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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추천에 관련된 감상을 쓰는 곳입니다.



작성자
Lv.31 자쿠
작성
08.04.01 06:15
조회
4,190

작가명 : 곽정민

작품명 : 환생군주

출판사 : 청어람

내가 환생군주 카페지기를 맡고있지만(요즘 관리 안해서 죄송합니다. ㅠ,ㅠ) 역시 환생군주는 재미있는 대체역사소설이다. 전체적으로 그렇게 진지하지도 않고 피해의식으로 뭉쳐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약간 느슨하면서 즐길수 있는 그런면 때문에 환생군주를 좋아하는 것도 있고 역시 역사가 전공이다 보니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면 이때는 바뀌어 졌어야 되는데 라는 생각도 많이 해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부록으로 환생군주 연대기표와 나의 팬픽 환생군주 연대기를 추가로 첨부한다.  양이 좀 많다. ㅋㅋㅋ

임자 1552  균 탄생 덕흥군 이초와 부인 정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남

계축 1553

갑인 1554

을묘 1555 을묘왜변

무오 1556 토정이지함과 만남

정사 1557 남사고로부터 백과사전을 받음

무오 1558

기미 1559 덕흥군 사망

경신 1560 비금도 개발 시작 천일염 제작

천일염의 생산은 조선경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지고 온다. 세계최초로 제작된 천일염은 당시 어떤 소금보다 강한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고 비금도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일대의 염전의 확대와 소금의 대량생산 그리고 외국으로 수출하여 조선은 막대한 이득을 얻을수 있었다. 또한 소금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선이나 식량의 가공 보존법이 급격하게 발달하였고 이는 또한 어업의 발전과 함께 식량의 증대로 나타나게 된다.

나상과 제휴 임꺽정 화적패와 접촉 나상과 임꺽정 화적패를 균의 친위세력으로 만듬

신유 1561

비금도식 소총 개발

임술 1562

남명조식과 만남 남명조식계열과 손을 잡음

시마즈 이에히사와 접촉

계해 1563

순회세자 사망

고추, 감자, 고구마 재배 연구

갑자 1564

대왕대비 윤씨 사망

윤씨 외척 제거

을축 1565

세자책봉

명종 사망

즉위 당시 13살

당시 조선의 정치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예기하자면 조선초기 권력은 훈신세력이 잡고 있었다. 훈신세력은 기본적으로 왕실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반정과 같은 정변과정에서 국왕의 등극에 기여한 공로로 공신이 되었고, 특권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공신들의 영향력은 태종에 의해 차단되었으며, 그 뒤 세조의 쿠데타에 연관된 공신들이 중종반정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 공신 가운데 국왕의 신임을 얻은 인사들은 왕실과 인척관계가 있었기 때문인데, 국왕의 외척으로 특권적인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훈신 통치의 기반은 공신이라는 특정 성격 때문이었지만, 실제로 그들 가운데 3~5명의 인사들이 권력의 중추부에 있었다. 이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왕권의 1차적인 옹호자였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국왕으로부터 부여된 특권의 향유자였기 때문에, 둘은 통치체제의 협력자로 사실상 동일체적 일체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고려에서 보여주었던 특정 문벌의 지배체제와 비슷했으며, 실제 전개과정에서는 오히려 성리학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념적 체계를 좀더 강조 하였다. 이는 곧 성리학이 지향하는 왕조를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이면적으로는 자신들의 통치를 더한층 자의적으로 수행할수 있었다. 그결과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통치체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성격은 조선왕조의 통치체제적 성격이 특정 권신이나 관인들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적 위계구조로 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체제의 안정을 위한 논리적 기반으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함에 따라 권력구조의 내적 갈등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맞았다. 간단히 말해서 조선왕조의 통치권력은 국왕 중심의 특정 세력에 의한 사유화였다는 말이다.

훈신과 사림과의 권력쟁투는 관직은 한정되어 있으나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하는 파당끼리의 경쟁이었다. 이러한 파당의 이념적 근거가 되는 것이 성리학이다. 이러한 방식은 파당중심의 통치양식과 특정 당색 중심의 집단적 권력 관계 형성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당쟁은 반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면 계급간의 권력 이동 역시 없었다.

병인 1566

명나라 세자 책봉사 조선에 도착 균 장거정과 접촉

명나라로부터 종계개정

공납제 폐지, 수미법 시행 지방향리에 녹봉지급 실시

정묘 1567

이이 균의 친위세력에 합류 후에 경반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조선 양명학의 거두로 성장한다. 중앙군 강화

시마즈가와 유대를 맺음 시마즈 유메 조선으로 온다.

무진 1568 무진삼란 발생 성공적으로 진압 삼란의 발생이후 절대왕권이 성립됨

기사 1569 기사경장 전국적인 인구및 토지조사 시행

기사경장은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목표로 실시된다. 기존의 군사적 성격의 도호부를 모두 목과 부로 전환시키고 또한 위사제를 실시하여 군제를 변경한다. 위사는 전시가 아닐 경우 지방행정을 책임지지 않게 하였다. 또한 향품제를 실시하였다. 각 지방의 아전에게 녹봉을 지급하게 하고 아전들을 지방행정단위에 맞추어 각 품계를 매겼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품계를 통해서 8도 관찰사의 아전을 우두머리로 하여 연공서열제를 실시하여 진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관찰사에서 향품과를 실시하여 아전을 임명하도록 하였고 향품과는 각 6조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하여 실시되도록 하였다.

