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최후식
작품명 : 표류공주
출판사 :
1
로망스romance, 노블novel, 픽션fiction 등을 우리는 모두 소설이라고 번역하고, 또 일컫는다. 이 ‘소설(小說)’은 장자(莊子)에서 그 어원이 기원한다고 한다. 장자는 소설을 벼슬을 구하는데 쓰는 아부나 아첨 정도로 말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소설은 우리가 지금 정의하고 일컫는 산문체의 문학양식인 소설은 아니다. 장자에 의하면 소설은 대(道)에 도달하기 어림없는 잡소리이다. (장자, 외물론, “飾小說以干縣令 其於大達亦遠矣.”) 그러나 재미있게도 장자는 자신의 세계관을 많은 비유와 우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소설에 가까운 양식이 아닐까 싶다. 장자가 지금 태어났다면, 노벨문학상을 우습게 여길 만한 걸출한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싱거운 상상을 해본다.
크기가 수천 리나 되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가 되어 구만리를 높이 올라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장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자는 아예 공자나 그의 제자를 자신의 이야기에 작중인물로 등장시켜 비웃기까지 하는 적극적인 창작자이기도 하다. 설검의 천자의 검 이야기 같은 것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 구조와 논리를 가지고 있어, 정말 훌륭한 소설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우스운 상상에 부채질까지 해댄다.
난데없이 장자 이야기를 꺼낸 것은 표류공주라는 무협소설 한 편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읽은 지가 언젠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하다. 그런데 아직 머릿속에 야릿야릿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참 깊은 소설이었구나, 새삼 느낀다. 문득 비평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제 졸고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독자의 닉네임인 표류공주를 보고 나서이니, 표류공주가 깊게 남아있는 것은 나뿐 만은 아닌가 보다.
처음에는 한글 제목만 얼핏 보고 언뜻 손이 안 간 소설이었다. 황실의 암투에 얽힌 공주의 비련이 담긴 이야기이거나, 철부지 말괄량이 공주가 황실을 뛰쳐나와 강호행을 하면서 얽히고설키는 유쾌한 이야기쯤이거니 생각했다. 알고 보니 공주가 그 공주가 아니었다. 빈 배를 한자로 말한 것이다. 그 뒤로도 선뜻 책을 들지 못 했다. 빈 배라는 뜻의 허주라는 호를 쓰던 한 유력 정치인에 대한 순전히 개인적인 반감 때문이다. 표류공주는 그러니까, 첫 장을 넘겨보기도 전에 개인적인 편견을 두껍게 쌓아놓은 책이다. 미안하기 그지없다. 빈 배를 두고 장자의 허주가 아니라 정치인의 호를 먼저 떠올렸으니, 나도 참 얼마나 편협한 놈인가 싶기도 하다.
타이틀 롤(?)이기도 한 빈 배는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항주의 나루터는 복잡하다. 해와 달이 함께 뜬다는 일월병승 날이면 더욱 그렇다. 많은 배들이 얽히고설킨다. 배들이 부딪히기라도 하면 사공들은 소리를 높이고 급기야 싸움도 벌어진다. 나루에 빈 배가 흘러들었다. 사공도 없이 물길을 따라 홀로 흘러가는 빈 배는 부딪혀도 사공들이 화를 내지 못 한다. 아무도 빈 배와는 싸우지 않는다.
다투지 않는 빈 배, 장자 외편의 ‘산목(山木)’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有一人在其上 則呼張歙之 一呼而不聞 再呼而不聞 於是三呼邪 則必以惡聲隨之. 向也不怒而今也怒 向也虛而今也實. 人能虛己以游世 其孰能害之.”, “배가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부딪혀도 아무리 속 좁은 사공이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타고 있으면 피하라고 고함을 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욕을 한다. 아까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은 화를 낸다. 그것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능히 자신을 비우고 빈 배처럼 흘러간다면, 그 누구를 해칠 수 있겠는가.”
산목 편에는 빈 배 이야기 말고도 역시 많은, 장자의 세계관이 담긴 이야기가 있다. 산목은 나무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녀, 추녀 이야기로 맺고 있다. 거기에다 장자가 늘 씹기 좋아하는 공자의 이야기도 곁들여져 있다.
