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내가 나한테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그림책들 중에서 '아빠와 함께 한 베니스 여행'을 읽고 나도 그만 베니스란 도시에 반해 버렸다.
이 담에 내가 '해리 포터' 같은 밀리언 셀러라도 하나 써내어 신나게 돈지랄을 부릴 수 있는 처지가 된다면 베니스 한 귀퉁이에 내 소유의 집을 하나 구입하여 잠깐 지나쳐 가는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그곳의 어엿한 주민의 자격으로 살아 보고 싶을 지경이다.
상상해 본다.
내가 사는 낡은 3층짜리 집은 그 고색 창연한 도시에서도 특히 오래 된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좁은 골목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맞은편 집 창과 내 방 창을 연결하는 빨래줄 위로 내가 빤 바지를 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이 좋겠다.
그래도 햇빛만은 방 깊숙이 쏟아지도록 남향 집이 좋겠고, 집 현관문을 열면 곧바로 찰랑거리는 수로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수퍼에 장 한번 보려고 해도 페달로 노를 젓는 수상 자전거를 이용해야 하고, 좀더 장거리의 나들이에는 그 유명한 배 택시를 불러야 할 것이다.
아니면 아예 내 소유의 곤돌라를 한 척 주문할까? 맞어! 난 개와 함께 하지 않으면 도대체 사는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노를 젓는 내 맞은편에 개를 앉힐 수 있는 2인승 곤돌라를 장만하는 편이 낫겠다.
하루에 외출 한번씩만 해도 운동량은 충분할 테니 건강에도 이롭겠지.
그 유서 깊은 도시 구석구석에 내 단골 빵집.꽃집.책방을 갖는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황홀하잖어.
매일 아침 운동을 겸한 수상 산책을 마치고 단골 카페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내 얼굴을 기억하는 웨이터가 날라다 주는 카푸치노를 홀짝이며 바쁘게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져 줘야지.
매년 장마철이면 운하가 넘쳐 1층 부엌까지 물이 들어와 넘실거리는 것도 스릴 있는 경험일 거야.
그러다가 문득 두고 온 고국 생각이 나면 그 성량 좋은 이탈리아 가수들 다 놔두고 김광석이나 전인권 노래를 틀어 놓고 먼하늘을 바라보며 향수에 잠겨 봐야지....
아니면, 프로방스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릴 적에 도데의 '월요 이야기'를 아동판으로 읽고 나서부터 난 그곳에서 살고 싶어했었다.
도데처럼 낡은 풍차 방앗간을 구입하여 주거용으로 개조했으면 싶다.
아침마다 내 침실 창 밖에서 법석을 떠는 새소리에 잠을 깨고,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 빵집에 가서 바케트를 사다가 정원에서 비발디를 들으며 아침 식사를 하고, 뒷마당의 텃밭에서 키우는 약용 식물들을 손보며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는 넓직한 나무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 놓고 소설을 쓰고....
그러다가 세 시가 되면 운동 삼아 다시 자전거를 끌고 마을 우체국에 다녀와야지.
우편물을 확인한 다음, 신문 한 장을 사서 단골 카페로 가서 뭔가 달콤한 것을 마시면서 읽어야지.
그러다가 발치에서 뚱순이가 칭얼거리면 ㅡ뚱순이가 누구냐고? 아, 난 개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라니까. 프랑스에서는 개 안 데리고 살겠어?ㅡ 내가 마시던 걸 녀석에게도 좀 나눠 줘야지.
그래야 녀석도 헐레벌떡 내 자전거를 뒤쫓아온 보람이 있을 것 아냐.
저녁은 소식으로 하는 것이 좋겠지? 대신에 아침을 좀 요란뻑적하게 먹고 말야.
어쨌건 어디서 뭘 하고 살건 간에 늦은 아침과 저녁, 그렇게 하루 두 끼가 나한테는 적합할 듯싶네.
그리고, 역시 어디서 뭘 하고 살건 간에 TV 따위는 보지 않도록 하자고.
헨델 아니면 비발디, 아무튼 바로크 음악을 들으면서 바슐라르를 읽다가 자는 거야.
프로방스에서는 일찍 자야 해. 그게 정상이야.
그것도 아니면ㅡ
아예 뉴욕의 마천루 한복판에서 살아 봐?
가장 높은 빌딩의 옥상 펜트하우스가 내 거처인 거야.
마치 진기한 회색 식물들처럼 길쭉길쭉하게 뻗은 고층 빌딩들을 발 아래 두고 사는 기분, 괜찮겠지?
빌딩 새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까마득한 지상의 개미떼 같은 차들의 행렬을 굽어보면서 블랙 커피를 마시는 거야.
그런데, 어떡하지? 난 블랙커피는 싫은데.
이런. 그것 하나 못 참어? 세련된 사람이 되려면 더러 역겨운 것도 마실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어떻게 사람이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사누.
또 아니면ㅡ
파리에서 한 일 년 살아 보는 것도 한번 경험해 볼 만한 일일 거야.
봄의 파리, 여름의 파리, 가을의 파리. 겨울의 파리. 비내리는 파리, 눈오는 파리, 새벽의 파리, 오전의 파리, 저녁의 파리. 파리의 밤, 밤의 센느와 아침의 센느....
인도에다 내 소유로 제법 고급스런 아파트 한 칸을 마련해 두는 건 어떨까?
인도 지리를 모르니 어떤 도시를 골라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도란 그 광활한 땅의 한복판에다 현대식 살림살이들을 두루 갖춘 아파트를 장만한 다음 인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숱한 유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거야.
그러니까 아파트는 그런 유적 탐방 중에 체력이 떨어지면 돌아가서 푹 쉴 수 있는 쾌적한 베이스 캠프인 셈이지.
그건 그렇고, 어디서 살건 바다 바깥에서 살 량이면 거기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ㅡ 자신 있어? 중 2때 이미 영어 과목을 포기했던 터에 말야.
그게 문제야. 이제부터라도 슬슬 그 문제에 대비를 해야 할 텐데, 내가 칠 히트의 규모를 아직 알지 못하니 앞에서 열거한 도시들 중에 어디에서 살게 될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 따라서 어느 나라 말을 공부해 둬야 할지 모른다는 것 말야.
그런데 집을 살 자금 생각은 해봤느냐고?
돈지랄을 떨려면 우선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알았어. 지금 글쓰러 갈께. 글쓰러 가면 될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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