군제개혁 실시,

군제개혁은 기존 5위(五衛) 중심의 진관체제를 혁파하고 상비군 중심의 위사(衛司)제를 만들었다.  위사제는 기본적으로 일반병사 졸(卒)~분(分:10)이 있고 소대(30)~중대(100)~대대(350)로 대대(大隊) 3개가 모이면 여(旅: 1200)가 된다. 위(衛)는 기존 보병 여(旅) 3개와 함께 기타 타직종의 부대가 혼성으로 이루어 진다. 약 4-5천명의 전략군사 단위가 위(衛)이며  사(司)는 이러한 위(衛) 3~4개로 가변적으로 이루어 졌다.  사(司)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군(軍)이다. 군제개혁은 1570년부터 1575년부터 남쪽에서 북쪽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위사제는 상비군 체제로 전환 하면서 시작되었다. 징집병은 주로 각 지역의 치안, 방어와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고 모병 즉 직업병은 전투병과로서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도록 하였다. 위사제 실시 초기 10만의 병력이 모집 되었으며 그 후 계속 증가하여 1682년에  30만 까지 증가 하게 되어 80개 위 12개의 사로 증가하였으나 3개 군은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이럴 수 있게 된 배경은 기존 양인 개병제를 혁파하고 천민해방정책과 기존 학사들과 향인들에게 주었던 면제를 없애버렸고 또한 급격한 인구 증가와 북벌로 인한 여진족의 참가로 인해서 가능하였다. 계급 역시 졸(소졸~중졸~대졸로 나누어짐)-용(勇: 부副~정正:분대장)-맹(猛 부~정 하사관)~위(尉:부~정:소대 중대지휘)~직(直: 부~정: 대대지휘 참모)~호(護:부~정:여를 지휘)~장(將 부(종2품)~위(衛)(정2품)~대(大)종 1품)~원수(元帥)정1품 으로 나누어진다. 이 관직들은 다른 관직과 겸하지 못하였고 또한 승진체제는 연공서열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군조직을 총괄하는 사령부 역시 오로지 왕, 병조와 군부만이 참여 하여 기존 문관들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또한 참모조직을 만들어졌는데 참모는 조언자와 입안자로 구성되어 있고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는 과정에서 그를 보좌한다. 그 대신 참모는 지휘권은 없고 지휘관만이 군사작전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며 그 책임은 위임될 수 없도록 하였다. 참모조직은 인사 행정·정보·작전·훈련·병참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군역 또한 16~30세 되는 장정들은 모두 3년 동안 군역을 행하도록 하였고 3년 후 군역에서 완전 해방하도록 보장하였음 무엇보다도 이렇게 확충된 상비군은 지역 치안과 왕권강화의 중요 원동력 이됨  

대대적인 중인 등용, 훈련도감, 보건도감(전의감에서 이름을 변경), 경제도감 창설 3도감은 조정에 하급 기술 하급관료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게 됨 중인들이 중앙조정으로 들어갈수 있는 길을 만듬,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으나 대부분 기술관료였기 때문에 인정  

경오 1570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동

1차 개발 계획(1570년~ 1575년) 1차 개발 계획은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농업생산력향상을 높이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하였다. 즉 1인당 생산면적과 생산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충청도를 중심으로 모내기법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고 저수지가 정비되었다. 저수지의 정비에 대대적으로 관노가 이용되었으며 관노들은 저수지공사에 참가하는 대신 면천에 대한 보장을 받았다. 이로서 관노해방정책이 순차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다. 모자라는 노동력은 농 한기때 인력을 고용하여 해결하였다. 또한 신작물인 감자, 고구마, 옥수수등 의 구황작물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감자는 초기 북방군이 대대적으로 생산하도록 하여 군대의 식량이 되도록 하였음 옥수수 역시 북방지역을 중심으로 사료로 생산하도록 하여 조정에 필요한 사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상업에서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그 대신 독점 무역주식회사 설립 조선초기 조선의 상업은 조선조정의 독점권을 부여 받은 일부 상인들에 의해서 각 지역 별로 길드적 성격을 가진 단체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금난전권을 폐지하면서 이러한 지역 길드적인 상인단체들을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교통과 함께 대대적인 화폐 경제로 전환되면서 유통이 활발해졌고 이러한 지역 길드적인 상인조합은 쓸모없게 된것이다.

나상 대방 최하동과 송상 대방 송민진은 광무천황시기의 소금산업과 군수산업, 광산사업과 직물산업 그리고 중국 일본과의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획득하여 일부 ,경상, 만상, 래상을 결합하여  그 결과 나상이 삼성상회 송상이 현대상회로 새로운 회사가 설립되게 된 것이다. 형성되게 되었다.(이 두 이름은 모두 광무천황이 직접 내렸다. 이들의 형성에 황실자본과 함께 일부 양반들의 자본이 대량 유입되었다. 무엇보다도 대동법으로 인해서 토지세가 증가하고 일본의 은과 중국 미곡의 유입과 감자, 옥수수의 재배로 미곡의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수도 양반들은 땅을 팔아 주식을 사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가 남벌직전 (일본사학계에서 조일전쟁이라고 부르는) 대마도에서 온 종씨가문과 래상 출신의 김종필이 만든 대우상회는 이 대일 무역에 대한 허가를 얻어 삼성, 현대, 대우라는 3개의 독점회사가 대외무역에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들 3개 회사는 대외무역과 군사사업에 뛰어들어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면서 무려 400년간 이어져오는 삼대기업 탄생된 것이다. 이들 대기업은 한제국의 발전과 확장을 통해서 끈임 없이 거대해졌다.

물론 그들의 발전은 광무천황의 군사비 지출과 관련이 있지만 말이다. 광무천황은 등극 초기부터 상공업에 투자하여 황실자본을 늘려갔다. 삼대상회 역시 광무천황의 황실자본과 권력을 통하여 만들어 졌으며 유지되었다. 그 후 광무천황의 정복산업에 엄청난 자금을 내놓아야 된 것 역시 광무천황의 눈에서 벗어났다가는 바로 상회에서의 주도권을 놓치게 될것이니 말이다. 3개 상회의 대주주 회의 참가자 명단에서 언제나 외수사의 이름이 제1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왕비 박씨 책봉 이와 같이 경빈으로 도진씨가 책봉 환관과 궁녀에 대한 처우 개선책실시 궁녀가 중인들과의 결혼 장려

향약 인정 하지만 관아를 중심으로 향약이 성립하도록 하였고 그 입회자격역시 관아에서 심사 결정하도록 하였음 향약은 양반들에 대한 강온양면책의 일환으로 설치하여 지방의 불만을 파악하고 또한 국가의 지방 장악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설치 하였음  

신미 1571

태(太)선이 진수시작. 500톤급 대형함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임. 기존의 판옥선이 227톤에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감 근해용 전함이었다면 태선은 장폭비(長幅比: 배 길이를 폭으로 나눈 값)를 6정도로 잡고 이물을 유선형에 가깝게 만들고 밑바닥이 좁고 불룩 튀어나오도록 하고  용골과 늑골을 도입하였다. 또한 선수사장에 2장을 돛을 갖추고 3개의 돛대에 3장의 돛 총 5장의 돛을 도입한 범선이었다. 판옥선의 두배의 크기를 자랑하는 이배는 판옥선보다 대양항해에 적합했다. 함해에 필요한 승선인원은 20명밖에 안되는 범선으로 노꾼이 없어지면서 전투원과 승무원의 구별도 없어졌다.  태선에는 대(大)포 12문과 소포 4문이 장착되어 있다. 대포는 적의 군함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각 좌우측 현에 배치되었고 적함이 근접전을 펼칠때 적병에게 직접적힌 공격을 하기 위해서 배의 갑판에 배치되어 있다. 또한 소총병과 조선이 자랑하는 사수들 역시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강한 무장을 갖춘 이유는 역시 왜구들 때문이었다.

