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이라는 것이 있다.
대하(大河)...말 그대로 도도히 흐르는 큰 물길처럼 장대하고도 많은 지류를 포용하
는 내용을 담은 소설의 한 갈래다. 벽초 홍명희 님의 임꺽정이나, 박경리 님의 토지
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단순히 주인공을 중심으로 둔 대화나 사건이 주가 아닌 전체
를 어우르는 커다란 배경의 테두리 안에서 펼처지는 수많은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들
을 담아내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장르문학인 무협소설은 어떠한가?
전부 그런것은 아니지만, 독자의 흡입력을 이끌어내는 장르문학의 특성과 가장 궁합
이 맞아떨어지는게 무협소설 이라 빠른 전개와 감정이입이 강한 문체, 자유로운 서
술구도 등, 그것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무협이란 옹달샘에 처음 목을 축인 독자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어떻
보면 비슷비슷한 이 특이한 장르문학에 탐닉하게 되어 이후로 오솔길이 빤질나게 닮
아지도록 드나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다다.
뱃속이 출렁이도록 물배를 채워도 허기를 달랠수는 없듯이, 결단코 재미만을 추구하
는 비슷한 내용의 반복은 결국 독자를 지치게 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같은 영양가
없는 물건이라도 형형색색의 음료수처럼 달콤한 미디어의 창조물들은 그이의 시선
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충분하다.
열두어살의 조카는 토지를 읽고 있는데 삼촌은 무협을 보기가 민망하셔서 머리에 피
도 안마른 시절부터 맞아들인 조강지처를 색색이 줄에 묶어 집 밖에 내던지고 당장
에 선언하신다.
나도 오늘부터 수준있는 문학소설만 읽을련다!
하지만 이틀후에 당장 빠개지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부랴부랴 동네 재활용품 집하장
으로 뛰어가시는 삼촌의 모습에 웃음지으면서도, 과연 문학이라 논할수 있는 수준
에 도달한 무협소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과연 그 수준이란 것의 향상
을 위해 '대하' 라는 신생장기를 무협에 이식한 경우가 있는지, 그렇다면 과연 몇번
이나 새 생명을 얻었는지 궁굼해지는게 또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 내가 이재일 님의 묘왕동주, 그 대미를 본 것은 며칠 되지않은 저번주의 일
이다. 육 년전, 한창 고구마 캐먹는 멧돼지처럼 무협의 단맛에 빠져있었을 시절, 뫼
출판사 전통의 맨 끝 페이지 두 세장 자매소설 소개 문구로 처음 상면한 묘왕동주는
그때당시 나의 치기어린 삼박자 라인(유명작가, 정통무협, 카리스마 작명.)에 딱 걸
려서 논외소설로 낙인찍힌채 육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이제서야 내 손아귀에 쥐어지
게 된 것이다.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라 독침을 날리며 깔작댈줄 알았던 묘왕 단탈은 독도를 휘두
르며 적들을 참살했고, 장옥평은 끝끝내 주인공으로 치고 올라오지 못했으며, 박한
은 절정검도를 깨우쳤으나 끝내 중국어는 못배웠다.
아니, 사실 묘왕동주 만큼이나 주인공들의 활약이 드문 무협소설도 드물다. 그저 중
심에 그들, 세 주인공을 자리잡게 하고 대신 숨가쁘게 전개되는 주변의 정세와 뭇
군상들의 이야기들로 전개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고로 그동안 주인공 중심으로 전개
되던 타 무협과는 조금 색다른 재미, 즉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나가 전체그림을 완성
하는 직소퍼즐의 묘미를 선사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건 대하소설이 추구하는 전개
방식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조추림의 기벽, 매용소와 도연향의 야심, 장후겸의 귀원의 한, 반호의 개(?)같은 집
념, 무왕의 편협함, 대왕곤의 꿈 등이 모여 탄탄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물
흐르듯 여한을 풀어나가는 세 주인공의 행보를 느낀다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작품으
로서 빛을 발하게 되고, 우후죽순 처럼 그렇고 그런 신진무협들이 난무하던 90년대
말에 대하무협의 한 획을 그었던 명작으로 묘왕동주는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단점은 존재한다.
주인공들의 활약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 품위를 위해 책장에 고이 모셔둔 대하소
설들 처럼 다시 읽어볼 엄두가 안나는 경우는 조금 문제가 된다. 무협은 활극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선이 굵은 전투씬과 활달한 모습들을 조금 더 포함시켰으면 하
는게 아쉽다.
중간에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드문드문 보인다.
이를테면 강상에서 벌어진 마맥회와 매용소 세력과의 수전후 결과라던가 단탈과의
화해와 합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간 부분, 물론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수많은 인물들과 이야기, 복선의 파도 속에서 틀어진 이야기의 꼬투리
를 찾아내는건 쉽지가 않았음이다. 작가님이 그건 네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래! 하고
말하신다면 할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딴지지만, 귀원대계의 핵심장소가 그동안 여타 수많은
무협소설 에서 다뤄졌던 죽음의 기관과 절진이 펼쳐진 장보도가 아닌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 다뤄졌었으면 하는게 또 아쉬움이다.
구무협의 무거운 주제나 가치관, 형식등을 포용하면서도 항상 독특하고 노력이 엿보
주연밎 조연들의 창출과 그 시대의 시대상황과 작품을 대비시키려는 이재일 작가님
의 노력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누구들처럼 작가님의 신작(?) 쟁선계가 무사
히 대미를 맺길 바라며 나도 그립고 눈물겨운 사람을 찾아 묘강의 음습한 산림속으
로의 귀원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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