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을 보니 저를 성토하는 분이 많더군요. 심지어 Y가 제게 어장관리를 하고 있다면, 저는 S에게 어장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도 계시고요. 제가 당하면 당했지, 설마 남에게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행동이 어장관리였기에, 생각보다 신선한 관점으로 느껴지더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제 행동이 그간 제가 연애질한답시고 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녀석들의 모습, 제가 봐도 짜증스러웠던 모습과 똑같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사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다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제 대인 관계가 엄청 약하다는 것이죠. 5월 말에서 6월 초 동안 Y 뒤를 쫓아다니면서 제가 그토록 온갖 삽질과 뻘짓을 저질렀던 게 다 저것 때문이었지요. 딱히 한 눈에 나타나는 매력이 없으니, 일단 접촉 시간이라도 늘려서 뭔가 보여줄 기회라도 만들어보자는 순진한 생각 때문에, 들키면 쫑이라는 위험을 알면서도 그 스토킹 가까운 짓거리를 반복했던 겁니다. 그 외에는 딱히 여자애와 친분 쌓는 방법을 알아낼 수가 없었거든요. 덕분에 동아리 MT에서도 캐삽질을 반복하고 나서는 우울증에 자살 충동에까지 시달렸지요. 그나마 MT에서 친해진 누나가 힘을 좀 북돋아주셔서 방학 내내 대인 관계의 외연을 넓히고 동아리 사람들과 친목을 도모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제가 좀 변했다고 말하더군요.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던 애가 요새 얼굴이 좀 폈다고요. 물론 억지로라도 이전보다 더 많이 웃고, 좀 오글거린다 싶을 정도로 친절한 말과 매너를 베풀려고 애쓰고, 동아리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많이 변했긴 했지요.
하지만 속은 전혀 변하지 않았단 게 문제죠. 시도는 많이 했는데, 성과가 얼마 없더군요. 남자들과는 안면을 좀 많이 트기는 했습니다. 한데 여자애들과는...그리 많이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친해진 건 11학번 여자애들 세 명 정도?? 10학번 동기로는 S가 거의 유일했고, 약간 말문이 좀 트인 애로 S 친구 한 명이 또 있는데 걔랑은 그렇게까지 많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방학 초에는 감히 상상이라도 하는 게 불손하다고 스스로 여기었던 여자 친구가 생겼으니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생각도 들지만... 준비가 안 된 채로 막상 고백을 받는 상황에 마주치니 당혹스럽기만 했지요.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제 연애담(...)을 정담에만 올리는 게 아닙니다. 일단 동기 중에 제일 친한 친구 A에게는 정담에 밝힌 것 이상으로 다 밝혀놓았고, 학교와 관련 없는 지인 형님에게도 적당히 익명 처리를 해서 밝혔지요. 몇몇 분들이 제가 시시콜콜한 일까지 일일이 공개된 장소에 올리는 게 거북하다고 하셨지만, 저는 지금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굉장히 절박한 입장이기 때문에 다른 때라면 쉽게 밝히지 못했을 일상사를 전부 다 적는 것입니다. 제가 겪은 경험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제 가치관과 됨됨이에 의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는데, 이 됨됨이 자체를 바꾸려다보니 상황의 맥락을 전부 밝히지 않으면 필요한 결과를 얻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S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 이걸 받아들이는 게 좋은지 나쁜지의 여부를 계속 묻고 다녔던 게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지식과 경험의 부족 때문에 제 스스로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외부의 조력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애당초 인터넷으로 글 올리고 조언 받아서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그만큼 제가 도움은 필요한데 지원을 받을 만한 출처가 적다는 겁니다.
