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인류이래 최고의 무협소설 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실제로 무협소설을 단순한 흥미와 재미 위주에서 몇단계 끌어올린 가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김용이다.
전세계 2억이 넘는 매니아 독자 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버클리 대학을 비롯한 몇몇 유수의 명문대학교에서는 김용의 무협소설을 중국문학 교재로 채택할 정도라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다 아니할수 없다.
또, 그의 소설을 연구하는 김학(金學)이라는 학파가 존재하여 지금까지 발간된 <김학연구총서(金學硏究叢書)>만 해도 무려 18권에 이른다.
처음 녹정기를 접했을 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녹정기를 읽고 나서 나는 어느새 청나라 초기의 역사에 해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청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황제라는 강희제, 만국공신이자 강희제의 섭정대신의 한사람이었으나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오배, 청나라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망하게 한 오삼계, 반청복명의 밀지를 받는 천지회, 청나라의 북쪽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 러시아 까지....
그 모든 인물과 배경, 사건들이 김용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위소보와 어우러져 한편의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켰다.
<녹정기>를 사계에서는 무협소설이라기 보다, 역사소설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용의 다른 작품에서도 들어나 있긴 하지만, 이토록 역사와 밀접한 스토리를 지닌 소설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점은 바로 사불상(四不象)이라는 세 글자이다. 사불상이란 '비무비협(非武非俠), 역사역기(亦史亦奇)'를 말한다. 풀이하면 '무(武)도 아니고 협(俠)도 아니며 역사(亦史)이면서 기사(奇史)이기도 하다' 라는뜻이다.
주인공인 위소보는 애시당초 '의'와 '협'과는 거리가 멀다. 비무도중 상대의 눈에 모
래를 뿌려 눈을 상하게 하는가 하면,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 상대의 발등을 칼로 찍는다.
또,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개중에는 강간도 서슴치 않는다. 나중에 신룡교의 교주부인에게는 자신의 아이
를 임신하게 만들기 까지 하는 파렴치한이다.
그뿐인가! 무공의 수준은 삼류를 간신히 벗어나 적들이 나오면 7명의 부인들이 대신
싸워주기까지 하는, 정말로 무능력한 주인공이다.
키도 크지 않고, 코에는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어머니는 청루의 창기에 아버
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천하디 천한 태생이다.
김용이 이 녹정기를 1969년에 쓰기 시작해서 1972년에 마쳤다고 하니, 색다른 시도
하기를 즐겨하는 소위신무협 작가들조차 이런 주인공은 그리지 않을지언데, 하물며
저 30여년 전에야 말해 무엇하리~!
하지만 그럼에도 이 녹정기가 신필 김용의 가장 위대한 역작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첫째, 웅장한 스케일에 있다.
주인공인 위소보는 어찌어찌해서 거세도 하지 않은채 황궁에 태감, 즉 내시로 들어
가게 된다. 그곳에서 어린 황제인 강희제를 만나, 강희제의 충복이 된다. 또 한편으
로는 반청복명의 숙원을 지니고 있는 천지회의 수뇌 가운데 한명이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막측한 집단인 신룡회의 수뇌 가운데 한명이 되기도 한다.
비단 중국만이 아닌, 러시아도 등장한다. 러시아의 공주와 만나 그녀를 도와 러시아
의 반역을 해결한다.
둘째, 아슬아슬하면서도 재미있는 스토리 전개에 있다.
위소보는 강희제의 충복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강희제를 무찌르려는 천지회의 수뇌
이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위소보는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탄다. 실로 가슴이 두근
두근 거리는 일이 아닐수 없다.
신비한 집단인 신룡회에서도 위소보는 몇번의 죽음의 위기를 재지로 잘 넘긴다.
수많은 사건이 일어남에도 헷갈리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은 끊어지지 않는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머리속에 각인되어 그 인물이 그려질만큼 사실적이고 생동적이다.
실로신필의 경지가 아닐수 없다.
셋째, 파격적인 주인공에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위소보는 그간 무협소설에서 단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인물상이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단면은, 무공 익히기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위소보의 무공이 약한 것을 안 천지회의 회주인 진근남이 자신의 무공을 전수해주지만, 위소보는 몇번 하지도 않고 그것을 등한시한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발상인가! 몇몇 무협소설에서 처음에는 무공을 싫어하는 주인공을 만날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무공을 싫어하는 주인공은 위소보 뿐일 것이다.
흔하지 않은 동적인 주인공의 등장은 정형화된 주인공, 정형화된 줄거리에 식상해져있는 독자들에게 틀림없는 만족감을 줄 것이다.
...
녹정기는 실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협소설이라 할수 있다.
비록 사계에서는 녹정기를 역사소설로 보더라도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무협소설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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