민으로 되게 하니, 이를 본 낭도 몇천명도 각각 粟一石씩을 거두어 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화랑들의 실천적인 수양은 신라사회의 풍기를 바로 세우고 국가를 결속시키는 핵심이 되었다.

4. 國軍으로서의 花郞徒

臨戰無退의 氣魄으로 充滿했던 花郞은 戰場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삼국통일을 이루는 힘이 되었다. 청소년의 수양단체인 화랑도는 동시에 군사집단으로서의 性格을 가졌었다.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를 배출해낸 화랑도는 국가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戰士團으로까지 변천되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점차 사라져 버렸다.

"삼국사기" 관창편에 나온 관창의 전사장면이다.

관창은 신라 장수 품일의 아들로서 의표가 단아하여 소년으로 花郞이 되었는데, (중략) 왕은 관창으로서 副將을 삼았는데, 신라군은 황산에 이르러 백제군과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그 부친 품일은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중략) 관창은 "잘 알았읍니다. "하고는 곧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나는 듯 적진으로 쳐들어 가서 적 몇명을 격살하였다. (중략)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끌려갔는데, 계백은 그의 투구를 벗겨보고는 그가 소년이고 또한 그 용맹스러운 것을 사랑하여 차마 그에게 해를 가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감탄하기를 "신라에는 기이한 용사도 많다.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장차 장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하고 곧 그를 살려 돌려 보냈다. 관창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내 능히 그 장수를 죽이고 깃발을 빼앗아오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는 바라. 다시 들어가서는 반드시 능히 성공하리라."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어 역전고투하였으나, 계백은 또 그를 사로잡아 목을 잘라 말안장에 달아매어 돌려보냈다. 이때 品日은 그 아들 관창의 머리를 들고 피를 씻으며 말하기를 "내 아들의 면목은 산 것과 같다.(중략)" 이것을 본 三軍은 크게 분개하여 모두 결사의 뜻을 세우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군을 대파하였다.

花郞은 언제나 先鋒에 서서 가장 용감했고,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官昌, 斯多含, 貴山, 元述, 金令胤, 金歆運등 많은 화랑과 낭도들이 빛나는 승리를 이끌어 냈고, 그와 동시에 그 댓가로 생명을 기꺼이 바치었다. 화랑 출신인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偉業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화랑도를 제도적 기원, 사회적 성분, 조직과 수련, 국군으로서의 화랑도의 업적등을 통해 각 부문별로 알아 보았다. 화랑도, 민족적 바탕으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발달하였으며, 단지 귀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의견에 따라 화랑을 선출했다. 상승하는 기풍이 그들 자신 스스로가 서로를 갈고 닦아 높은 가치를 향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산천을 누비며 또한 수련을 통해 국가의 굳건한 수호신으로 길러졌다. 화랑정신은 신라의 정신이었으며, 통일 이후 우리 민족의 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 정신을 잊어가고, 외래 사상에 젖어 현실과 멀리 떨어져만 갔다. 그러면서 쇠퇴의 길을 조금씩 걷게 되었다.

20세기, 이곳에서 또다시 꿈틀대며 치솟으려하는 민족의 강인한 맥이 그동안 민족의 혈관 속에 조용히 흐르던 화랑의 정신이 아닌가.

화랑대에서....

이글은 디펜스 코이라에서 퍼온 것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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