S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걸 왜 망설였는지 아시겠지요? 저는 제가 지금 심리적으로 굉장히 약하고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S의 남자 친구 노릇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S의 고백을 거절하면, 가뜩이나 없는 이성 친구 중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동기 친구인 S가 '안녕, 또 안녕~'을 할 거란 말입니다. 즉, 스스로 자신감이 많이 결여된 상태에서 친구는 잃고 싶지 않은데, 주변에 좀 알 만한 사람들이 다 고백 받는 게 최선이라고 말들을 하니 조언을 그대로 따라서 받아들였지요. 일단 사귀고 나면 더 많이 변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막상 시도를 해보니 예상과 달리 Y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겁니다! 단순히 두근거리는 정도를 넘어서 S랑 Y랑 같이 만날 때에는 티가 너무 날 정도인 거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일단 시행착오를 해보라고 하죠? 말 그대로 '시행’을 했는데 '착오’가 발생했어요! 근데 이건 Save&Load가 가능한 싱글 게임이 아니라, 정찰 못한 상태에서 올인 러쉬를 했더니 병력이 다 녹아 GG를 칠 수밖에 없는 배틀넷 같은 상황이란 말입니다!
일단 제게 가장 좋은 건 Y의 연인화(化)랑 S의 친구화인데, Y의 연인화를 시도하면 친구 S를 잃어버리고, 친구 S를 붙잡자니 Y를 무시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게다가, 확언할 수는 없지만, Y는 제게 어장관리를 시도하는 듯하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있고! 기왕 Y는 가능성이 적으니 S에게나 집중하는 게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게 꼭 왼팔 혹은 오른팔을 잘라야 하는 상황 같더군요. 근데 여러분은 왼팔보다 오른팔 자주 쓴다고 왼팔 자르는 걸 선뜻 택하실 수 있습니까? 목숨이 간당간당 하더라도요? 물론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항상 쉽습니다. 괴수 영화 보면 도망치면 살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상황에서도 멍청하게 벌벌 떨다가 잡아먹혀 죽는 인물들 나오죠. TV 앞에서 인물들 멍청하다고 욕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프리카 같은 데서 탐험하다가 사자 아가리를 마주치면 마찬가지로 오금이 굳게 마련이지요.
결국 이런 상황 자체가 도출된 게 제 부족한 경험과 과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니 우울증이 더 가속화되더군요. 정신과 치료는 여전히 받고 있지만, 그나마 좀 줄었던 신경안정제 복용량이 요새 또 늘었습니다. 찌질해 보인다면 뭐 별 수 없겠지요. 그 찌질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백방으로 노력했는데, 제기랄, 오히려 그 노력 때문에 더 찌질해 보인다니 별 수 있겠습니까? 옆에 있으면 한 대 후려치고 싶다고 말씀하신다면 김상용 시인처럼 그냥 웃지요. :)
뭐, 그래서 오늘도 아주 우거지상을 한 채 학교에 갔습니다. 점심 식사는 S랑 같이 했는데, S야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묻지요. 별 일 아니라고 대답하기에는 진짜 별 일 맞기에,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일이 너무 복잡하여 지금 말하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대답하다보니 우째 답안이 개그스럽게 되어서 S도 별 말 안 하고 넘어가더군요.
오후에 동아리 교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제가 속한 동아리가 신앙 공동체인데, 30~40대의 신학 수련을 받으신 교사님들이 상주하고 계십니다. 교리 교육과 학생 지도를 맡고 계시지요. 제가 우울증 시달리는 건 단순히 연애와 대인 관계뿐 아니고, 신학적인 내용과 사회윤리적인 문제도 좀 있거든요. 그것에 대해서 장장 4시간에 걸쳐서 주저리주저리 상담을 하고 마지막에 Y와 S 문제를 덧붙였습니다. 제게 상담해주는 동기 친구 녀석은 교사님들에게 이 얘기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만, 하도 상황이 뭣 같아서 그냥 얘기했습니다. 이 교사님은 20대 후반으로 우리와 별 차이가 안 나는데다, 아직 미혼으로 옆 학교 교사님과 교제 중이라 얘기할 만한 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비밀연애요? ....ㅜㅜ 젠장
교사님이야 묵묵히 다 들어주시고는 이리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처한 상황과 여건이 많이 복잡해서 어떻게 선택하라고 권하기는 어렵고, 다만 S를 최대한 상처주지 않는 것만 최고 1순위로 정하고 나머지 선택을 그것에 맞추라고 하시더군요. 오오. 실로 옳은 말씀이라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왔습니다.
