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제껏 보아왔던 광고 중에 비비안이나 비너스 같은 속옷 선전 빼고 제일 인상 깊었던 광고는 심혜진이 등장했던 코카콜라 광고였다. 전지현이 볼륨 있는 몸매를 과시하면서 육감적인 테크노댄스를 추던 삼성 마이젯 CF는 심혜진의 코카콜라 광고에 비하면 김 빠진 콜라에 불과하다고 감히 단언하겠다. 파릇하고 앙증맞은 시절의 심혜진이 남자친구 등에 활짝 올라타는 추억의 코카콜라 CF의 동영상 소스를 보관하고 계신 분께서는 댓글에 URL주소 남겨주시라. 후사하지 않겠다.
심혜진의 콜라 선전처럼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광고가 있다. 탤런트 전광렬이 CF모델로 출연하는 동부화재 프로미(Promy) 광고다. '차보다 사람이 먼저죠'란 광고카피는 이유 없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가슴이 따뜻한 CF라고 할까. 나중에 자동차 구입하면 동부화재 자동차보험에 가입하겠다고 약속하는 바이다. 언제 면허 취득해 자가용 굴릴지 구체적인 시기는 저울질하지 못하겠다.
동부화재 모기업 동부그룹은 썩 평판이 좋은 회사는 아니다. 각종 비자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약방의 감초로 항상 빼놓지 않고 고개를 내민다. 차보다 사람이 먼저라도 사람 범주에서 돈 밝히는 썩은 정치 자영업자들은 부디 제외해주시기 바란다.
세상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에누리없이 파악하고 싶으신가. 그럼 CF가 속삭이는 달콤한 메시지의 정반대로만 해석하시라. 대한민국은 사람보다 차가 먼저다. 우리가 차보다 사람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면 동부화재 프로미 광고는 아예 기획단계에서 백지화됐을 게다.
한국에는 그 귀하다는 차보다도 먼저인 소수의 잘나신 분들이 계시다. 바로 기업인들이다. 사람 위에 차 있고, 차 위에 기업인 있는 셈이다. 얼마나 잘났으면 탄핵의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대통령마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사자후를 토하겠는가.
대한민국 국시가 통일이냐 반공이냐는 논쟁은 이미 공허하고 진부해졌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지 오래다. 여야 지도자들마다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 보수언론 사설란의 단골 레퍼토리 또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 가계대출 위주의 소매금융이 전문이었던 시중은행의 지하철역 광고판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구가 씌어져있다. 수중에 기업 한두 개 소유하지 못하면 팔불출로 찍히게 생겼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로 개정하지 않는 것에 감지덕지해야할 지경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의 당위성에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기업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열심히 살겠다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어깃장을 놓아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척박한 시장환경에서 기업을 운영해 고용을 창출하고 국부를 증대하는 경영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야 한다. 입만 나불거리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떠받들어봐야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쌀뜨물은 잉크보다 진하다. 인간은 밥만으로 생활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밥 없이 생존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허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욕과 목표가 '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로 변질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재벌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살짝 방향을 틀면 상황은 속된 말로 더욱 골 때리게 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편법과 불법과 탈법을 무리하게 일삼지 않아도 부지런히 기술개발하고 성실히 영업 뛰면 돈 버는 체제다.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방해하는 과도한 규제들은 조속히 혁파되어야 한다. 기업 등 쳐서 한몫 쥐려는 부패한 공무원들은 남김없이 숙정돼야 옳다. 회사 들어가 신기술 연구하는 기술자들과 해외시장 개척하는 세일즈맨의 몸값이 금값이 되는 풍토와 분위기를 조성해야 마땅하다.
작금에 전개되고 있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캠페인은 표면에 내세운 모토와 이면에서 진행중인 실질이 너무나 천양지차다. 실상은 기업, 정확히 재벌기업들에게 백지수표를 달라는 것이다. 재벌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용서가 되게끔 정부가 보증하고 국민이 이서한 면죄부성 백지위임장을 써달라는 꼼수다. 재벌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투자도 안하고 구조조정 핑계로 일자리도 줄이겠다는 빼째라식 대국민 협박이다.
노동자만 파업과 태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주들도 스트라이크와 사보타지를 수행한다. 머리띠 두르지 않고 구호만 외치지 않을 뿐이다. 설비투자 외면과 신규고용 기피가 기업주들의 파업수단이자 태업전술이다. 투자가 위축되고 실직자가 증가하면 국민들은 즉자적으로 기업이 아닌 정부를 원망하기 마련이다. 지하철 노조가 쟁의행위의 일환으로 준법운행에 착수하면 성질 급한 덜 떨어진 승객들이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역무원 멱살 붙잡는 이치와 동일하다.
