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로맨스 코미디 영화 같은 꿈을 꾸었다.
우리집에 여자애가 한 며칠 지내다가 떠나게 되었다.
그 여자애도 나도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자기 가족들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는 척 가장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꾸몄던 것이다.
그런 연극을 벌이는 남녀가 둘 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나이라는 점, 그리고 그 연극을 여자애 집이 아니고 남자 쪽 집에서 벌인다는 점, 그러면 나는 목적을 달성하겠지만 여자애 쪽은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자기 식구들에게 알려 줄 수 있느냐 하는점 등등.... 여러 모로 엉성한 설정이었지만 꿈이란 게 원래 엉성한 거니까 그 부분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ㅡ
나는 현실의 나와는 달리 아주 명석한, 학생회장 타입의 남학생이었고, 여자애도 비슷하게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였다.
꿈꾸는 사람이 지난 며칠 동안 인스턴트 냉면이나 자장면 따위만 먹었던 탓에 뜨끈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는지 내 꿈에는 생선 매운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여동생에게 수저를 가져오라고 시킨 다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숟가락으로 내가 열심히 매운탕 국물을 떠먹고 있는데 여자애가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서더니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여자애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나는 여자애를 붙잡아 앉히고 나의 매너 없는 행동에 관한 해명을 하려 들었다.
밥상 위에 수저들이 얹혀 있는 것을 내가 못 봤었다, 그래서 수저를 가져오라고 시켰었다, 너에게 식사를 하라고 권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다.... 등등.(나중에라도 수저를 발견했으면 식사를 권했어야 하는데 어째서 계속 여동생이 수저를 가져오기를 기다렸고, 그러면서 나는 왜 혼자서 식사를 시작하였는가 하는 점은 내 꿈이 안고 있던 또 한 가지 허점이다.)
그런데 막상 얘기를 시작하자 내 '해명'은 엉뚱하게도 지난 며칠간의 동거에 대한 회고 형식을 띠게 되었다.
"널 처음 본 순간 난 널 부른 것을 후회하였어."
아, 이 절묘한 언어 감각을 보라!
얼핏 여자애의 첫 인상이 신통치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로 운을 뗀 나는 곧바로 반전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로 널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말야."
아직 결혼 적령기에도 이르지 않은 미성년자들 주제에 마치 결혼하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지친 30대 후반의 노총각, 노처녀처럼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는 척 가족들을 속이는 연극에 동원시키기에는 너무 해맑은 소녀에 대한 아첨, 그런 불순한 의도로 만나지 않았으면 어쩌면 싹텄을지도 모르는 진정한 애정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등을 담은 나의 언어 구사력에 보이지 않는 관중이 들리지 않는 감탄을 일제히 토했다.
소녀는 분명 내 말에 감동한 눈치였다.
그 뒤에도 나는 몇 마디 말을 더 하였지만 그건 지금 생각나지 않고ㅡ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소녀가 섭섭한 감정을 풀고 연극으로 시작된 관계가 진정한 사랑으로 접어드는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오줌이 마려워 꿈을 깨고 말았다.
무슨 꿈이 이 모양이람!
어째서 난 꿈을 꾸면서까지 언어를 가다듬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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