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김대산
작품명 : 몽상가
출판사 : -
김대산 작가의 작품을 마주한 것이 이번으로 세 번째다. 처음이 <금강부동신법>이었고, 그 뒤가 <잡조행>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이 둘을 읽고는 다시는 그의 작품을 보지 않겠노라 마음 먹었었다.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둘 모두 나름의 장점을 지녔으나, 통틀어 봤을 때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뭇 거창하였던 '김대산류'라는 타이틀은 외려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작품들이 서로 비슷한, 즉 재탕에 또 재탕을 일삼는, 그리하여 '류'를 이루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별적으로 좋다한들 무엇하겠는가? 발전이 없다면 더 보아 무엇하리.
그렇다면, 통칭 '김대산류'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대관절 그것이 무엇인데 작품에 균일화를 가져오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선은 '계기'와 '변화'라고 답하겠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자. 정작 문제는 주인공에 있으니까. 아니, 그 가진바 독특한 기질이라고 해야 하려나?
두 작품의 주인공은 태생도, 나이도, 무공에 입문한 계기도, 겪어나가는 사건도, 그 무엇하나 같은 게 없다. 그러나 단 하나 꼭 닮은 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외골수적인 뚝심, 혹은 고집이라 하겠다. 평소에는 무골호인처럼 흐르면 흐르는대로 살던 이들이건만, 또한 무언가를 결심하고 부터는 도통 망부석이 되어 물러날 줄을 모른다.
백이면 백 무모하다 할 것이요, 천이면 천 미쳤다고 해도 좋다.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뚝심 있게 밀어 붙이는 것. 남들이 난색을 표하며 마다하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고집대로 술술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이들의 공통점이다. 겉은 뭐 하나 같은 게 없는데, 속은 틀로 찍어낸 붕어빵처럼 같다. 그러니 이건 뭐, 숫제 배역만 바꿨을 뿐인 같은 배우의 다른 연극을 보는 듯 하다.
더군다나 그렇기에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호흡할 수 없다. 아무리 작가가 주인공의 입과, 행동을 빌려 독자를 설득해도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왜 그렇게 일을 풀어야 하나? 그리고 또 일은 왜 그렇게 잘 풀리나? 내 생각하길, 주인공 옆에서 그들을 열심히 말리기 바쁜 조연들이야 말로 참말 정상인이요, 옳은데. 아이고 답답해.
두번째 공통점은 김대산 작가만이 지닌 기질이자, 풍취다. 요즘 주류를 이루는 직선적이고 거친 문체와 비교했을 때, 그의 문체는 확연히 돋보인다. 옛맛이 느껴진다고 할까. 옛멋이 묻어 난다고 할까. 아마 수십 종의 무협 속에 그의 것을 숨겨 놓는다 할지라도 구분해 낼 수 있을 만큼, 소위 '김대산류'가 지닌 특유의 멋은 유난히 돋보인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고유의 멋이 아니라, 그의 문체가 지닌 또 다른 일면. 즉 기교가 아닌 '시각 혹은 시점으로부터 비롯되는 서술'이다. 그의 서술은 유독 이질적이다. 담백하다 못해 너무나 담담하여 이내 독자를 작품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주인공, 혹은 어떤 특정 인물과 감정교류를 하기가 너무 힘들다. 마치 어떤 막이 있어 사이를 가로 막은 듯, 그렇게 그의 서술은, 마치 주인공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양 지나치게 곧고 담담하다. 파격이 없다.
주인공의 성격을 닮아 곧고 담담하며, 파격이 없다는 부분에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금강부동신법>과 <잡조행>의 주인공들이 일으킨 일들은, 사실 파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 내 사회체제에 반란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소설 내 사회가 부조리하기 때문이지, 결코 그들이 파격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외골수로 정론을 주장하며, 이를 관철시킬 힘이 있으니 파격으로 보일 따름인 것이다.
아, 한 가지 더. 감정교류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지, 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문체가 득으로 작용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문체로 인해 극적인 장면에서 그 효과가 반감된다는 건 굉장히 안타까운 점이다.