3개 병기창 설치

대대적인 군대증가와 함께 일본에 대한 무기수출을 위해서 병기창이 한양, 평양, 동래에 건설된다. 이병기창들은 대형 물레방아가 설치하여 용광로와 천공기를 만들었다. 한양의 병기창을 중심으로 해서 대포와 총의 기준이 정확하게 지정되어졌다. 그리고 평양에서 화포기서가 편찬되어 화포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이루어진다.

초전설치

흑색화약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병기창 주변의 농지를 사들여 만든것이 초전으로 한양이나 평양 등 큰도시에서 뷴뇨를 사들여서 염초를 대량생산하도록 하였다. 초전을 개발하기 위해서 한성 곳곳에 공공화장실이 건설되었고 공공 위생뿐만 아니라 국방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포규격통일

대포를 大,中,小로 크기를 통합하였다. 대포는 과거 천자총통을 개량한 것으로 길이 5척(길이 단위의 통합으로 1촌는 3cm ,1척은 30cm, 1장은 3m 규정하였다. 1보는 1m) 즉 1.5m이다. 구경은 4촌(12cm)의 무게는 300kg의 거대한 포이다. 대포는 단위목표물에 대해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 할수 있는 무기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비싼 대포를 좀 더 인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청동으로 주조하였으며 화약소모량이 많고 기동성을 발휘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사(司) 단위의 부대에서 운용하였다.  

중포는 과거 지자총통에서 발전한 것으로  길이 4척(120cm) 구경 3,5촌(10.5cm) 무게 80kg의 포이다. 중포는 함선의 기본무장으로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대량생산품이기 때문에 철로만 생산되었다. 다만 인장성이 조금 불안전하여 파열가능성이 높아서 백발이상 사격한 대포는 다시 반납하도록 하였다.

소포 과거 현자총통을 기본으로 하여 길이 3척(90cm) 구경 2촌(6cm) 무게 40kg 대포 소형 화포로서 일반 보병대대에 10개씩 보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보병 박격포정도의 지원화기 이다. 가장 많은 수로 생산되었다. 생산가격과 화약 소모량이 적게 들고 또한 그 때문에 거의 천발이상 쏴도 균열이나 폭발을 하지 않았다.  

대포나, 중포가 말이나 소가 끄는 포차로 이동하였으나 소포는 사람이 끄는 조그만한 포차로 이동하였다.  

대포구경의 통합은 탄알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탄알은 대포에는 대장군전, 조란환, 쇠구, 그리고 파열탄이 사용되었다. 대장군전은 아직 대포가 강선포가 아니라 활강포였기 때문에 날아가는 각이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대장군전의 괘도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보다 정밀한 사격을 가 할수 있고 이 때문에 더욱 먼거리로 사격이 가능하였다. 또한 조선군 역시 활과 화살을 대포에 발사하는 전통이 남아있어 사용되었다. 중포와 소포에도 장군전과 차대전이 사용된다. 파열탄은 원형이 아니라 원통형 모양의 대포알로 진천뢰의 소형화한 무기이다.  

화포기서(火砲技書)

화포규격이 책정되면서 군기시는 화포성능을 검사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소,중,대 포 각각 10문씩 화약량을 조절하면서 대포의 균열과 유폭을 실험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실험과 함께 각포의 사정거리와 포탄의 포물선등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이 실험에는 전국의 화포장 500명이 참가하였고 이들은 후에 군기시 소속되거나 포병과 초기 장교로서 등용 된다. 무엇보다도 이 대대적인 화포성능 실험은 조선 병기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화포기서이다.

화포기서는 한글(당시 군사기록은 모두 한글로 기록되었다.)로 기록되어 활자인쇄 되어 포병과의 기본적 교과서로 만들어졌다. 거리와 지형에 따른 화포의 사용법과  운용 관리법 기초적인 사거리 계산 방법 등이 체계적으로 기재되었다.

이러한 체계적인 화포생산과 교육으로 인해서 조선은 당시 어떤 국가보다 뛰어난 포병을 육성할수 있었다.    

소총(小銃)개발

병기창에서는 대량으로 소총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소총은 크게 두가지 종류로 제작 되어졋다. 먼저 수출 및 후방 부대보급용 비금도 소총으로 화승식 발사장치에 강선을 넣지 않은 총으로 수출용에는 총검도 장착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

북한산성식 전방부대 보급용 소총은 2조강선이 새겨졌고 발사장치 또한 수석식 발사장치를 사용하였다. 무엇보다도 북한산성식 소총에는 유선형 납 탄환이 사용되어 살상력이 아주 우수한 화기였다. 함께 유성형의 납탄환은 발사와 함께 강선을 따라 돌면서 안정되어 사정거리 역시 일반 비금도식 소총의 두배였다. 북한산성식 소총은 먼저 균의 친위 부대인 어영위에 최우선적으로 보급되어 졌으며 나머지 부대에는 전방부대 또는 모병부대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되어졌다.    

왜 정기무역실시

먼저 시마즈와 대마도 두곳에 정기무역항로를 만든 정기무역은 주로 은과 무명, 화약, 철, 쌀, 비단, 도자기, 말 을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이 무역은 엄청난 이익을 보장하였고 막대한 세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곧 함대를 노리고 왜구들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정기무역선은 언제가 강력한 무장을 해야만 하였다.  

임신 1572

만력제 등극 장거정이 권력을 장악 이와 함께 명나라와 조선과 안 좋아졌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북벌개시 :대대적인 야인여진에 대한 공격 개시 이는 북원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기 위한 명나라의 묵인하에 이루어진다. 북방군 5만이 투입된 북벌은 수륙양동으로 진행되어 함경도 경원과 경성에서 각각 군대가 출발하여 수군은 우수리강으로 진출하여 여진족의 교역도시 몇 개를 공격 약탈하였고 육군은 육로로 송화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가 우수리리스크에서 수군과 합륙하였다. 그후 우수리스크와 함께 총 6개의 요새가 건설되었고 기마부대가 편성되어 기동타격대로서의 역할을 맡게 하였다. 북벌은 여름에 시작되어 반농반목적인 여진족들이 생계에 집중해야 될 때에 일어났다. 목장에서 말을 번식시키거나 농사를 지어야 되는 여진족으로서는 여름에 전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비군으로 편성된 조선군은 계절과 상관없었고 그 결과 승리하게 된것이다. 겨울이 오기전 최대한 여진족들에게 타격을 주고 겨울에 각 요새에 자리 잡으면서 여진족의 유격전에 대비하였고 다시 봄이 되면 공격을 시작하는 작전이었다.  많은 숫자의 여진족이 조선군의 공격과 배고픔으로 인해서 조선군의 노비로 조선에 팔려갔는데 거의 5만에 달하는 노비가 조선으로 팔려가서 각종 공공사업이나 양반들의 대농장에 일하게 되었다. 이숫자는 전체 여진족의 거의 10프로에 달하는 숫자로서 숫자가 적은 야인여진이나 일부 장백여진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이렇게 정복당한 북방을 북해도라고 명명하고 최고사령부를 우수리스크에 건설하였다.  북벌로 인해서 두만강 너머 해안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만들게 되었음 또한 여진족과의 대규모 교역시장이 형성된다.

