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격투기술 포함 농기구로 하는 농민무술
지금도 산간에서는 겨릿소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쟁기라는 이름의 원말은 "잠기"이다. 그리고 잠기는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가 바뀐 말이다. 예전에는 땅을 가는 농기구와 전쟁에서 쓰는 무기를 같은 말로 불렀다. 그때는 농사짓는 사람이나 군인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농기구를 들고 전쟁터에 나서면 그것이 곧 무기가 되고 군인이 되었던 까닭이다. "잠기"는 18세기 초에 "장기"로 바뀌었는에 이때까지도 농기구와 무기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병장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 무렵부터 유래된 것이다. 근세까지 농기구를 병장기 삼아 싸웠던 흔적은 동학농민전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별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는 농민군은 손에 농사 짓던 도구를 들고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일종의 농민무술이 되었다. 이를 후에 독립군 출신인 이인의(李仁義) 선생이 고무도로서 체계화와 보급에 나섰고, 아들인 이도윤(李道潤)씨가 전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무도는 활, 창, 칼 등과 같은 정규 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장대, 낫, 괭이, 쇠스랑, 도리깨, 노와 같은 농기구를 이용하여 싸우는 법, 맨몸으로 하는 법 등 세가지로 분류된다. 이중에 정규무기 사용법은 군사무술로 흡수되고, 농기구를 이용하거나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은 생활무술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고무도이다. 고무도의 기술체계에서 농기구를 쓰는 무기술은 장봉, 단봉, 중봉, 노봉, 도리깨봉, 죽창, 삼지창, 수리검, 낫, 철퇴, 쌍절봉 등이 있다. 그리고 맨손무술은 유술과 권법으로 나누는데 유술은 씨름, 굴리기, 쪼우기(조르기), 꺾 기, 비틀기, 업어던지기, 메어치기 등과 택견과 같은 족치기가 있다. 권법은 장구치기, 주먹치기, 팔굽치기가 있고 장법(掌法)에는 밀어날리기, 후려날리기, 당겨날리기 등이 있다. 또한 이른바 "난다리"라고 하는 박치기의 기법이 있다. 말하자면 고무도에는 현존하는 모든 격투기 기술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고무도는 상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술이지만 이것은 특수층의 특별한 동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 주체인 민중들이 생업인 농사를 통하여 농기구 사용법에서 얻은 미립을 구체화한 생활무술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체계적, 조직적으로 전승되지 아니한 까닭에 물밑으로 흘러와 일반인의 인식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여 그 참된 가치와 역사발전 기여도에 대하여 도외시되어 온 불행한 무술이다. 농민들은 손에 괭이와 삽과 몽둥이와 죽창같은 것을 들고 부패한 관리를 징벌하고 일본군대의 신식무기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삶은 보다 효율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강구하도록 만든 여건이었던 것이다.
지난 91년 5월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대한고무도협회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의 농경생활에서 터득하여 온 농민무술을 체계화하여 생활무술로서 보급을 시작하였다. 협회 설립자 이도윤(57세) 회장은 1957년 부산 범일동에서 수박도 무덕관을 개설한 이래로 줄곧 무술 지도자로서 평생을 살아 왔다. 그의 무술이력은 화려하다. 65년 설립한 충무관은 전국 각지에 1백 여 개의 지관을 거느린 큰 세력을 형성한 때가 있었고, 75년에는 대한쿵후협회를 창설, 회장을 맡았고, 부산시 태권도협회의 전무이사,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에 고무도 교본을 발간한 그는 쿵후 교본, 합기도 교본 등을 내기도 한 저술가이다. 그가 이렇게 여러가지 무술을 통달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군 출신의 가친으로부터 종합적이고 다양한 술기의 고무도를 전수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이 도주하여 만주를 방랑하게 되었다. 구련성에서 일본군 두명을 맨주먹과 박치기로 쓰러뜨리기도 하고 무술의 고수들인 일본 고등계 형사들과 대결을 벌이는 등의 신화적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제 늦게나마 고무도가 생활무술로서 가까이 다가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맡아 나섰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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