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까지의 단계로 마법을 나누고, 이를 레벨에 따라 나눠 쓰는 방식의 마법 체계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아마 대부분 여기에 대한 답은 알고 계실겁니다.
이는 최초의 TRPG 룰인 ‘던전 앤 드래곤(D&D)’에 등장한 체계로, 마법사(당시 용어로는 ‘매직 유저’)가 레벨업을 함에 따라 좀 더 상위 단계의 마법에 접근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죠.
D&D에서는 마법을 ‘레벨’로 나눕니다. 캐릭터 수준도 ‘레벨’로 부르고, 마법 단계도 ‘레벨’로 말하니 “10레벨 마법사의 2레벨 마법 사용 횟수는 몇개인가?”같은 조금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아마도 이 때문에 ‘클래스’니 ‘서클’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D&D와 그에서 시작된 소드월드에서는 전부 ‘레벨’을 사용합니다. 마법을 클래스로 구분하는 것은 어디서 온 거지? 애초에 D&D에서 ‘클래스’는 캐릭터의 직업을 말하는 용언데...).
그런데 이 D&D에서 레벨제 마법, 그리고 D&D 마법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메모라이즈’를 차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재밌게도 “마법사를 약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D&D 개발자인 게리 갸이각스는 자신의 미니어처 워 게임(채인메일)의 룰을 소규모 파티 운영의 모험물로 개조하면서 ‘캐릭터 성장’이란 개념을 도입합니다. 모험을 거쳐가며 점점 강해지는 캐릭터.
이에 따라 “투석기 룰을 고쳐서 파이어볼을, 대포 룰을 고쳐서 라이트닝 볼트를” 하는 식으로 재한된 마법만을 사용하던 마법사 또한, 성장에 따라 더욱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 했지요.
또한 ‘탐험’이란 여러가지 위험에 대처하여 각종 유용한 보조마법 등도 익히게 됩니다. 이에 따라 마법사가 마법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늘어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게리 갸이각스는 마법사가 ‘마법’을 ‘자원’으로서 관리하게끔 시스템을 설계합니다.
비슷한 수준의 마법을 같은 ‘레벨’ 안에 묶고, 해당 레벨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수준이 된 마법사는 따로 마법서를 찾아 그 마법을 배워야 합니다(마법 습득의 제한). 그뿐만 아니라 마법사는 자신의 수준에 따라 각 레벨별로 하루에 사용 할 수 있는 마법의 횟수가 정해져 있고, 이를 아침에 준비하고 한 번 쓰면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사용하죠(마법 사용의 제한).
즉 마법사는 “자신이 사용 가능한 마법 중, 오늘 필요한 마법이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실제로 머리를 쓰며, 마법의 응용을 고민하는 플레이”를 할 의무가 생긴 샘입니다.
초기에 게리 갸이각스 또한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매직 포인트(MP)’와 같은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합니다만
1. 종이와 팬으로만 플레이하던 당시 상황 상, 숫자 계산을 하는 것이 매우 번거롭다.
2. 마법사가 MP 한도 내에서 자신이 아는 마법을 모두 쓸 수 있다면, 이는 마법사가 만능이 될 수 있다.
는 이유로, 잭 밴스의 ‘다잉 어스’라는 소설에서 사용된 ‘마법을 기억하고, 이를 쓰면 잊어버린다’라는 방식으 차용하죠. 이 때문에 D&D의 ‘1회성 기억-망각’ 방식의 마법은 ‘밴스식 마법 체계’라고 불립니다.
하여간 이 ‘레벨별 마법’은 게임의 벨런스와 운용 편의를 위한 개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게 “강자와 약자의 확실한 수준 구별, 성장의 명확한 표현”이라는 한국인 구미에 맞아서 정착되어버렸고.
그와 별개로, 초기 한국 판타지에서 흔히 쓰였던 ‘러너-익스퍼트-마스터’의 구분은 확실히 ‘드래곤 라자’에서 온 겁니다. 마법사의 수준을 말할 때 “1클래스 마스터, 2클래스 익스퍼트, 3클래스 러너입니다” 식으로, 각 클래스의 마법을 어느정도로 통달했는지에 따라 수준을 말했죠. 이 방식은 후에 소드 익스퍼트(혹은 오러 유저)-소드 마스터의 ‘검사의 수준’을 칭하는 용어에도 영향을 줍니다.
하여간 D&D에서는 저 ‘클래스 마스터’라는 개념이 있을수가 없는게... D&D의 마법사는 마법 주문을 머릿속에 전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서에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마법서는 페이지 재한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룰북이 새로 발매될 때 마다 그 룰북에 맞는 추가 마법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게임 특성상, ‘그 클래스의 모든 마법을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비효율적이기도 하죠.
물론 모덴카이넨이나 엘민스터 등 쩌는 NPC 마법사들은 “이 캐릭터는 룰북에 있는 모든 마법을 알고 있고, 새로 나온 마법도 어떻게든 알아내서 배워요!”라고 되어 있는 애들도 있지만요.
그 외 한가지 더 잡설을 하자면, 한국 판타지식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카르세아린의 조합. D&D의 드래곤은 최대 수명은 확실치 않으나 1000년 경이면 거의 최종 단계(그레이트 웜 혹은 에인션트)에 접어듭니다. 카르세아린은 이를 1만년으로 늘리고 ‘유희’라는 개념을 도입했죠... 솔직히 1만년 설정은 조금 무리수라고 생각하는게,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의 지구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죠(...).
드래곤의 부산물이 엄청나게 가치있는 물체가 된 것도 카르세아린의 영향이 아닌가 싶은데... 드래곤 하트 개념은 따로 원본이 있다고 들은 적은 있습니다. D&D에서 드래곤 부산물은 비늘과 뿔 등이죠.
뭐 하여간, 한판소 설정들은 제대로 된 원본에 대한 정보가 원본에 대한 접근 없이 퍼져나가 짬뽕이 되어가며 발전했죠. 옛날 판타지 소설 연재처(판타지 월드, 삼룡넷, 레드드래곤 등등)에는 소드월드나 D&D, 판타지 라이브러리 시리즈 등에서 발췌한 몬스터 정보, 레벨별 마법, 무기 정보 같은게 출처 없이 떠돌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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