장자가 지나다가 큰 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나무꾼은 그 나무를 베지 않는 게 아닌가. 장자가 이유를 물으니. 나무꾼 왈, 이 나무는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그 길로 친구 집을 찾아가니 집 주인이 장자를 대접하려고 오리를 잡으라고 하인에게 명했다. 하인이 물었다. 오리가 두 마리 있는데, 어떤 오리로 잡을 까요? 집주인 왈, 울지 못하는 놈으로 잡아라. 장자의 제자가 놓치지 않고 묻는다. 어제 나무는 쓸모없어서 해를 면했는데, 오늘 오리는 쓸모없어서 해를 당하니, 선생님은 어디에 서시겠습니까?(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장자 웃으면서 말하길, 나는 쓸모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의 중간에 머물겠다.( 莊周笑曰 周將處夫材與不材之間.) 그리고 장자가 한 마디 덧붙인다. 그러나 쓸모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의 중간은 도와 닮았으나 도가 아니다. 그러니 결국은 해를 면치 못할 것이다.(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어려운 이야기이다. 쓸모없는 것과 있는 것의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도. 장자의 말로 하면, 그것은 만물의 근원에서 표류하며, 물을 물로 대하나 물에 의해 지배 받지 않는 것이다.(浮遊乎萬物之祖 物物而不物於物.)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는 다른 편에도 많이 나온다. 장자의 단골 메뉴이다. ‘인간세’에서 장자는 장석이라는 목수와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석이라는 목수가 산을 내려다 볼 정도로 큰 나무를 보았다. 사람들이 다 감탄하는데, 장석은 그냥 지나친다. 제자가 물었다. 왜 그냥 지나치십니까? 한 마디로, 저거 돈 좀 되겠는데요, 이런 말일 것이다. 장석 왈, 어디다 쓰겠느냐.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금방 썩고, 기둥으로 쓰면 진액이 나온다. 쓸모없으니 저리 오래 살았지.
장자는 여기서 얘기를 끝내지 않는다. 그 쓸모없는 나무가 장석의 꿈에 나타났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 오래이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쓸모없음으로 나의 쓸모를 삼았다.(且予求無所可用久矣 幾死 乃今得之 爲予大用.)” 그러면서 나무는 장석을 비웃는다. “넌 곧 죽을 한낱 인간인데 쓸모없음과 있음을 제대로 알아나 볼 수 있겠는가?(而幾死之散人 又惡知散木.) 다음날 장석을 통하여 장자는 반전을 한 번 더 제공하는데, 그 나무는 쓸모없음을 도로 삼았으면서도 결국은 사당에 의지하는 쓸모로 긴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다. 그 나무가 깨달은 도도 어쩌면 도가 아닌가 보다. 아마 장자가 말하는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쯤 되는 사이비 도가 아닐까. 하기야 한번은 용이 되고 한번은 뱀이 되는, 도와 덕을 타고 떠다니는(若夫乘道德而浮遊則不然 無譽無訾 一龍一蛇 與時俱化) 그것이 어찌 쉬울까.
2
여자가 떠다니는 빈 배를 보며 말한다.
제가 아는 사람이 생각나서요. 그 분의 생애가 빈 배와 같았습니다.
빈 배는 산모퉁이를 돌아 남자가 서 있는 봉우리 밑으로 지나간다. 남자가 그 빈 배를 바라본다.
공주는 표류한다. 타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목적이 있을 리가 없다. 사람도 짐도 나르지 않는다. 노를 저어 일정한 쪽으로 몰아가지도 않는다. 빈 배는 목적지에 달하지 못한다. 쓸모가 없다. 그러나 표류하는 공주는 그 쓸모없음으로 자유를 획득한다. 쓸모없음이야 사람이 없음이지, 배는 그 자체로 쓸모있음을 내구한다. 빈 배의 쓸모는, 표류이다.
목적지에 달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가 없다. 표류, 장자의 말로는 소요유 자체가 목적이고 존재이다.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한 재(材)와 비재(非材)의 중간이 아니라,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선험적 대상, 즉 그 자체가 존재이다. 존재 자체가 목적인 셈이다. 그리하여 표류공주는 해를 입히지도, 입지도 않는, 쓸모와 쓸모없음의 중간을 넘어선다. 물(物)이 물로 존재하며 물의 지배나 피지배를 모두 벗어난다. 마침내 빈 배는 만물의 근원에서 도를 타고 떠다니게 되는 것이다.
