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퍼즐을 짜 맞춰라
<깨어진 잔으로 건배하라>에 대하여
1
개인적인 일로 매주 일정량의 문피아 연재작을 소수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이유 탓에 거리가 금방 동이 난다는 것이 문제였다. 출판 삭제를 한다든가, 연재 중단을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어느 날 불쑥 글 자체가 증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고로 새로운 글을 찾는 것은 이제 업무의 영역이 됐다. 나는 곧 고독한 연재방의 유령이다.
2
유령은 제목을 본다. 일단 그게 중요하다. 눈에 띄는 제목을 찾아 들어간다. 그러나 유령은 또한 입맛이 까다롭다. 전반적으로 문법에 매우 민감하다.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 부호의 사용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를 위해 연재분 가운데 하나를 임의로 선택하여 세밀히 살피는 작업은 필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합격점이다. 나무랄 데가 없다. 만족스럽다.
3
시간의 힘은 위대하다. 그 앞에 만물은 삭거나 익는다. 이 둘의 차이는 관리다. 관리가 잘 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잘 다룬 오래 된 물건과 같다. 허름하되 서린 세월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마치 장이 오래 묵을수록 특유의 맛을 품는 것처럼 이 글 역시 그렇다. 고유의 맛이 돋보인다. 우리는 흔히 이를 두고 필력이 있다, 고 말한다. 유령은 이에 만족한다.
4-1
물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일전의 어떤 평자가 얘기한 바는 일견 타당하다. 확실히 많이 빈다. 배경적인 면이 약하다. 그렇다고 과할 필요는 없다. 시각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글쓴이 본인 입으로 얘기하지 않았던가? 너무 짙어 물을 뺀 상태라고. 지금처럼 글을 전반적으로 고친 상황에서라면 시각화는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섣불리 문장을 덧댔다간 망친 유화처럼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옛 님도 그러셨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찬성한다. 차라리 조금 부족한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이런 말도 떠오른다. 긁어 부스럼이라. 그래도 정 허하다면, (배경과 관련해서) 그저 두어줄 더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4-2
쓰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다. 첨언한다.
얼마 전 혹자가 이리 말한 적이 있다. 단순히 구구절절하다 해서 묘사가 좋은 게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보다 중요한 건 효과적인 연출이다. 굳이 누가 어찌 생겼는지 좔좔 얘기해 봐야 독자가 기억하는 건, 열에 한둘쯤에 불과하다.
즉 그 인물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만이 머리에 남는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뼈대가 된다. 그 외 부차적 면모는 이 위에 덧붙는 살일 따름이다. 곧 핵심은 인물의 특징적인 면을 얼마나 잘 부각시키는가? 에 있는 셈이다. 시각화도 좋지만 글쓴이라면 먼저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부각법은 간단하다. 언행言行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인물의 생각은 곧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조금 더 크게 봐야 한다. 말이라 해서 꼭 입으로 내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라 해서 꼭 몸으로 움직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선, 얼굴색, 손짓 따위도 말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옷차림, 머리 모양 따위도 넓게는 움직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4-3
무엇보다 찬성할 수 없는 건 인물에 관해서다. 그 평자는 생동감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의 인물은 모두 자기만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능구렁이 삼인방 - 파르잔 후작, 단테 황태자, 트왈레 - 조차 개개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그 지닌바 근본이 유사하여 동류의 인간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저마다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글 속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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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잔은 냉혹하다. 그는 한 눈에 상대를 평가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많은 귀족을 상대해온 특성 탓일 터다.) 곧 첫 인상에 많은 비중을 두는 위인이다. 그 결과 릴리는 ‘쓸 만한 예비 패’ 정도로 치부된다. 그래서 미행을 붙이지만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단테는 영악하다. 그의 어린 나이는 한편으로는 득이지만 또한 위협이다. (아마 삐끗하는 순간 허수아비 황태자로 전락할지도 모를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그는 신중하게 상대를 판단하며, 이를 위해 서슴없이 제 어린 나이를 이용한다. 에이, 설마 제가요? 라는 식이다.
트왈레는 짓궂다. 그는 못된 벗이다. 그는 제 이득을 위해 릴리를 이용한다. 근데 거절할 수가 없다. 첫째는 친구라는 명분 탓이고, 둘째는 결과적으로 릴리도 얻는 게 있는 탓이다. 곧 죽도록 고생하면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시련의 구렁텅이로 친구를 밀어 넣길 주저하지 않는 아주 얄밉고 성가시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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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로 이토록 뚜렷한 특징을 지닌 인물들이 생동감이 없다는 건,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적어도 유령이 본 <깨어진 잔으로 건배하라>는, 인물만큼은 단단한 글이다. 잘 구축된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다. 그렇기에 다소 아귀가 맞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이 흔들림은 오직 연출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5
사실, 비는 곳은 또 있다. 배경뿐만 아니라 서술 역시 그렇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성긴 편이다. 따라서 보는 입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심지어 이에 대해, 혹자는 작가의 역량 부족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를 의도적인 것, 즉 연출된 것이라 생각한다. 잘라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쳐내진 부분도 있을 테지만, 대개는 의도된 결과로 보인다.
이를 테면 이 글은 ‘퍼즐’과 같은 셈이다. 그래, 이 서평의 제목이 저 꼴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종일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글쓴이가 놓고 간 조각을 받아 판을 채우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그런데 문제는 이 조각이 완전치 않다는 것이다. 핵심 조각은 있는데, 잘은 것이 통 나오질 않는다. 결국 짐작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 전체 그림을 계속해서 유추하고, 수정하며 핵심 조각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관은 이뿐이 아니다. 갈수록 판마저 커지니 각 조각의 거리가 수시로 변하고, 때론 위치마저 달라진다.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그래서 다음이 궁금하다.
다음 조각에 목마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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