기병대

조선군의 기병대는 기존에는 주로 창기병과 궁기병으로 나누어진다고 할수 있었는데 창기병은 커다란 창을 주무장으로 하고 활과 환도를 부무장으로 가지고 있었고 궁기병은 활과 환도를 주무장으로 하고 있는것에서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균이 개혁을 하면서 기병체제도 전환된다. 중기병, 궁기병, 총기병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중기병은 종래의 기병과 같이 창을 주무장으로 하였으나 부무장으로 활보다 기병총을 두정 휴대하도록 하였다. 또한 갑옷을 입었으며 말에게도 가죽으로 된 마갑을 입혔다. 이들은 주로 전장의 해결사로서 마지막 단계에 투입되는 전력이었다.

궁기병은 종래와 같으나 갑옷을 입지 않도록 하였고 부무장으로 기병총 또한 허용하였다.

총기병은 기병총 두 개와 소총하나로 그리고 환도로 무장하였고 갑옷은 입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말위에서 싸우기 보다는 말에서 내려 싸웠는데 그 이유는 말위에서는 총기의 장전이 거의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이는 육혈총이 나올때까지 주요 문제였다. )

궁기병과 총기병은 각각 여에 배속시켜 주로 정찰과 반(反)정찰을 주 임무로 하였고 적

공명첩과 국채발행

북벌을 이유로 공명첩과 국채가 발행되었다. 공명첩은 명예관직을 팔아서 양반계층으로 인정받고 지역의 향약에도 가입할수 있도록 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해서 이권이 많이 줄었지만 양반이 된다는 것은 군역을 면제받고 또한 재판에서도 어느정도 유리한 고지를 얻을수 있기 때문에 많은 중인들이 공명첩을 구입하였다.

국채 또한 군자금 획득을 이유로 발행되었다. 국채는 장기 분할상환으로 10년을 나누어 받도록 되었다 .초기에 국채는 강제 공매 되었지만 토지세의 증가와 곡물가의 하락으로 인해서 한양에 거주하는 양반들 중심으로 대량으로 매매가 이루어졌다 .

계유 1573 상해 개항 대규모 조명 공무역 실시

지금까지 약화되어온 명나라의 재정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일환으로 장거정과 균은 조선과의 대규모 무역정책을 실시하는 대 협의 상해를 개발 개항 하여 중국 강남지역과 대규모 교역을 실시하였음 소금과 인삼 그리고 은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량의 상품이 중국으로 수출 중국에서는 쌀과 비단 목화가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목화는 조선에서 무명이 되어 일본으로 수출 되었다.

북양(우수리스크) 개발

북벌시기에 야인여진을 공격하고 또한 시장을 개척하려고 하였음 그결과 북방의 모피와 목재, 여진족의 우마를 수입하고 조선의 상품을 수출할수 있는 시장으로 북양이 개발 무엇보다도 이곳의 양질의 목재는 고갈되어가는 조선의 임업에 큰도움이 되었다. (균은 고갈되어가는 조선의 임업자원을 위해서 경제도감에 임업자원과를 설치하여 보다 효율적인 임업 관리를 할수 있도록 하였다. )

갑술 1574년  

보건청건립과 포도청 확대

혜빈원을 폐지하고 보건청을 건립 국민보건개념을 실시하여 각 군현에 의원을 2명과 의녀 2명을 파견하였음 의녀의 역할은 임신과 출산 시 사망률을 줄이는 것임 각 군현에 있는 보건청은 각 지방의 규휼 및 역병 발생 시 이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위생적인 생활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식수 끓여먹기, 생식금지, 화장실정비, 공공장소의 위생강화, 각 지역의 목욕탕건립등에 많은 운동을 벌였음  

포도청 역시 보건청과 마찬가지로 각 군현에 포도관을 파견하도록 하였음 포도관은 향품을 받지만 각 지방의 치안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도록 하였음 그 결과 한성과 경기도를 주위에만 영향을 주었던 포도청이 전국에 걸쳐 막대한 힘을 발휘하도록 되었으며 포도청의 확대와 함께 의금부를 축소하여 의금부는 재판기관으로 능력을 발휘 하도록 함 무엇보다도 의금부는 각 지방을 순회하는 순회재판관 역할을 하여 지방 관아를 순시하면서 각 관아의 재판기록에 대한 심사와 함께 3심 제도를 철폐하고 이를 보안하여 순회재판관에게 재심을 1번 허용하도록 하였음

을해 1575년

조선 인구 2000만 돌파

조선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먼저 호적에 기록되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호적에 기입되었고 또한 식량이 수입이 이루어지고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식량난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2차 경제개발계획(1576년~1580년) 2차부터 상업과 공업에 대한 개혁이 시작된다. 1차 시기에서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신작로가 의주에서부터 부산까지 개통되었고 한강에 주교가 건설되면서 물류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 질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또한 명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명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북벌의 시작으로 엄청난 말과 노비가 조선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말과 가축 그리고 노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의 개혁조치는 국내에서의 자유무역 국외에서의 중상주의였다. 지금 까지 상업통제 정책을 대거 해제하고 그 대신 교역세와 각종 잡세를 신설하여 부과하였다.. 그리고 대외 무역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업을 선정하여 육성하기 시작한다. 인삼, 종이, 화문석, 무기, 도자기가 집중 육성되어 개발되어져갔다.

그리고 또한 어업 또한 발전한다. 소금의 대량생산과 함께 새로운 생선 가공물품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많은숫자의 배가 만들어지고 어선이 개발되면서 어획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양식 사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대 특히 김양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졋다. 마른김은 군대의 중요한 식량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지폐 발행

조선은 경제가 점점 발전하면서 화폐의 부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내에서 생산된 은과 금의 수출을 금하고 금화와 은화를 제조하였음 일본과 중국의 은유통의 중계무역으로 하고 있었으나 중국의 은중심의 화폐구조로 인해서 은이 부족하였고 이에 지폐를 발행하여 은화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은본위제로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의 지폐는 녹봉으로 지급되었으며 또한 납세가 가능하게 하였음 외수사에서 발행된 지폐는 외수사에서 은이나 쌀로 교환되어졌으며 그리고 외수사에서 발행하여 유통되었음 이 지폐는 조선의 대외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중국와 왜에도 유통되었으며 특히 왜에 대량으로 유통되었다.

임해군 탄생 경빈 도진씨가 임해군을 낳았음 균의 임금의 장자이지만 적장자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일본인이라서 원자로 임명되지는 않는다.

