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을 쓰기에 앞서 제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 몇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글의 개연성입니다. 혹자는 무협/판타지에 무슨 개연성이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그 분들은 현실성과 개연성을 혼동하신 거라고 봅니다. 무협이든 판타지든 사실상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꾸며내어 이야기로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어떤 글을 보면 특정 사건이 너무 뜬금없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 가 하면, 다른 글은 그 전에 복선 이라든지 배경 설정등을 통해서 사건이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대표적으로 기연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연이라도 적당한 상황 설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갑자기 은거기인이 머물렀던 동굴을 발견한다는 식은 초기 무협지부터 이미 사용하기 시작한 식상할대로 식상한 설정입니다.
두번째로 등장인물들의 어투나 행동, 사고 수준입니다. 속된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체나 어투 등을 보면 작가가 정말 진지하게 글을 쓰고 있는 지 의심이 가게 합니다. 그리고 보통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고된 수련을 거쳐서 실력을 쌓거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 적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수련을 쌓은 사람들치고 사고 수준이 너무 유아적으로 표현되는 글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너무 뻔한 함정에 걸려든다던지, 너무 감정적으로만 대응하거나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에 무협 소설이라면 호칭이라든지 어투도 하오체 같은 걸 썼을 경우 감정 이입이 보다 더 잘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로 긴장감입니다. 보통 주인공이 너무 강하면 이런 긴장감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나중에는 결국 강해지더라도 그 전까지는 적당히 대적할 만한 적, 위험 요소 등이 있어야 긴장감도 유지가 되는데, 어떤 글들은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모두 바보나 어린애 수준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다 주인공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위기다운 위기는 없으며, 말도 안되는 능력을 가지고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장형 소설로서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과 경쟁하며 천천히 능력을 키워가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등을 좋아합니다.
그럼 이제 몇 가지 소설들에 대해서 추천 겸 감상글을 적도록 하겠습니다.
제목 : 이소파한
작가 : 동방존자
이 소설은 워낙 오래 전부터 연재해 오던 소설이라 대부분 한 번은 보셨거나 보시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량도 지금은 400편을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한참 남은 듯 보입니다.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앞서 말씀 드린대로 개연성입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우연히 벌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고, 모두 배경이 되는 상황이라든지 복선이 존재합니다. 그 긴 글을 쓰고 계시면서도 세세한 내용까지 챙기시고 쓰시는 게 참 대단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우 한명한명이 살아 있습니다. 즉, 주연 같은 조연급들이 많이 등장하고 인물들 자체도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 이 글은 순수 무협이라기 보단 무협에 판타지적 요소을 가미하였습니다. 그 판타지적 요소도 제가 느끼기에는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제목 : 아홉개의 솥
작가 : 정건
사실 전 왜인지 모르게 무협에 귀신이나 마물등이 등장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글에서 사용하는 소재 자체가 참신하기도 했고, 마물 자체도 일반적인 마물이 아닌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종류도 다양합니다. 한 두가지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글의 구성 자체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 역시 작가분이 글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미 어느정도 계획한 후에 쓰시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성실 연재를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제목 : 무림능력전
작가 : 주기공
이 글은 예전에 한 번 연재하시고 1부를 종결하셨는데, 작가분이 다시 손을 보시면서 재 연재를 하고 계십니다. 이 소설 역시 소재가 참신합니다. 무공과 초능력의 조합인데, 그렇다고 해서 초능력이 터무니 없이 강하거나 하진 않고 적절하게 무공에 섞어서 쓸 정도입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 중 일부는 말 그대로 엄청난 능력을 보여 주지만 글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정도는 아닙니다. 적당히 긴장감도 있으며, 등장 인물들 역시 각자 개성이 있습니다.
위에 몇 가지 소설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 외에도 추천하고 싶지만 연중 혹은 장기 미 연재로 인하여 안타까운 글들이 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귀혼환령검(가비), 점창파(333333333), 열방전(차마), 월야공자(박이) 등등 계속 연재를 하셨다면 충분히 호평을 받을 수 있는 글들인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이미 연재가 완료된 소설에는 그 유명한 후생기(가글)를 비롯해서 공산만강(천애), 이르나크의 장(최정연),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박민영) 등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중 후생기 쓰신 가글님이 새로 망량이라는 게임판타지를 쓰고 계시는데, 어떻게 써 나가실지 기대가 됩니다. 그 외에 드렁큰 블레이드(후두마루), 에르나크(카이첼) 등도 선호작으로 읽고 있습니다.
쓰다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예전에 비해 장르 소설의 수준이나 평가가 많이 올랐다고 생각합니다. 소재도 많이 다양해지고, 연령층도 많이 두터워져서 작품이 더 풍부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글을 쓰시는 작가 분들이나 앞으로 쓰실 분들 모두 힘내시고, 유료화를 바탕으로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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