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발 춘천행 입영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였을 때,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리라!'
고등학생 때 시간표에 교련 과목이 들어간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을 정도로 군대라는 곳을 끔찍해 하던 내게 있어 그 결심은 공연한 호들갑이 아니었다.
실제로 꼭 필요한 결심이었다.
나는 군대라는 곳을 증오하였고, 그런 내 기질에 비추어 볼 때 어지간한 극기 없이는 내 군생활이 결국 자살이나 탈영으로 마감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기차가 아직 낙동강을 건너기도 전에 벌써 나는 31개월인가 33개월인가 남아 있던 제대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짠밥 한 판을 비울 때마다 앞으로 몇 끼를 더 먹어야 군대를 벗어나게 되는지 헤아리는 일을 나는 단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내가 아직 훈련병이었을 때 박정희가 시해되었다.
영결식 실황 방송이 훈련소 스피커에서 최대의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온 산야를 찌렁찌렁 울리는 곡소리는 마치 산천초목들까지도 박정희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듯한 착각을 갖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대통령은 오로지 박정희 하나뿐이었다.
박정희란 이름은 고유명사라기보다 대통령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나 다름없었다.
그런 박정희가 죽었단다. 대통령 자리가 비었단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게 된단다....
그 경천동지할 사태 앞에서, 나는 그러나 놀라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요소들을 강제로 해체당하고 군바리로 재조립되는 시점에 있었다. 어떤 황당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는 자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는 내가 배속된 부대가 철책선 근무에 들어가게 되었다.
광주에서 무언가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는 듯한 소문이 들렸지만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신병이던 나는 거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전방지역까지 배달돼 오던 일간지들에 실린 사진들을 보아도 그저 '매우 격렬한 시위'라는 이상의 인상은 받지 못했다.
얼마나 시위를 격렬하게 하였으면 탱크가 다 동원되고 시위하던 사람들이 더러 죽기까지 하였담....
6개월 뒤, 철책선에서 내려와 다시 합쳐진 내무반에서 나는 중대에서 첫째 가는 고문관으로 자리잡게 됐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스스로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극도의 무능함을 나타내는 것이 나였으니까.
나는 본부중대 소속이었는데, 본부중대의 소임이란 것이 대대 내의 온갖 잡다한 뒷치닥거리를 도맡아 하며 나머지 중대들이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여건 조성을 하는 데 있는지라 중대원들 모두가 행정병이니 정훈병이니 통신병이니 하는 보직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둔한 점에서는 확고한 명성을 떨치던 나를 데려가려는 부처는 없었고, 나는 계급이 올라가도 뚜렷한 보직 하나 없이 여기저기 일손이 부족한 부처들마다 불려다니며 임시 조수 노릇, 위병소 말뚝 노릇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내 이런 무능함이 때로는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어디서 그런 결정들을 내리는 건지 몰라도 간혹 대대에서 사병 한둘을 차출하여 이런저런 교육들을 받게 하는 경우가 생기곤 하였는데, 그런 교육들의 대부분을 본부중대 선에서 처리하였고, 다른 중대원들은 모두 자기 부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꾼들인지라 빠지거나 말거나 표시도 나지 않는 나를 거기에 보내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외출 외박조차 일체 없던 그 전방 지역을 빠져나와 신기하게도 부대 담 너머로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다 보이는 원주 취사대에 취사 교육을 다녀왔는가 하면 화생방 교육이랍시고 휴양소 같은 곳에서 한 닷새 탱자탱자 놀며 지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사단 공병대에서 벽돌을 찍는 작업에 무려 석 달인가 넉 달인가 하는 기나긴 파견을 나가기도 하였다.
군대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반 이상이 일석 점호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침상가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머릿수만 맞으면 그냥 취침 지시가 떨어지던 그 공병대 시절은 참으로 군대 시절 중 내가 유일하게 즐겁게 회상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훈장이란 걸 받아 보았던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고, 계엄이 실시되고, 새 대통령이 오르고ㅡ 그런 위난의 시기 동안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킴으로써 국난 극복에 공헌하였다는 것인데, 신병들을 제외한 전 국군 장병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을 테니까 훈장치고는 퍽이나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훈장이었다.
하필 타부대에 파견 나와 있는 시기에 훈장이 수여된 탓에 우리가 자기 훈장을 진짜로 만져 보기까지는 자대 복귀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나는 자대에 돌아와서도 굳이 내 훈장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내 훈장을 보관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몰라도 그 역시 훈장을 가져가라고 챙겨 주지 않았다.
그 훈장을 내가 거부한 것은 전두환 정부에 대한 반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순전히 정부의 검열을 거친 정보들뿐이었으니까.
계엄군이 광주 여성의 젖통을 베어냈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황당하고 유치한 흑색 선전으로만 여겼었다.(사실은 지금도 그런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때 훈장이란 것 자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내게 훈장을 부여할 정도의 권위를 국가에 대해 나는 인정해 줄 수 없었다.
국가는 내가 싫어하는 옷을 내게 입히고 산골짜기에 처박아 놓고는 좆뱅이를 치게 만들 수는 있었으나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내가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도록 강요할 수는 없었다.
십여 년 전, 나는 우체국에서 일 년 남짓 근무한 적이 있다.
정식 직원이 아니라 임시 계약직이었는데, 어느 날 나를 정식 채용하겠다며 절차를 밟자고 우체국에서 제의해 왔다.
나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마침 다른 일자리가 생겨 우체국을 그만둘 참이었다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단지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임시직은 상관없다. 그건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정식으로 공무원이 되는 것은 내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원칙에 대한 배반에 속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군인이 싫었고 경찰이 싫었고 공무원이 싫었다.
요컨대 국가라는 것 자체를 싫어하였던 것이다.
이런 내가 요즘 어떤 사이트에서 걸핏하면 친일성 발언을 일삼는 사람과 마치 대한민국 대표라도 된 것처럼 싸우게 된 것은 심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ㅡ악마와 싸우는 사람은 악마를 닮아가게 마련이다...
이 말을 내가 어디서 들었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파시즘에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걱정스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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