병자 1576년

시마즈가에서 대대적인 사절단파견 경빈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이지만 실제목적은  시마즈가는 친조선 정책을 강화하고 본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려고 한다.  

외수사 규슈분점 설치

외수사의 분점이 규슈에 설치되면서 조선상인의 활동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외수사분점은 기본적으로 규슈에서 나오는 은을 사들여 조선은화로 만들어 조선으로 보내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곧 자본의 보관및, 융자 즉 은행역활을 하게되었고 상인들 사이의 신용거래를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자본의 유동성이 강화되면서 상인들의 일본 진출이 더욱 활발해졌다. 또한 조선 지폐가 일본에 유통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조선 지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광해군 탄생

정축 1577년 대마도 정벌

대마도 정벌은 대왜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무엇보다도 일본 본토 동쪽에 대한 무역은 지금까지는 대마도가 독점하였고 조선상계의 팽창에 어느 정도 저항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익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 대마도를 공격하여 중계단계를 하나 없애버림으로서 보다 많은 이익을 획득할수 있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대마도의 내지로 들어가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저항하려 하였으나 바다로부터 고립되고 농토가 불타 버리자 항복함, 대마도주와 그 가족들은 한양으로 압송 되고 많은 수의 대마도 주민들이 노비로 조선으로 팔려감 대마도에는 수영이 설치되어 대왜무역의 중계기지이자 또한 차후 남벌의 물자 비축소로 만들어진다.

대마도 종씨들은 그후 남벌시 조선군의 앞잡이로서 많은 공훈 세우고 왜에 많은 소유지를 획득 할수 있게 되엇고 후에 이들은 왜관 왜인과 래상과의 합작 독점무역 회사인 대우상회의 주식을 인정받으면서 상인 가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왜 막부에서 대대적인 사절단 파견함 대마도침략의 부당성을 성토하였다. 특히 사절단은 서로 전쟁중인 모리씨와 오다가의 가신들까지 포함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본토까지 못가고 대마도에서 돌아가야 되었다. 하지만 모리씨는 당시 조선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시마즈가를 조선의 주구가 되려고 한다고 비판하였으며 오토모가와 동맹을 강화한다.

또한 대마도에서도 외수사 분점이 설치되어 일본에서 나오는 은이 이곳을 통해서 조선은화로 바뀌었다. 또한 역시 규슈 외수사분점과 같이 은행역활을 하여 조선상인들과 자본들이 일본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육혈총 발명

육혈총은 기총(騎銃)으로 개발된 총으로 수석포개발에 성공하면서 보다 대량생산이 쉽고 오발률이 적은 총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연구하다가 뇌관이 개발되면서 만들어질수 있게 되었다. 뇌관은 수은을 초산(硝酸)에 용해시키고 그것을 주정(酒精)과 석어서 만들었다. 수은은 거의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해야 되었고 초산 역시 개발관리 하기 어려웠다. 여기에다가 염초와 혼합하여 고체로 만들어야 되었는데 습기가 많거나 비가 오면 쏘지 못하였다. 하지만 기병들에게는 육혈포는 신이 내린 축포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육혈총 한정가격이 일반 권총의 10배 가격이었지만 이것을 두 개 가지고 가는 것은 소총 12정을 들고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탄알하나 가격 역시 보통 탄 보다 비쌌지만 말이다. 하지만 계속 군대가 확대되어지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기병들이나 군관들이 이것을 사기위해서 사비를 털었다.  

무인 1578년

시마즈가 오토모가를 제압하고 규슈를 통일 한다. 이는 막대한 량의 조선의 지원과 교역을 통한 부로 성공한것이다. 하지만 규슈의 통일과 함께 본토에 대한 위협 또한 가중된다. 모리씨는 오토마를 남겨두어 시마즈가를 견제하려고 하였고 오다를 중심으로 해서 본토에서도 통일의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시마즈가는 규슈독립 계획을 성립하고 조선과 밀약을 맺게 된다.

대동여지도발행

균은 중국의 동방을 모두 포괄하는 거대한 지도제작을 명하였 1578년에 완성한다. 대동여지도는 조선과 북방여진 지역 그리고 일본까지 상세히 기록하도록 하였다. 일본지역의 지도는 1580년이 되어서 완성되지만 1578년 북방여진지역을 포괄한 대동여지도가 발행되었고 대량 인쇄되어 군대에 보급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철저한 실측정과 함께 등고선이 사용된 세계최초의 지도이다.

기묘 1579년 기묘경장 실시

경국대전 완성

조선의 헌법체제로서 왕의 권한과 의무 그리고 기묘경장 이후 각 정부의 부처와 의정부의회의 권한, 신분제 역시 관직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하였음 경국대전은 의정부에서 심사하여 조정하도록 하였다.  

기존 6조체제에서 내조(內曹),외조(外曹),병조, 호조, 형조, 농조, 상조, 공조, 문조(文曹),교조(交曹)등 9조제로 바꾸었다. 기존 이조(吏曹)의 역할이 내조로 옮겨가고 예조는 외조와 문조로 나뉘어졌고 공조는 농조, 상조, 교조, 공조 4개로 나누어 확대되었다. 의정부를 완전히 새롭게 이법기관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또한 관계를 만들었다. 관계(官契)는 기존의 향악을 더욱 발전 시킨 것으로 각 군현을 중심으로 그곳에 호적이 기재되어 있는 자들 중 양반계층으로 관에서 인정되는 사람들이 참가할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5년에 한번 그 지방의 명사를 뽑아서 의정부의원직에 추첨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100명의 의정부의원은 정3품의 대우를 받았으며 기존의 3사가 가지고 있던 임무를 임계받아 수행하였다. 당연히 막대한 권한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돈 많은 상인들이나 일반 자영농 양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가입 할려고 하였다.  

기묘경장은 기존의 확대되어가는 관료에 맞게 행정실무조직을 재편하였고 지방자치조직과 지방의 실정을 중앙에 제대로 알릴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제도가 점점 약해지면서 관계추첨제를 바탕으로 한 중앙정계진출은 정치방식의 새로운 변화를 가지고 왔다.

균은 지금까지 소수 중앙 관료중심이었던 지배체제를 보다 확대하여 하급관료중심으로 만들었다. 이들 중인층은 대부분 지방에서 소수의 머슴을 부리면서 농사를 짓는 자영소지주거나 봉급에 의존하는 하급관료와 하급군인, 그리고 의사와 상인들 이었다. 소위 서양에서 말하는 젠틀맨 계층이거나 부루주아지인 것이다.

