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탄생부터 가라정부로써...
<< 당시 국제연합에서 승인한 정부를 가라라고 주장하는 의도가 뭔가요?(국제연합이 미국의 주구라는 제 3세계 식민지론을 들먹이신다면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최초 대통령이 된 이승만부터, 제대로된 투표로 선출되지 않았고,
<< 남한이 단독선거를 해서 정부를 세운 건 UN에서 권고한 남북한 총 투표를 소련에서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엔 이미 46년부터 소련 괴뢰정부가 출범하고 있었으니까요. 1공화국 출범당시 총유권자 960만 6870명 중 94.4%인 906만 7063명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출범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제로 당선되었고, 이를 밀어준 것은 현재 민주통합당의 뿌리인 한국민주당입니다.(이들은 이후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하면서 찢어졌고, 이후 이승만 진영에 남은 이들은 ‘자유당’을 출범시켰습니다.)
자유당 정권이 50~60년대 선거에서 깽판친 건 맞지만, 제헌국회와 초대 대통령 선거까지 싸잡아서 비난하시면 곤란합니다.
독립군 자금으로 미국 국토 대장정 원조교제하던 소시오패스가 -ㅅ-...)
<< 이건 경우에 따라서 명예훼손 수준까지 갈 일 입니다. 임정 내에서 이승만이 하와이 교민이 준 독립군 자금을 꿀꺼덕 했다는 주장도 있고, 훗날 영부인이 된 프랜세스카와 미국국토대장정이 아닌 국제연맹 총회가 열리던 유럽 도시에서 만나 교제를 한 건 사실이며, 이 서양 각시에 대해서 교민들이 큰 반발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조교제에 소시오패스 운운하는 건 비난을 넘어서 유언비어 수준입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 졸업한 것을 무기로 미국 상류 인사들과 친분이 높았고, 당시 한국의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맥아더는 일본)와도 친했습니다. 특히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하기 전에 이를 예견하는 책을 집필해서 미국내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그 책의 원고 타자로 쳐준 사람이 프랜세스카입니다. 이승만이 답례로 마누라에게 정장 한 벌 사줬고, 이건 프랜세스카가 며느리에게까지 물려줬습니다. 현재는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지요.
대통령 되고 나서 행적이 더럽다고 독립 운동 경력까지 말소하는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대갈과 노물통에게 비자금 받고, 아들네미들 돈 받아 먹은 사실을 부각해서 썩은 야권 정치가로 폄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국민들의 하나된 염원으로 당선된 전직 독립군제거반, 간도특설대 출신 대통령^^;)
<< 박정희의 만주군 복무 행적은 뒤지면 서류도 나오고, 그 때문에 혈서론도 부각되었습니다만, 간도특설대는 신빙성이 적습니다.
MBC와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측에서 박정희 간도특설대 복무설의 근거로 삼은 것은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 결전편’에 단 몇 줄 실린 차상훈의 증언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 기자 정운현은 몸소 이를 보강 연구하기 위해 일본과 연변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물증 확보에 실패한 후 ‘근거없음’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연변 사학자 박창욱은 그의 제자들과 같이 박정희의 근무지와 간도특설대 전임자들을 대상으로 집중 조사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간도특설대가 아닌 만주군 복무로도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만, 당시 만주군의 주요 상대는 팔로군이었습니다. 물론 팔로군 내에도 조선인이 다수 있었고, 이들은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팔로군의 항일 전적을 놓고 이들이 독립활동을 했다고 일반적으로 결정내리는 것도 곤란합니다. 팔로군은 기본적으로 중국공산당의 군대였습니다. 중화민국 장개석이 광복군 지원을 핑계로 작전권 이양을 주장할 때 광복군에서 거부했던 태도와 차이가 있습니다. 거기다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팔로군도 조선인 부락을 공격하고 약탈한 사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해방 후에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창설에 앞장섰고, 625때도 선봉에 섭니다. 덕분에 그나마 국군내에 고위직에 있던 광복군 출신들이 많이 죽었고, 숙군연류자로 분류되어 군에서 퇴출 일보 직전이던 박정희가 기사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죠.
박정희도 비리로 얼룩진 3선을 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90퍼센트의 지지율로 당선되었죠^^
(지구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는 득표율..
<< 유신헌법 당시에 제정 국민투표가 92.9%의 투표율에 91.5%의 찬성률을 보였습니다. 1975년 2월12일에 실시된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도 투표률 79.8%에 찬성률 73.1%라며 유신헌법에 정당성을 선전했지요.
독재의 부정이 분명합니다. 계엄을 선포하였고, 이와 동시에 국회를 해산시키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더구나 이시기 남베트남이 망하면서 ‘유신에 찬성하지 않으면 적화된다'는 선전도 꽤 심했습니다.(그래서 저는 선거때 마다 OO 안 찍으면 북한이랑 전쟁남...이라는 선전도 매우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전의 3선이 모두 비리로 얼룩졌냐고 하면, 또 그리 단정하기도 힘듭니다. 유신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나 김대중 후보와 꽤 박빙을 보였거든요. 63년 선거에선 윤보선과 15만표 차이였고, 67년 선거에선 116만표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이 시기는 농촌에서 박정희 지지표가 많이 나왔고, 전라도에서도 지지율이 꽤 높았습니다.)
이 시기부터 장기 독재할 생각을 했다면 당선 차이가 이렇게 조마조마 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마 유신때처럼 일방적으로 흘렀겠지요. 거기다 부정선거로 자유당 독재가 박살난 걸 봤던 군사정권이 심각한 무리수를 뒀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전두환도 마찬가지 체육관 투표로 가라 당선...
(이사람, 참모총장 묶어놓고 초유의 반란을 일으켰죠.)
그 ‘빌어먹을’ 대통령 간선제의 저주를 끊어낸 계기가 바로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 사실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도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고 간선제를 주장했습니다. 물론 내각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박정희의 유신이나 전대갈의 체육관 투표와는 차이가 있지요. 다만 광주 민주 항쟁은 간선제 청산 때문이 아니라 전대갈이 당시 야권 핵심 인사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투옥한 데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리고 국내 신문, 뉴스, 라디오 매체는 일제히 침묵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국가 통제력입니까? 무려 ‘삼천여명’ 이 죽어도 옆 동네에서도 모르는 엄청난 통제력!)
그러나, 당시 외신의 기자들의 의해, 사건은 일파만파 해외로 번집니다.
<< 당시 광주 민주 항쟁 취재를 했던 국내 기자로 ‘조갑제'가 있습니다. 모두들 치를 떨지 마지 않는 그 수꼴양반이 맞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대표적인 박까였고, 독재와 싸우는 양심적인 언론인이었으나......
HOST님의 글을 보면 30여년 전 독재정치가 그리운 사람들을 비판할 목적으로 쓴 것 같은데, 그 사람들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 번 살펴보시죠.
그들은 해방둥이였고, 전쟁세대였으며 학생시절 419에 참여하고 이후 산업화의 역군으로 활약하고 80년대 대학생들과 더불어 민주화에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독재 반대 시위를 했던 사람들이나 박정희 죽었다고 우르르 나와서 울던 사람들이나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특정 정치 집단의 논리에 따라 때로는 세뇌당한 수구꼴통으로, 민주화의 선봉대로 대접받을 뿐이죠.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보아왔고, 그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선택에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습니다.
허나,
자신의 정치적 사고와 다르다고 그들을 폄하하고, 편협한 역사적 지식이나 유언비어로 일방적으로 모독하는 것은, 자기네와 생각이 다르다고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때려잡던 독재시대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는 행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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