여자는 눈알이 하나 없고 이는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남자는 썩은 동태 눈깔에 돼지 간 같은 피부에 허리는 굽고 사지는 뒤틀렸다. 남자와 여자는 죽었다. 그리고 살아났다. 그 고향에서 남자와 여자는 추악한 몰골로 배척 받지 않는다.
여자는 창녀가 되었고, 남자는 묘지기가 되었다. 그들은 머리 깎고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 정박할 곳을 구태여 찾는 것은 배가 비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월병승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 자리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남자를 경계하지 않는다. 빈 배에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陽子之宋 宿於逆旅. 逆旅人有妾二人 其一人美 其一人惡. 惡者貴而美者賤 陽子問其故 逆旅小子對曰 其美者自美 吾不知其美也 其惡者自惡 吾不知其惡也.”, “양자가 송나라 어느 여관에 들었다. 여관주인은 두 명의 처가 있었는데 한 명은 미인이고 한 명은 추녀였다. 그런데 주인은 미인보다 추녀를 더 아꼈다. 양자가 궁금하여 묻자 주인이 말하기를, 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르게 되었고, 추녀는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추함을 알지 못 하게 되었다.” (장자, 산목)
항주를 모르는 사람은 서호십경을 떠들지만 항주를 아는 사람은 일월병승을 이야기한다.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단 하루, 그것을 볼 수 있는 딱 두 곳을 찾아 여자와 남자는 매년 긴 여행을 한다. 해와 달이 동시에 뜨지만, 동쪽과 서쪽의 사이만큼 거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진기한 구경거리가 보이는 두 곳도 거리가 있다. 빈 배가 흘러가는 것을 여자가 목격하고, 그 배를 남자가 다시 목격할 만큼의 거리. 어긋난 운명의 거리이다.
해와 달이 떠오르는 그 순간만큼은, 남자와 여자가 그것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정박일까? 빈 배가 알 것이다, 표류인지 정박인지. 그러나 배는 표류와 정박을 따지지 않는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배에 탄 사람 뿐이다.
3
죽음에 임박한 사부는 임종을 지키는 어린 제자에게 자신의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두 살 어린이의 낫질에 죽어나가면서 쳐다보던 들 고양이의 눈 이야기다. 모호하다. 언뜻 알아듣질 못하겠다. 글쓴이의 행간이 벅차게 넓은지, 아니면 내 감수성이 너무 좁아 그 파동에 채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표묘공주의 세계라는 권제가 붙어있다. 표묘는 주인이 없다. 길들여지지 않게 때문이다. 가장 날렵하고 사나웠던 야생의 눈빛에서 허약한 새끼였던 때의 낯익음을 찾아냈을 때의 아득함. 세월에 완전히 희석되지 않는 ‘어떤 것’일까. 사부는 제자에게 고양이 눈을 들여다보듯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그 아득함을 전해 주려던 것일까.
글쓴이는 마흔이 되기 전에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글쓴이가 정리하겠다던 기점을 이제 넘었으니,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 아득함을 조금은 더 손에 잡을 수 있으려나.
4
중간에 몇 번을 놓았다가 다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거운 이야기 때문은 아니고, 그 이야기를 하는 버거운 문장과 문체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감히 좋은 문장을 말할 만한 주제는 못 되지만, 표류공주는 많이 아쉬웠다. 문단이 거칠어서 아쉬웠던 것이 아니라, 내용이 깊어서 아쉬웠다. 그 문학적 성취가 빛을 바랠까봐 조마거린 달까.
글쓴이의 개입이 너무 두드러져서 절제가 아쉬웠고, 반면에 어떤 문단은 행간이 너무 넓어서 당혹스러웠다. 서술 부분에서는 호흡이 길어져 읽기가 조금 가빴고, 행갈이에서는 가팔라서 위태위태 긴장을 느꼈다. 모난 어휘가 뾰족 튀어나와 있어서 발길에 채일까 봐 조심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물론 내가 읽기에 그랬다는 것이고, 그 정제여부를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장자는 소설을 비록 도에 이르지 못할 잡소리로 치부했지만,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빈 배를 이렇게 멋지게 변주해낸 표류공주를 읽는다면. 글쎄, 이천여 년 전에 소설이라고 언명했던 것을 다른 말로 바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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