광무천황은 이러한 중인층에 대한 우대책으로 기존 기술관직의 품계를 높여주고 또한 하급관료의 봉급을 늘려주었다. 이것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다. 이러한 비용을 매꾸기 위해서 이른봐 매관매직과 관노매방조치를 행하였다. 매관매직은 명예직을 중인들에게 팔아서 중인들에게는 양반직위를 주고 조정은 받는 것이다. 관노매방은 노비가 돈을 내거나 힘든 노역을 일정기간 하면 해방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기존 성리학적 지배계급 체계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경진 1580년

조선인구 2500만 돌파

조선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보건청의 개설로 신생아 사망률이 떨어지고 역병 발생률이 크게 낮아졌고. 또한 농업혁명과 외국과의 교역으로 많은 량의 식량이 조선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인구증가는 점점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먼저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안그래도 농업혁명으로 인해서 농촌에 필요한 노동력이 줄어들고 있는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실업자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로 도시의 급격한 인구증가이다.  외국과의 교역으로 얻은 식량을 얻기 위해서 교역도시로 사람들이 몰렸고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각 대도시에 많은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양의 인구는 1560년 20만이었다가 1580년 80만으로 4배로 증가한다. 이 때문에 한성 외부에서 각종 빈민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각종 범죄들이 벌어졌다.

3차경제개발계획(1580년~ 1585년)

3차 경제개발 계획은 도시 개발 계획이다. 조선의 모든 읍성에 대해서 도로와 위생시설 즉 하수도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소방청을 만들어 각 대도시에 설치하여 화재에 대비하려 하였다.

또한 무기공장과 조선소의 많은 건립하였다. 원래 무기창이 있던 한양과 개성 평양 이외에 동래와 광주에 무기창을 만든다. 또한 조선소가 제물포가 있는 인천과  부산, 나주에 건설되었다.

시코쿠의 초소카베씨와 접촉하여 동맹을 맺음

규슈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조선으로 선교사단의 파견에 대해서 논의 함

막부 조선상인에 대한 내지통행금지령과 조선상품 과세령 선포

막부 실제로는 모리가와 오다가의 조선상인에 대한 규제조치는 모리가에게서 조선의 대마도 침범과 규슈에 대한 지원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다가에서는 물가상승을 주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오다가는 오사카상인들을 지배하면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상업이 발달하면서 오사카 상인들이나 규슈상인들이 이용하는 대명나라 교역라인이 사라져 버렷다. 규슈상인들의 경우 시마즈가의 친조선 정책으로 인해서 조선인의 상업적 진출을 묵인하고 오히려 조선상인들과 연합하여 왜에 대한 진출의 앞잡이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규슈-조선상인들의 동맹은 오사카의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지폐가 왜로 유통되면서 조선의 지폐와 바뀌어지게 되었고 일본쌀이 조선으로 대량으로 판매되어갔다. 이는 전국의 물가를 증가시키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전쟁물품인 화약을 조선에서 판매하였는데 조선은 초전을 개발하여 염초를 대량생산하였고 대마도가 조선에 정복되면서 일본 전국에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화약은 다케다가나 우에스기가에 판매되었고 이는 오다가에 위협적인 요소였다. 실제로 나가시노전투에서 다케다가의 돌격을 막아낸 오다가는 다케다가의 군대를 소탕하려고 하였으나 다케다가의 총포대에 의해서 화룡정점을 찍지 못한다.

그결과 오다가나 모리가는 조선상인에 대한 제한조치를 취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때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전일본의 대표자로서 이러한 법령을 발표하게 한다.

  

신사 1581년

의정부에서 대대적인 일본의 제한 조치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많은 양반들이 이윤이 많이 나는 일본 무역 회사들에 투자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책은 이러한 회사들의 이윤율을 급격히 떨어 뜨렸다. 이는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전쟁에 찬성과 반대를 두고 조선은 경반과 향반으로 나누어진다. 경반은 전쟁에 찬성하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양반이고 향반은 전쟁에 반대하고 농촌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양반들 이었다 .

당시 조선은 급격한 발전으로 팽창욕구가 팽배해지고 있었다. 북벌의 성공과 상공업의 발전, 중인들의 권력에 대한 욕구가 증진되면서 전쟁에 대한 요구 역시 아주 컷다. 전쟁이 일어나면 빈민들에게는 일자리를 중인들에게는 관직과 부를 양반들에게는 부와 권력을 줄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균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장거정 역시 왜구에 대한 소탕을 이유로 이를 지원함

조선 몽고 차하르지역 칸들과 비밀리 접촉 북원과의 교역 개시

임오 1582년 남벌실시

오다 노부나가 사망 우연히 선봉원정대 육군 5만과 3해 연합수군 2만이 부산을 떠나 왜로 간다.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규슈 시마즈가 역시 1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정대에 합류 모리가를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모리가는 당시 오다가의 공격을 받아서 겨우 버텨낸 때였으며 오다가문의 서방 공격군 대장이였던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사망소식을 듣고 군대를 급히 회군하고 있던 중이었다.

선봉원정대가 시모노세키를 장악하자 정착민 1만호가 부산을 떠나 왜로 간다. 이들은 대부분 북벌시기부터 직업군인으로 전쟁을 벌인 군인이나 아니면 노역의 대가로 자유를 얻은 관노들 이었다. 조정에서 이들에게 방금 정복한 왜의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 준 것이다. 또한 저항하는 왜인 5만명을 조선으로 끌고가 노비로 팔아버린다.

장거정 사망

계미 1583년

2차원정군 신립이 이끄는 기마사를 중심으로 약 3만 육군이 투입 이들중 다수가 여진족 출신의 용병들로서 이들은 일본 전국을 약탈하거나 방화하여 공포에 떨게 한다.

히데요시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는데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 기요스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고 시바타 가쓰이에를 기요스 회의의 주축이 되어 오다 노부타다를 오다가의 후계자로 삼았다. 오다 노부타다는 히데요시에게 조선에 대한 방어를 명령하고 자신의 오다사후 동쪽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였음 결과적으로 히데요시는 오다가에서 고립되어 혼로 조선군과 맞서게 되었다.

3차 원정군 본대 10만 균의 친정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본격적인 남벌이 시작된다. 초소카베가 조선에 복속사신과 함께 병사 1만과 군량을 보낸다.

장거정 탄핵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

몽고 대칸 투멘 자삭투 대대적으로 조선인을 받아들이고 체제정비를 단행 조선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은 투멘 자삭투는 몽고족 재 단합에 성공한다.

갑신 1584년

4차 원정군 5만이 일본에 도착 총 25만의 대군이 남벌에 동원 되었다.

오다가에서 고립된 히데요시는 조선에 항복하고 만다. 오사카와 교토 함락 천황의 신변을 확보

오다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 아케하자마에서 선봉원정대와 2차원정군과 결전을 벌인다. 이전투에서 뛰어난 화기와 기마부대를 적절히 조화시킨 전술로 인해서 조선이 승리 시바타 가쓰이에는 활복 자살한다.

