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주서곤
작품명 : 크로스브리드 1, 2권
출판사 : 파피루스
*미리니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피했습니다*
1. 정말 첫작품인가?
이 글이 정말 첫작품이라면 감탄할 수밖에 없다. 크로스 브리드는 어떤 의미로는 이미 스타일이 확립된, 아주 탄탄한 글이다. 몇 작품은 출판해 본 듯한 관록이 느껴진다. 아니, 요즘처럼 발전하는 작가를 찾기 힘든 시기에는 중견작가가 쓴 글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짜임새있게 쓰여져 있다.
2. 분위기가 다르다
크로스브리드는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글이다. 기존의 쏟아져 나오는 양산형 소재를 채택한 판타지 소설과는 궤를 달리 하고 있다. 한상운님의 '무림사계', 문재천님의 '마물'처럼 트랜드라는 것에서 벗어나 있다고나 할까? 이 소설은 언뜻 느끼기엔 해외 판타지를 들여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근본부터 다르다. 얼음과 불의 노래나 다크엘프 트릴로지를 읽어본 분이라면 크로스브리드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재능을 타고나서 갈고닦거나, 귀족가의 후계자라서 영지를 발전시키거나, 다른 차원에서 뚝 떨어져서 깽판치거나, 학원에 들어가서 노닥거리거나, 엄청난 대군으로 병정놀이 하거나, 이런 흔한 내용은 없다. 아예 그런 플롯 자체에서 벗어나 있다.
주인공인 낫슨은 네 종족의 피가 섞인 잡종 중의 잡종이며,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기의 저주를 풀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것을 위한 그의 여정은 마치 시련을 등에 업은 영웅이 성지를 순례하러 떠도는 듯 하다. 입이 좀 험한 영웅이긴 하지만.
3. 매력적인 주역들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네 명의 캐릭터에 너무나 능숙하게 개성을 부여하고 있고, 그러한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맞물리며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낫슨, 프라이디, 룬달, 에드워즈, 이 네명의 주인공은 자기 색이 뚜렷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개성을 살려주는 모습이 매우 이상적이었다.
외모가 달라 평생 큰 아픔 속에 살아온 낫슨은 이 모험 파티의 동력원이다. 그는 숙련된 전사이며 매우 냉정한 살육자이지만 동시에 동생들을 무척이나 아끼는 맏형이자 명예를 아는 기사이기도 하다. 입은 엄청 험하지만 동료를 아껴주고, 행동은 거칠지만 배려가 보인다.
하플링 마법사 룬달은 광대 캐릭터다. 그는 익살과 재치로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은 깊은 상처를 안고 복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프라이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쾌활한 행동은 내면의 아픔으로 인한 반대급부에 불과하다. 룬달의 마법은 위기시 항상 빛을 발한다.
낫슨의 집사인 에드워즈는 어둠 속의 조언자 타입 캐릭터다. 강하지만 나서지 않으며, 그림자 속에서도 항상 해야 할 일은 완수한다. 그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을 품고 있지만 그걸 능숙하게 감추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작품의 베스트 캐릭터, 프라이디. 이 작품의 히로인격인 그녀는 정말 매력덩어리다. 매우 영악한 면을 보여주다가도 종종 바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맹한 짓을 해버리고, 지식의 신 두바밀을 섬기는 만큼 호기심은 상상을 초월하며, 그때문에 종종 사고를 치지만 또 가끔은 의외의 활약을 해서 즐겁게 만들어 준다. 룬달과 함께 이 작품의 분위기 메이커를 맡고 있다.
프라이디는 진실한 신을 찾기 위한 여행 중이다. 나는 그녀의 여행동기를 듣고 감탄해버렸다. 항상 아무 생각없는 천방지축 귀족 아가씨들이나 뭔가 있어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는 여아들을 보다가, 이렇게나 제대로 뭔가를 고민하고 추구하는 히로인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어째서 같은 불의 신인데 이곳의 신과 저곳의 신이 다른가, 라는 문제에서 시작해 진실한 신의 추구에까지 뻗은 그녀의 탐구심이 마음에 들었다.
4. 멋진 조역들
주역들만 괜찮은 게 아니다. 기사는 기사다웠고, 마녀는 마녀다웠으며, 악마는 악마다웠다. 각 캐릭터는 그 포지션에 걸맞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고 난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로는 '명예를 알지만 약점을 잡힌 고결한 노기사'라고 쉽게 쓸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캐릭터를 형상화해서 보여주기는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다. 불채찍이나 휘두르는 힘만 센 멍청이같은 악마가 아니라, 정말 무섭고 사악한 악마라는 존재는 쉽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로스브리드에서는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캐릭터들도 섬세하게 묘사해놓아서 등장하는 분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지 않으나 현명하고 과감한 공주, 백성을 위해 몸바쳐 싸우는 왕자, 왕위를 위해 가족들을 악마에게 바치는 왕,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마녀. 각 조연들이 자연스레 자기의 존재를 어필해왔고, 그것은 읽는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5. 설정이 잘 녹아든 이야기
크로스브리드는 마녀라던가, 악마와 계약한 왕, 엘프들의 다툼 등 무척 전통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곳곳에 독특한 설정을 잘 녹여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마법에 대한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일행 중에서는 유일하게 룬달이 사용하는데, 마나를 사용하고 시약을 소모하는 무척이나 서구적인 마법 사용 행태를 보여준다. 그는 그리스 마법으로 적이 미끄러지게 하거나 바위에 깔린 동료를 빼내고, 투시 마법으로 적의 정보를 미리 확보해서 우위에 서는 등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엘프와 다크엘프 간의 싸움에서 보여준 각 엘프 사회의 세부적인 묘사도 좋았고, 두바밀이나 제일 등의 신과 그들에 대한 신앙 등도 독특했다. 마치 드래곤라자를 보는 듯 했다. 이런 다양한 설정을 그저 줄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중간중간에 적절히 풀어놓으면서 작품의 깊이를 더하고,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6. 총 평
나에겐 정말 멋진 소설이었으나, 약간 취향을 타기는 탈 것이다. 문재천님의 마물 만큼은 아니지만, 기존 판타지의 트랜드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소드맛스타나 고리 아홉개 마법사, 십만 단위 전투, 최강의 고유능력 등을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그닥 추천할 수 없다. 오히려 다크엘프 트릴로지 등 중후한 판타지를 좋아하는 분에게 더욱 어필할 만한 글이다.
그러나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다양한 웃음, 감동, 공감을 일으키는 면이 많이 있으므로 너무 거리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위에 열거한 그런 장점을 차치하더라도, 그저 통쾌한 낫슨의 행보와 귀엽고 엉뚱한 프라이디의 모습을 즐기는 것만으로 쉽게 작품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난 대만족이었고, 부디 조기종결같은 재앙 없이 작가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기를 기원할 뿐이다. 제대로 완결만 난다면 구매의향도 있다.
http://blog.naver.com/serpent/110022370272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