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프로즌
작품명 : 일곱번째 기사
출판사 :
판타지부문에서 근래에 선작수가 많은 작품이니 많이들 보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말할 때와 같은 부담감은 덜하군요. 그저 하나의 의견으로 편하게 말해봅니다.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저도 마뜩치는 않습니다. 판타지를 읽는데 연령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연령대가 확연히 구분된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독자가 연령대가 높다면 더 느끼는 바가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런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피노키오>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아용 그림책으로 읽히고 있지만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읽어보면 단순히 돌아온 탕아의 교훈만을 담고 있지는 않죠. 마찬가지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도 신기하고 유쾌한 모험담에 중점을 두어 읽히지만 알고보면 당대 영국사회와 정치판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구요. 이처럼 <일곱번째 기사>도 그냥 보면 세련된 이계진입물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의미들을 짚어낼 수 있는 나이의 독자에게는 더 풍부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친구가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권해주더군요. 정말 짧고 그림도 많고 쉽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책을 읽더라도 어른들이 보는 느낌은 다를거라는 데 동의하실 거라고 봅니다.
처음 1권의 도발적인 자기 주장에서 드러나듯 주인공 한지운은 프로즌님 분신같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믿고 있고, 다른 세계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이런 가치가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풍운아 크롬웰 -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 정신으로 혁명을 일으켜 결국 후에 동시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던 영국의 크롬웰을 생각하시면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는 - 와는 달리 한지운은 보다 넓게 볼 줄 아는 사람이고 다원주의를 깊이 체득하고 있지요. 게다가 사회생활을 통해서 이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것은 결벽보다는 냉철한 권모술수라는 것도 잘 알고 있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작품에서 한지운은 '신'으로 대변되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믿지도 믿지않지도 않고,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큰 호기심은 없어 보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란 현실과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레예스의 종으로 행세하면서도 내면의 갈등이나 가책이 없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종교의 원전을 신봉하는 원리주의자과도 다르고, 진실은 고통스럽더라도 드러나야 한다는 사람들과도 다릅니다. 어쩌면 작가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정치에 대한 것도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
하지만 한지운이 초월자 지스카드의 힘을 빌려서 레예스의 뜻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쪽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진실을 덮었더라도 결국 국민들을 이롭게 하는 그런 정치를 그리고 있다고 봤습니다. 오해할 수도 있는데 이는 마키아벨리식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의 발전단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머릿속에 담고 있는 입장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혁명과 반동의 도가니에서 고통받고 혼란스러운 부침을 거듭하는 것보다 인위가 가미된 약간의 유도로 그 과정을 부드럽게 만들어보자는 것이죠.
이러한 조심스러움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척 기분 좋더군요. 책보다 RPG나 드라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다른 이계진입물에서는 발전된 현대세계의 지식을 너무나도 고민없이 팍팍 뿌리고 다니는 모습이 많아서 보면서 답답했거든요. 하나의 기술이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휙 던져주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지운처럼 지식과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가치관(일종의 매뉴얼이라고 봅니다)까지 잘 설명해줘야지 책임감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사에서 '등자'의 발명은 작은 것이지만 아주 혁신적이었죠. 말을 타고 그 기동력과 위력을 이용한 것은 오래 전이었지만 말에 등자를 달아서 말 위에서도 온전하게 힘을 쏟아서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득세하였죠. 이런 것처럼 한쪽에 너무 유리하고 기존 사회의 역학관계를 뒤집어버릴 기술들을 쉽게 쉽게 뿌리지 않는다는 것만해도 <일곱번째 기사>를 읽는 것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자동차연관산업(수리업,운전면허시험장,택배회사 등등)에 종사하는 경제활동 인구가 1/5이상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1/7 정도랍니다. 소위 국민경제에 영향이 큰 산업이죠. 그런데 갑자기 미래에서 온 현자가 새로운 에너지로 내연기관이나 도로가 필요없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만드는 기술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환호작약할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엔 열광하겠지만 결국 자기 밥줄때문에 억지를 부려서라도 마녀사냥을 하겠죠. 당장 돈버는 사람의 1/7이 하는 일이 무용지물이 되고 힘들게 닦은 도로가 무용지물이 되는데 쉽지 않겠죠.
<일곱번째 기사>의 한지운이 그 현자의 입장이라면 무턱대고 기술을 알려주기보다는 지금 존재하는 기술과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을 접목시켜서 거부감을 줄이겠죠. 내연기관이 필요없고 땅에 붙어서 아스팔트 위로 달려야할 필요가 없더라도 이미 자동차 위주로 짜인 사회시스템을 뒤흔드는 혼란을 초래하지 않고 마치 일종의 '하이브리드카'인양 소개할 거라고 봅니다. 실제 우리 인류의 역사도 그런 식이었죠. 알파벳이 한글보다 우수해서 계속 쓰이는 것도 아니고, QWERT자판, 2벌식 자판이 불편한데도 계속 쓰이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프로즌님의 건필을 기원하면서 한가지만 건의해볼까 합니다. 한지운이 활동하는 무대가 넓어지고, 점점 더 보통의 사람과 다른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 처음 거지꼴로 프레드릭 영지로 자잡혀왔던 당시의 한지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른 추종자들처럼 변해가는 건 좀 아쉽더군요. 스케일을 키우면서 흥미를 높이는 것은 흔히 쓰이는 방법이지만 처음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설 결말에서 잘 처리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네요. 개인적으로 로젤리아양, 로렌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실지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 프로즌님께서 연재본 중간에 신예작가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언급하신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프로즌님이 장르문학의 현실과 독자의 요구를 감안해서 글을 쓰시는 프로 작가시지만 문학의 길을 아예 뒷전으로 돌려버린 분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다른 독자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머리도 식힐겸 판타지소설, 무협소설 보는 것도 좋지만 <달려라 아비> 같은 소설집도 한번쯤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