기업은 사회유기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기업, 특히 재벌오너들만 거주하는 나라가 아니다. 기업인들 이외에도 사회를 지탱하는데 이바지하는 구성원들은 무수히 많다. 내 되물어보겠다. 산술적으로 따져보자. 기업하기 힘들다고 푸념 늘어놓는 기업주들이 전국민의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17대 총선 자민련 정당득표율 넘어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기업인들의 의견만큼 터무니없이 과대하게 과잉대표된 여론도 드물다. 기업주들이 대다수인 광고주들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이해관계는 광고수입으로 먹고사는 신문과 방송의 공론화 기능을 거쳐 보편적인 국가적 아젠다로 확대재생산되는 경향이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 관해서는 기왕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다. 단지, 기업하기 좋은 여건에도 한계와 예외가 있음을 유념하자.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달라며 재벌들이 막무가내로 떼쓰는 사항들 그냥 덥석 들어줬다가는 나라 말아먹기 십상이다. 재벌들이 건의한 부동산대책을 채택했다가는 강남지역 아파트 한채값이 강북의 10층 짜리 빌딩가격에 필적할 것이다. 환경관련 규제들을 느슨하게 해달란다. 부유한 기업인들이야 수시로 산자수명한 해외 유명 휴양지에서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만끽하며 웰빙하면 그만이지만 서민대중은 프랑스제 샘물과 일본제 심층수 사먹을 여유 없다. 교육을 시장논리에 맡겨달란다. 자본가들은 달러 펑펑 써가며 자식새끼들 원정출산에 조기유학 마다 않지만 서민들은 애들 보습학원비만으로도 허리가 휘청댄다. 비정규직 보호는 노동유연성 제고에 제약을 가한단다. 당신들은 숨겨놓은 재산으로 회사 망해도 호의호식하지만 수백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파리목숨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류하지 않겠다. 다만, 기업다운 기업을 하라. 공익을 희생시켜 사익을 추구하지 말라. 리베이트와 커미션이 아닌 제품의 품질과 상품의 브랜드로 승부를 걸라. 세금 포탈해 비자금 운용할 수작은 애초에 집어치워라. 잘되면 사장덕, 안되면 직원탓이라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마인드를 버려라. 상생의 정신을 키워라. 종업원들이 회사의 고통을 분담했다면 당신도 종업원들의 고통을 나누어져라. 치열하지만 반드시 공정하게 경쟁해라. 사회와 공동체를 생각하라. 사회는 물이고 기업은 고기다. 고기 없는 물은 있어도, 물 없는 고기는 없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달라며 가장 먼저 외치는 것이 상속세 철폐다. 무능한 2세들에게 부를 대물림하자는 속셈이다. 참으로 웃기는 짬뽕들이다. 빌 게이츠나 잭 웰치가 제 혈육에게 부를 세습 못해서 마이크로 소프트나 제너럴 일렉트릭을 세계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나. 이재용 너 찔리는 거 없니. 우리나라 재벌들 하는 꼴 보면 일 못하는 목수가 연장 원망한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
'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는 정경유착이 판치고 로비력과 연줄이 회사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후진적 경제시스템에 빠져 자멸하기 일쑤다. 기업하기 나빠서 IMF가 초래된 것은 아니었다. 방종하게 까부는 재벌들의 고삐를 잡지 못해 나라경제가 결딴났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로 착각하니 과거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비자금을 헌납했던 삼성과 LG가 이회창 측근 서정우에게도 뭔가 얻어먹자고 차떼기와 책떼기로 대선자금을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 바이러스가 검찰에도 전염되었나. 이건희와 구본무는 죄가 없단다. 억울한 희생양이란다. 구본무와 이건희, 티 나게 표정관리 하지 마라. 건희와 본무는 좋겠다. 태평로 삼성본관과 여의도 쌍둥이 빌딩에 누구처럼 LPG통 갖다놓고 결사항전할 필요 없어서.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은 기업의 본분이 부의 사회환원이라는 교과서 내용 때문에 한국경제가 어렵다고 엄살을 부렸다. 사회환원 안하고 돈 버는 방법 있다. 도둑질이다. 박회장은 당장 회사 때려치우고 도둑질에 나서시라. 박회장 주변에서 부의 사회환원 주장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달라고 앙앙거리는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평균적 의식수준과 윤리적 감수성이 이렇다. 도둑질과 기업질을 구분조차 못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필히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는 곤란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못지 않게 노동자하기 좋은 나라, 농민하기 좋은 나라, 노점상하기 좋은 나라, 학생하기 좋은 나라, 주부하기 좋은 나라를 실현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비정규직 해도 살만한 나라, 장애인이어도 불편하지 않은 나라, 내집 없어도 안심되는 나라, 애들 과외시키지 않아도 공부 잘하는 나라, 서민대중도 발뻗고 자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로 둔갑시키려는 재벌총수들과 그 똘마니들에게 엄중히 충고하는 바이다. 사기도 적당히 치시라. 벌써 나한테 꼬리 밟혔잖아.
- 공희준([email protected])
출처: 미디어몹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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