을유 1585년

경기마대가 왜 본토를 휩쓸며 약탈과 방화를 벌인다. 이 때문에 많은 피난민이 발생한다. 조선으로 엄청난 수의 왜인 노예가 보내진다.

오다 노부타다 활복 자살 오다가 멸망,

병술 1586년

교토에서 천황의 이름으로 전 왜의 대명에 대한 소집 명령 막부 폐지, 조선과 왜는 형제관계의 국가로 천명한다. 그리고 시마즈가와 초소카베가를 각각 왕으로 임명한다. 사실상 일본천황은 폐지된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각 대명들과 왕에게 인질을 조선으로 보내도록 요구

국내의 인구증가 및 실업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대대적인 이주사업 개시

4차 개발계획 (1586년~1590년)

이 시기 반도내 경제는 남벌 특수로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 엄청난 수의 노비가 유입되었고( 300만에서 400만이라고 추정) 이 엄청난 숫자의 노비와 함께 왜에 식민지가 건설되면서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진다.

먼저 농업분야에서 부농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쌀값의 안정과 노비의 유입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자영농이었던 농민들 중 상품작물의 재배와 모내기와 우마보급을 통해서 인구집약적 농업에서 기술집약적 농업으로 전환되면서 부농으로 성장한 층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일부 양반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틈을 이용하여 조정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이면서 점점 농촌경제의 주축으로 성장하였다. 부농층이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부농층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상승을 위해서 정부의 공명첩을 대량으로 사들여 양반층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부농층의 특징은 경반과 달리 향반에 가까운 가치관을 지녔다. 스스로 양반으로 행세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과거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유교적 경서를 중요시 여기고 이러한 유교적 행동양식을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부농층은 장자상속법에 의하여 오로지 장자에게만 재산이 상속되므로 나머지 아들과 딸들은 여러층으로 분화되어갔다.

균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비용을 얻어내기 위해서 식민지지역의 상권을 상회에 팔았다. 그리고 기존의 일본상권을 탄압 하였다.(후에 일본상인들이 조선으로 귀화하고 조선 조정에 많은 돈을 내면서 그들의 상권 또한 인정하였다.)

북원과 사신 파견 사신파견 및 협정체결

정해 1587년

간토지역에 대한 공격 시작 도쿠가와 이에야쓰 항복, 우에스기가 멸망, 호조가 멸망, 간토지역에 총독부 설치(동경지역)

이지(탁오) 조선으로 균의 초청을 받아 조선으로 망명 이이와 함께 치서를 편찬 치서는 야명학을 바탕으로 한 경세치략에 대한 책으로 실사구시를 강조하고 중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는다.

무자 1588년

다데 마사무네를 중심으로 한 일본 동북 지방의 영주들이 반조선동맹을 맺음

다데 마사무네는 아버지가 조선군의 공격으로 죽고나서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에 대한 유격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일본 동북지방의 영주들의 인정을 받아 맹주가 된다.

균 다시 조선으로 감 일본에 2개의 총독부 설치 남경총독부(오사카), 남양도호부(도쿄) 각 총독부 마다 10만의 병력 소유 인정 10만 병력은 먼저 조선정착민들중 20~40대의 장정들에게 예비군을 편성하도록 함 일본인 용병을 고용

명나라에 장거정 탄핵을 비판 이에 명나라에서 조선에 대한 정벌론이 나온다.

기축 1589년

유구정복

경인 1590년

5차 개발계획(1590년-1595년)

중국과의 외교마찰로 인해서 대중국 무역이 타격을 입게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밀무역(명 조정에서는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나 한제국은 정부의 관리 하에 이루어졌다.)이 성횡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조선 상업은 폭발적인 활력을 자랑한다. 첫 번째로 왜무역의 독점이다. 남벌의 성공과 함께 왜구세력이 소탕되고 동중국해로 조선전함이 진출하였고 대만까지 조선이 점령함으로 인해서 왜와 중국의 무역을 조선이 독점하였다.무엇보다도 왜가 정복되면서 연공금으로 쌀을 받았다. 이렇게 받은 쌀은 조선으로 보내졌고 쌀값을 하락시켰고 인권비를 감소시켰다. 쌀가격의 하락은 활발한 상품작물 재배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대토지 소유자들은 상품작물(목화, 담배, 인삼)를 대량으로 재배하였다. 토지의 지력을 많이 소모하는 이러한 상품작물들은 대토지 소유자가 재배할 때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화의 대량재배는 조선내 직조공업이 발달하는 요건이 된다. 견직물과 함께 면직물 모직물이 대대적으로 왜로 수출되었고 왜의 시장을 조선이 독점하면서 조선공업이 엄청나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대만 정복 이순신 초대 대만총독으로 임명

대만은 왜에서 모병한 왜병과 함께 조선수군이 주도로 하여 정복하였다. 대만이 정복되면서 동남 중국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서양선박이나 왜의선박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을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대만에서 서양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였고 엄청난 량의 서양문물이 전래되기 시작한다.

신묘 1591년

조선과 명나라의 무역마찰이 심화된다. 장거정 사후 상해관의 명나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진다. 장거정 생전에 상해관 무역을 철저히 관리하였기에 이러한 일은 없었지만 장거정이 죽고나서 중앙정부의 감시와 규제가 약화되자 관리들의 부패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장거정이 죽고나서 명나라 역시 상해관을 착취의 수단으로 만 보았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참다 못한 조선 상인들이 악덕관리에 대한 상소를 명나라 조정에 보내고 명나라와 거래를 끊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조선조정은 이에 전쟁을 준비한다.

임진 1592년

조선군 요동진격 요동을 정복하고 산해관 공격 함락 시킨다. 같은시간 조선 왜 연합함대가 산동반도에 상륙 산동 반도를 차지한다. 또한 대만에 있던 조선 수군들이 중국 남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자금성 함락 만력제 확보 만력제와 형제의 예를 맺고 산해강 동쪽의 모든 땅을 조선의 것으로 인정받는다. 산동반도의 지배권 인정받고 상해관은 조선에 할양된다.

명나라 자금성에서 한 제국 선포 균 스스로 광무천황이 되었다.  

한제국의 국가적 이데올로기는 조선은 과거 고조선을 이어받아 동이족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외쳤다. 고조선 한(漢)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였지만 그것이 부여로 이어지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계승되었고 삼국시대 후 발해, 신라, 일본에 계승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요,금 등의 여진족과 거란족 그리고 고려, 왜으로 나누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즉 한(韓)제국은 여진, 조선, 일본으로 나누어진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국 한(漢)족과 다른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벌과 남벌은 정복전쟁이 아닌 민족의 통일 전쟁이며 여진족과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 보다 발달된 문명을 가진 조선에 통합되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여진족에 대해서 강력한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왜에서도 관학을 설치하여 조선어와 문화를 가르치고 왜의 고위층 자제를 조선의 성균관이나 훈련도감으로 유학시키게 하였다. 또한 왜인의 귀화를 장려하고 조선 직영지에서 상투와 조선옷을 입도록 하였다.

