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俠)'이란 무엇인가? '의(義)'를 행하는 것? 자기 희생을 다랍게 아끼지 않는 것? 대충의 얼개는 그릴 수 있어도 확실히 이것이다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좌백님께서도 '협'을 대하는 여러가지 입장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찰과 정리를 위해 이야기를 교직(交織)하고 또 풀어내셨다. 따라서 '혈기린외전'은 그 내용의 유뮤익성 혹은 재미를 떠나서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왔던 '무협'의 성격을 규정지으면서 아울러 필수구성요소였던 '협'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기 충분하다. '상상의 나래'에만 치우쳐가는 무협소설계의 나태함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근본에 충실하고 아울러 진부하지 않은 새로운 무협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1. 협은 희소하기에 가치가 있다.
'협'이란 행동양식이다. '의'를 행하는 것, 양심에 따르는 것, 배움을 실천하는 것 등에 있어서 그 '의'란 무엇이고. 또 그 '양심'이란 무엇일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배움'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사회 여러 구성원들이 동의하고 바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협'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행동양식을 행하기만 하면 다 '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혈기린외전' 내용 속으로 들어가보자.
1권에서 손부자와 정이노의 행동은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왕일'의 복수에 일조(一助)할 마음이 있으면서도 알아서 나서지 않는다. 꼭 왕일의 공식적인 '부탁'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4권에서의 왕일의 '관문뚫기 과정'. 혈기린은 왕일이 백호왕의 사자인 줄 알고 있으면서 또 당연히 백호왕과의 약속을 이행할 것이면서도 '관문통과'를 조건으로 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손부자의 불의를 지나치지 않는 마음가짐 그리고 혈기린의 약속에 대한 신의는 '협의 규정요인인 동시에 동기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나서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협'이라는 가치에 대한 자신으로부터의 모범적인 숭상과 확고함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물을 판단할 때 중요한 평가요소롤 작용하는 것이 그 행위당사자의 '결과물'에 대한 입장표명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결과물에 대한 확실한 책임감과 자부심 그리고 그로인한 그 '결과물'의 가치찬연함....
'무협지' 대신 '무협소설'이란 단어를 사용하라고 권장하고 요구하는 것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자부심이 있다면굳이 '무협' 꼬랑지에 '지'라는 가치폄훼(價値貶毁)적인 단어를 붙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유별나다고? 그렇다. 유별나다. 아니 유별나야한다. 그것이 '협'의 생존포인트인 것이다.
'협'이란 것이 발길에 채이는 돌맹이같이 평범하고 많다면 혈기린을 '약속'이라는 미명하의 굴레를 씌우지도 못했을 것이고 왕일도 자기 손으로의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왜? 손부자의 싸움이 진행중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2. 협은 인내를 요구한다.
'혈기린외전'을 풀어내는 도구는 독과 암기다. 왜 좌백님께서는 '협'을 이야기하는데있어서 '독'과 '암기'를 차용하셨을까?
'협'은 인내를 기반으로 한다. 자기 희생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성립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목숨이 희생되는 것에 개의치 않는 것, 자기의 공과를 내세우지 않는 것, 가시적인 이익이 아닌 관념적인 '명예'를 중요시 하는 것 등등 아니 이런 것들은 다 차치하고서라도 남의 일에 신경써 주는 것만 해도 요즘같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세태에서는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질 만하다.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한 인내가 요구되어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종래에는 '자기희생'에 대한 무덤덤함이 체화되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독'과 '암기'는 까다롭다. 종류도 많을 뿐더러 성분도 가지각색이다. 또 여러가지 조건을 요구한다. '달인(達人)'이 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 효용을 조금이나마 보기 위해서는 조건이 구비되기 까지의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필요에 딸라서는 고개도 숙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객기'를 부린다면 할 수 없겠지만.
따라서 왕일의 장점을 '끈기'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그 '끈기'는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 있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기재나 천재가 아닌 '문맹(文盲)'이라는 약점으로 대변되고 뜨거운 감정을 가진 불완전한 주인공이게에 더욱 매료되고 동화된 듯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내'를 '협'이라는 것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무슨일이든 '인내' 없이 '과실'을 기대할 순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혈기린외전'은
'협'을 빌린 인생의 훈도서(訓導書)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3. '협' 속의 자아
단순비교 하나 하겠다. 1,2,3,4권과 5,6권의 차이는? 두께의 차이에서 오는 묵직함 뿐만 아니라 4년이란 세월에서 오는 변화의 농익음이다. 1,2,3,4권의 초판 인쇄일은 1999년 6월, 그리고 5,6권의 초판 인쇄일은 개정판 인쇄일과 같은 2003년 6월. 4권까는 기존 출간분에 약간의 첨가가 이루어졌지만 5,6권은 이번에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4년간 무슨 일이 있었으며 또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좌백님의 '작가후기'에서 일설하신 '애초의 목적이라 할 '협객'보다 다른 것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어...'라는 구절에 주목하고 싶다. 4년이라는 세월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그러나 정보통신의 발달로 그 '4년'은 우리에게 예전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 왕일의 '왕일'이면서 '혈기린'인 묘한 혼재감, 그리고 정보통신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급 그리고 가상세계에서의 익명성과 아바타. 둘의 연관성에 접점을 찾고 싶다.
'통신무협'이라는 신조어처럼 독자로부터의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익명서으로 가장된 독자들 앞에 벌거벗겨진 채 내던져진 느낌이 들지 않을까. 왕일이었을 때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혈기린'일 때와는 틀려야 하듯, 현실에서의 자아와 가상공간에서의 또다른 자아는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 것이다. 거기에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으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거리낄 것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전무림인이 무림최고수이자 독공의 달인인 '혈기린'을 경외하듯이 말이다.
5,6권은 작가의 현실비판적 의도가 느껴진다. 너무 심오한가? 아니면 나만의 망상인가. 어쨌든 많은 걸 느끼게 해준 걸작임에 틀림없다.
<지엽론(枝葉論)>
1. '왼쪽'다운 설정??
'좌백'이란 필명의 뜻은 '왼쪽으로 자란 잣나무'이다. 바른(오른쪽)것에 익숙하지 않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겠다는 의지의 소산인 셈이다. 혈기린의 사부는 현무신군이다. 그리고 그 현무는 북을 상징하는 수호신이다. 그런데 혈기린은 남만에 은거한다. 남만이라는 지역 특성상 더운 기후와 갖가지 독충, 독물로 인한 설정으로 보여지나 좌백님처럼 한번 다르게 생각해보자. 학창시절 '세계전도'를 펴 놓고 누군가 얘기했던 거꾸로 놓고 살펴보라는 말. 북극이 아래로 가게 해서 보면 우리 한반도가 대양해국으로 뻗어난갈 전초기지가 아니겠는가. 그 상태로 옆으로 눈을 돌려 바라보자. 그렇다면 남이 북, 북이 남이 되어 혈기린이 전신뿌리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동서는 차치하고 생각해보면 말이다. 허무맹랑, 과대망상적 사고라고? 그래서 지엽아닌가? 가당치 않으면 가지치기 한번 해달라.
2. '단편소설'속 복선
'혈기린외전' 2권과 4권에 단편소설이 한편씩 있다. 진산님의 '백결검객'과 '고기만두'인데 내용을 떠나 귀착점이 일치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둘 다 무림계를 떠난다는 결말이다. 요즈음 진산님을 무협소설계에서 볼 수 없다. 대략 이 소설이 선을 보인 1999년 이후부터인 것 같다. 자기 앞일에 대한 예견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돌아와줘요, 진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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