끝나고 나서 S랑 같이 집에 돌아가는데, 그나마 우거지상이 약간 펴지니까 뭔 일이냐고 또 묻더군요. 그래서 대강 교사님이랑 상담한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물론 Y랑 S에 대한 것은 쏙 빼고, 기타 여러 가지 고민거리에 대해서 상담했던 것만 얘기를 했지요. S가 참 착하기는 하더군요. S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예술대학 소속이고, 대입도 예능특기전형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뭔가 학술적인 얘기에는 약합니다. 최대한 간략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전문적인 신학 내용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는데,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열심히 경청해주는 게 고맙더군요.
아무튼 뭐, 그래도 근래의 고민거리나 힘든 일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S도 자기 얘기를 털어놓더군요. 기대했던 것보다 재능이 부족한 것 같다, 학과 분위기가 체육학과 못지않게 권위적이어서 힘들다든지... 특히, 학과 분위기는 근래에 S가 많이 힘든지 얘기하면서 약간 눈가가 촉촉해지더군요. 이래저래 해서
이러저러하다보니 얘기가 길어져서 도중에 헤어져야 할 때가 왔는데, 그냥 내릴 역에서 안 내리고 쭉 갔습니다. 걍 S네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지요. 저랑 S랑 집이 정반대 방향인데다가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서울 서쪽 끝과 동쪽 끝....) 보통 지하철역 즈음에서 헤어졌는데, 오늘은 늦은 귀가를 감수하고 바래다주기로 했지요. 괜찮다고 처음에는 떠밀던 애도 제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 약간 좋아하는 기색이 보이더군요. -ㅅ-; 진즉 했어야 했습니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생각한 건데, 역시 이 아이를 상처주기는 싫더군요. 싫은 게 아니라 불가능했습니다. 어퍼컷이 아니라 배에 총탄이 박히더라도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더군요.
진짜 무슨 용기와 간덩이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S네 아파트에 도착해서 S가 막 손 흔들며 보내려고 하던 순간에 말입니다. 그냥 한 번 꼭 껴안아줬습니다. 그냥요. 얘가 인사하고 보내려고 정면에 서서 살짝 양 팔을 들었는데, 그 타이밍을 칼같이 찔러서 한 번 꼭 끌어안았는데요. 애가 반응이 참 빠르더군요. 살짝 비명 소리 약한 거 나오다가 얘도 바로 받아서 안아주던데.
사실 위 문단을 먼저 쓰고, 그 위의 내용을 나중에 썼거든요? 왜냐하면 저 껴안았을 당시에는 '몸이 참 작은 게 껴안기 좋구나. -ㅅ-' 하는 생각만 들었는데 그 다음에 했던 행동을 어떻게 묘사해야 적절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젠장. 앞선 내용을 먼저 쓰다보면 그새 심상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안 떠오르더군요. ㅡㅡ; 머릿속이 새하얬다고 해야 하나? 뭔가 색상이나 이미지로 떠오르진 않았습니다. 뭐 주변 풍경이 멈춘 것 같다, 그딴 거 없어요. 그냥 촉각 외의 나머지 감각이나 인지 기관들은 전부 단체 파업 중이었지요. 말 그대로 無,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 하나... -_-;
글이 좀 횡설수설했는데, 뭔가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면 말이 많아지고 글이 길어지는 게 제 습성이라 그렇습니다. 사실, 어제 너무 시시콜콜 적는다는 댓글을 보아서 길게 안 적으려고 했는데 아직도 머리가 얼떨떨하다보니 생각을 통제하기가 어렵네요.;; 머리 식히는 데 좋을 것 같아서 알콜 음료(...)를 한 사발 들이켜 봤는데, 빈속에 들이부어서 그런지 별로 도수 적은 술에도 한 방에 훅 가네요. 특히 술 취하면 말 엄청 길게 하는 게 제 술버릇인데,
아, 근데 누가 쓴 표현이던가? 액정필름 맛은 안 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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