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항몽
작품명 : 활빈당
이 글을 처음 읽고 가장 먼저 생각난 책은 ‘리스본 쟁탈전’라는 책이다. 9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89년도 작품으로 기억한다. 나는 기꺼이 이 글에서 언급되는 구두장이 역할을 맡아 이전에 신어 본 구두를 통해 감히 이 아펠레스의 그림을 재어보려 한다.
‘리스본 쟁탈사’와 ‘활빈당’은 액자식 구성을 취했다는 점, 주인공의 성격, 내용을 풀어나가는 방식, 간결한 문체 등은 분명 비슷하다. 초반의 주 구성은 고전의 클리세를 이용했다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와 과거와의 결합이라는 장르 소설에서나 봤던 구조와 고전의 클리세를 동시에 소화한 점에서 작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주인공 ‘한연우’(이하 ‘한’)가 글을 쓰는 계기는 무엇인가. 교정자였던 ‘라이문두’와 달리 ‘한’이 경계를 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반의 내용은 결국 이곳으로 수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뚜렷한 경계를 넘는 이유의 설명은 명확하지 않다. 찻집이라는 경계를 나서지 못한 장소적인 상징성은 상징일 뿐,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은 입체적 인물이 아니다. 그를 통한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성격은 간결한 문체만큼이나 담백하다. 하지만 그의 글은 아니다. 그의 글은 눈에 보일 듯 구체적인 묘사를 구사한다. 과연 ‘한’이 쓴 것이 맞는가에 대한 이질감이 들 정도로 그의 성격과 동떨어진 글이다. 극명한 대비를 통해 어떤 암시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행동의 개연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한’이 쓰는 글에서는 지나치게 묘사와 서사가 많다. 대사 한 줄에 묘사 한 줄씩, 글의 서문에서부터 시작되는 묘사와 서사는 독자를 지치게 한다. 그 모든 동작에 의미가 있다면 글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집어넣은 것이고, 의미가 없다면 글과 독자의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한’이 살고 있는 배경을 작가가 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유사성을 위해서일까. 야만이 지배하는 세계에 끝과 활빈당이 추구하는 이상은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가. ‘길동’은 ‘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러한 단순한 질문 이상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못한다면, 결코 구두장이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구두장이의 눈에 찬다고 해서 좋은 작품은 아닐테니, 다음 번에는 옷 수선공에게 가보는 것이 어떨까.
猫아 배상
고양이발.
좋은 작품입니다. 비평으로서 잣대로 적합한 것으로 팔란티어와 '리스본쟁탈전'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팔란티어 쪽보다 활빈당이 더 좋은 작품이라 판단했습니다.
장점 부분은 저의 재량범위를 넘어갔습니다. 장점을 잘 이야기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생략했습니다.
뱀발.
화가인 아펠레스는 이런 격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깔창을 넘어오지 말라. 구두장이는 구두나 지어라."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