잡설은 이만 줄이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결과적으로 위의 두 가지 이유, 즉 알맹이가 같은 주인공, 그리고 감정교류를 방해하는 서술이 공통적으로 행해지고 있기에 나는 '김대산류'를 단순한 자기복제류로 판단했었고, 그래서 다신 보지 않겠다 다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 접하게 된 <몽상가>는 내 생각을 뒤집었다. 이거, 지금까지와 다른 맛이 난다.(문체는 어쩔 수 없다. 그건 개인의 색이므로. 어떻게 바꾸고 싶다고 당장 바꿔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연습이 답이다. 아예 바꾸거나, 오히려 더욱 파고들어 깊은 맛을 내거나.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추천한다. 어떤 문체가 나올지 심히 기대되므로.)
우선 주인공에게 좀 더 융통성이 생겼다. 기존의 주인공들이 사회체제에 소극적으로 반하는 입장이었다면, 이번 주인공 김철민은 유들유들하니 섞여 살 줄 아는 인물이다. 나름 거칠고 톡톡 쏘는 한 성격하는 캐릭터긴 하지만, 이 또한 엘리트가 지닌 어떤 특권 의식의 발로라 생각하며 충분히 보아 넘길 수 있는 정도. 그러니까 한마디로, 애교다.
그간 주변에서 무슨 소릴 하든 똥고집 박박 부려가며 무대뽀로 돌진하던 주인공들과 달리, 그나마 상사가 어르고 누르면 말귀는 들어 먹으니, 한결 친숙하다. 사실 이런 사람, 주변에 한 둘은 꼭 있지 않나. 능력도 있고 그 능력 만큼 한 성깔하지만, 주변에서 요리조리 다루면 수그러드는.
그래서 생각하길, 드디어 '김대산류'만의 무언가를 보일 것인가? 였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바로 '계기'와 '변화'다. 돌이켜보면 그간 <금강부동심법>이든, <잡조행>이든 '계기'가 있었고, 이를 통해 주인공이 '변화'하게 되었었다.
그렇다면 <몽상가>의 '계기'는 무엇이고, '변화'는 또 무엇인가. 아마 요상한 꿈과 현실에서의 열정의 회복일 터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어떨지 1, 2권만으로는 딱히 짚이는 것이 없다. 단지 야구와 관련되었을 것이란 사실 외에는. 굉장히 설레고 기대된다.
그런데 참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왜 <몽상가>인가? 몽상가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 네이버에 물어보니,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즐겨 하는 사람'이라고 답해주었다. 김철민이 그러한가? 아니다. 그는 지극히 실리적인 사람이다. 비록 꿈은 없으나,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버린 돈을 벌겠다는, 출세하겠다는 생각에 지배받고 있는 현대인이다. 그는 결코 실현성 없는 헛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꿈속의 김철민이 그러한가? 강호의 김철민이 그러한가? 아니다. 그는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표 하에 움직이는 인물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 놈이 몽상은 무슨. 단순히 특별한 꿈을 꾸기에 몽상가라고 했다면, 그건 아쉽게도 김대산 작가의 크나큰 판단착오라고 하겠다. 솔직히 이 제목, 뭔가 임팩트가 없지 않나. 그럼에도 작품을 대표하는 제목이 되었다면 뭔가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그 뭔가가 있다는 얘기 아닐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작가님 저랑 면담 좀? 오 마이 뒷통수.
이 다음부터는 그저 사소한 의문점.
1. 김철민은 어째서 '강호'를 모르나? 설정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결코 먼 미래의 사람이 아니다. 가상현실게임이 등장하는 소위 게임판타지의 배경이 되는, 지금과 다른 시간대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정상적으로 성장했을 김철민이란 존재는 어째서 '강호'를 모를까? 설마 설특집영화 <취권>이나 <소오강호> 한 번 못 본, TV도 없는 사람이어서? 아니다. 그의 방에는 분명히 TV가 있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므로 확신할 수 있다. 근데 대체 왜 모를까?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강호'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듣기까지 했으면서.
2. 김철민은 엘리트라면서, 어째 그 나이 먹도록(주인공 나이 제법 많다.) 천연기념물이었나? ……2권에 분명히 나온다.(눈물 좀 닦고.) 엘리트라며!!! 그것도 엄청난 대기업의 전도유망한 사원의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 설마, 설마. 연애 한 번 못 해 본 건가!!! 너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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