직영지에서 조선옷을 입게하면서 일본문화와 조선문화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은 조선옷을 입으면서 많은 장식과 자수 금박을 첨가하였다. 이러한 화려하게 변형된 복식이 조선으로까지 흘러들어가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

산동반도는 조선에 항복하여 명나라와의 전쟁에 참가한 왜의 대명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결과 많은 수의 왜인이 산동반도로 이주하였다.

계사 광무 1년 1593년

몽고의 대칸 투멘자삭투 사망 그의 아들 세첸은 다시 한번 중화정복의 야망을 안고 정복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 다시 한번 자금성 함락 자금성을 수도로 하여 북원 설립

만력제 남경으로 도피 중국조정은 거의 붕괴 일보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신사들이 모두 힘을 모아 명나라 조정을 지지하였다. 그 결과 남명정부가 수립 된다. 동아시아 3국체제가 설립 북원 대칸, 남명 황제, 동한 천황으로 나뉘어 진 것이다.  

갑오 1594년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많은 공훈을 세운 광해군 황태자 임명 임해군은 탈락 된다.

을미 1595년

6차 개발계획(1596년~1600년)

북경과 남경이 함락 당하였고 중국역사에는 만력의 치라고 부르는 치욕적인 협정으로 불리워지는 북경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인해서 요동과 요서지방을 한제국이 확보할수 있었고 그 후로 대대적인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아직까지 중국에 천일염 제조 방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금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대중국 무역과 엄청난 량의 조공이 이루어 졌다.

이때 대대적인 북방개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만주지역과 요동 요서지역의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왜인이나 중국의 노비들에 의해서 개척사업이 이루어졌다. 이지역에는 주로 벼농사보다 밀이나 보리 그리고 옥수수가 재배되었고 목축이 발달하였다. 특히 동정(블라디 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하여 북해 지역의 어업을 중심으로 해서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되어갔다. 특히 포경산업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병신 1596년

정유 1597년

무술 1598년

기해 1599년

경자 1600년

신축 1601년

7차 개발계획이시기부터 한제국은 중국과의 전쟁보다는 미개척지의 확대에 더 주력하였다. 특히 시베리아지역과 북 아메리가 대륙의 식민지 경영에 많은 관심을 표현하여 그곳의 탐사대를 보내고 이주민을 모집하였다. 특히 한반도의 급격한 인구증가(한반도의 인구가 6천만으로 까지 증가하였다. )와 실업자의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해외식민지 개척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미 아메리가상회가 1588년에 성립되어 이민 산업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아메리가 대륙의 서부의 진출이 연구되었으나 대부분 불모지에 가까운 아메리가 대륙의 서부는 계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601년 미주(현 시애틀)가 발견되어 정착촌을 현성하기 시작하였으나 대대적인 미국 이주는 1605년 한주(현 샌프란시스코)가 발견되어 개척 되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한주는 기온이 온화하였고 미주보다 훨씬 농사나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다. 그 결과 한주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아메리가 대륙이주 사업이 실시 되었다.

하지만 1602년 이주민 숫자는 겨우 400여명에 불과하였고 대부분 범죄자들이나 일본 중국인 노비들이었다. 오히려 북방 시베리아 개발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1607년 이주민 숫자가 5000명까지 증가하게 된다. 이는 역시 신대륙의 엄청나게 넓은 땅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대륙 개발은 이주보다 신대륙과 서양 상품이 대대적으로 한제국에 유입되게 만들었다. 특히 신대륙의 담배와 설탕 등이 대거 유입되면서 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동서무역이 틀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페인제국과 자주 접촉 할수 있게 되었다.

임인 1602년

일본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남 그러나 진압 반란후 이때 반란에 가담한 자 1만여명이 처형되고 20만명이 노비로 조선에 팔려옴

계묘 1603년

황태자에게 왕권 이양 광무천황 은퇴 건국천황으로 천황 등극

갑진 1604년

을사 1605년

병오 1606년

정미 1607년

무신 1608년

기유 1609년

경술 1610년

신해 1611년

임자 1612년

계축 1613년

갑인 1614년 균 사망


Comment ' 6

  • 작성자
    검심
    작성일
    08.04.01 08:35
    No. 1

    저도 꽤 좋아하는 대체역사소설입니다.
    이 분 연재 당시 일빠들의 공격을 좀 받으셨죠.
    일본 관련 정보 중에 오류가 있다던가.
    뭐, 일본사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저로선 그런갑다 하고 넘어 갔지만
    그런 거 하나로 고증이 쓰레기다라고 공격한 일빠들 같은 경우 이해가
    안 가더군요.
    이만큼 성실한 작가 분 찾기가 힘들던데......
    독자들의 의문점이나 반박을 근거를 들어서 왜 그렇게 기술 했는 지
    매번 상세히 답변해 주시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하신 것 같던데 그런 노력들까지 싸잡아 비하한다
    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틀린 건 틀린 거고, 거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건 옳은 일이겠지만.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79 노을1
    작성일
    08.04.01 09:26
    No. 2

    상당히 만족하면서 읽었습니다. 가장 초기에 읽었던 대체역사소설이라서더 인상깊었는지 모르겠네요. 2부가 나왔으면 하고 바래보지만....처음 환생군주가 선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임진왜란은 꼭 나올거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풀어나갈까..기대했는데, 아예 임란을 피해가는 쪽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더군요. 그러다보니까 1부 끝날때 쯤에는....대체역사가 아니고 판타지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증은 고증인데..역사에 사건을 끼어넣는 비율이 시간이 지나면서서 점점 떨어진다고 보였거든요. 작가님도 이야기 풀어나가기가 점차 힘들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흑오조
    작성일
    08.04.01 10:39
    No. 3

    2부 언제 나오려나.......//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비오는언덕
    작성일
    08.04.01 13:11
    No. 4

    에휴..그럼 모하나..6권이후...뻗어가는 조선에 대한 2부가 없는걸..쩝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탈퇴계정]
    작성일
    08.04.02 00:26
    No. 5

    2부 보고싶은데 진짜 ㅠ.ㅠ 우잉씽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5 산악기병
    작성일
    08.04.02 17:44
    No. 6

    제가 조아라에서 연재되던 분량까지만 보고 출판된 책을 못봐서 그런데 연대기에 나온 내용이 전부 다 출판된 건가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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