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고 2학년 학생들이 감상문을 많이 올려주는 관계로, 저 역시 고2때 '인하대 독서논술대회'에 참전하기 위해 썼던 글이 생각나 찾아내어 올리게되었습니다.(물론 이런 졸작으론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ㅎㅎ 참가상은 받았지만 ㅎ) 그당시엔 참 나름 괜찮게 썼구나 싶었었는데, 지금보다 어릴 때라 무척 귀여운(?)글이군요. 지금도 미흡한 제가 보기에도 상당한 필터링이 되는군요. 뭐, 세상모르고 날뛰던 꼬맹이는 지금에선 제 무지함을 무척무척 깨닫고 세상 무서운줄 알게됐습니다만..(웃음) 그 당시의 꼬맹이에겐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였던지라... 감상보다는 오히려 논술에 가까운 글(...)이고 내용과 감상을 나눈점, 내용의 초점을 잘못잡은 곳도 적잖게 눈에 띄는군요. 밑의 경인고 학생들글과 더불어 제 고2시절 옛 감상문에도 혹독한 채찍질을 부탁드립니다.
평소 나는 학교 앞 도서관에서 책을 자주 빌려보는 편이다. 이리 자주 들리는 도서관에서 한 책을 가지러 가던 도중 문득 검정색과 자주색의 예쁘장한 하드커브지로 둘러싸인 '빙점' 1, 2권을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옆에 있는 '속 빙점' 1, 2권까지도, 표지가 예뻐서 그런지 손이 자꾸 갔다. 눈이 혹해서 일까? 표지를 펴고 앞의 부제들을 살펴보니 꽤나 흥미롭고 자극적이라, 결국 빌리기로 한 중국 청나라 역사서인 ‘수신제가’ 편을 놓고 ‘빙점’ 을 빌리게 되었다.
-빙점의 시작은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인 부인인 나쓰에가 남편 병원의 안과의인 무라이와의 은밀한 외도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은밀한 외도의 대가였을까? 이러한 외도가 이루어지는 도중 나쓰에의 소중한 딸 루리코가 "선생님 싫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는 놀아주지 않아." 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외출하고, 외출 중 루리코는 살해당한다. 이와 같이 초반부부터 유아살해라는 무섭고도 무거운 소재를 사용하는 이 책은 당장에라도 추리 소설 같은 전개가 시작될 듯싶어 엄청난 긴장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물이 아니었다. 살인범인 사이시는 잡히기 전에 자살하고, 이 엄청난 사건 속에 나쓰에의 남편인 게이조는 '직접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무라이와 나쓰에는 루리코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라 생각한다. 따라서 게이조는 간접적으로 루리코를 죽인 나쓰에에게 루리코의 복수를 하기 위해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을 입양한다. 하지만 나쓰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이 아이를 보옥같이 키우는데, 이름은 요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나쓰에는 요코를 죽은 딸인 루리코의 대신이라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과도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 게이조는 엄청난 심리적 갈등을 느낀다. 나쓰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입양했던, 루리코를 죽인 살인범의 딸인 요코를 나쓰에가 너무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신의 복수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또한 요코에게 정이 들어 요코의 비밀 감추고 살아야 갰다 마음을 먹는데, 안타깝게도 나쓰에는 요코 출생의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남편의 일기장을 통해서. 나쓰에는 '루리코의 목숨을 빼앗은 인간의 딸이라면 더는 키울 수 없는 일이다.' 라 생각하고, 여태껏 그녀가 요코에게 보여주었던 지나친 다정함과 사랑은 모두 넘치는 증오와 분노로 바뀐다. 나쓰에는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의 딸 요코를 학대하고 적으로 인식하는데, 이 시점에서 부터 요코 인생의 황금기는 끝나고 파란만장한 고난이 시작된다. 이 시기를 분기로 하여 글의 시점이 요코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요코는 이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다. 말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바른 방향으로 엇나간다. 평범한 아이들이 이러한 학대를 받으면 비행아로 크는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요코는 이러한 보편성을 무시하고 더욱더 정의를 지향하고 바른 길로 가는데, 이러한 행위는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믿음에서 우러나온 당당함이다. 이런 믿음을 통해 요코는 더욱더 곧고 바르게 엇나간다. 요코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바르게 자라는 사이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흘러 안타깝게도 진실의 순간이 다가와 요코는 나쓰에의 입을 통해 스스로의 출생비화를 알게 됨으로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 믿었던, 죄가 없다 믿었던 스스로에게 확신을 잃고 자신에게도 원죄, 즉 ‘빙점’ 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에 따라 요코는 루리코를 죽인 자신의 친아버지 사이시를 대신해 나쓰에와 게이조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코는 숨이 남아있고 게이조는 요코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서둘러 달린다. 여기서 마지막 반전이 일어나는데 요코를 내주었던 산부인과 원장이자 게이조의 친구, 다카기가 나타나 요코는 범인 사이시의 딸이 아니라고 밝힌 뒤 이야기의 막이 내린다.
우선 줄거리는 대략 이런 식인데 감상문의 초점이 너무 주제 위주로 쓰여 있고 주위의 보조적인 사건들, 예로 들면 중간 중간 나오는 에피소드인 게이조의 친구이자 산부인과 의사 다카기의 이야기와 나쓰에의 친구이며 일본 전통 무용춤의 대가인 다쓰코의 요코에 대한 간접적 도움, 요코의 양 오빠이자 요코의 지원자인 도오루의 성장이나 게이조 병원의 게이조를 사랑하는 간호원 유카코의 사랑 등의 사건들이 생략된 경향이 있어 아쉽지만 넘어가도록 하고, 글의 내용이나 사건 자체가 상당히 흥미로웠고 그 문체 또한 상당히 독특하고 직설적이라 우리나라의 글들과는 또 다른 흥을 돋구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기본적인 내용도 흥미롭지만 이 책은 인물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잘 표현되어 하나하나의 인물들을 풀어놓고 봐도 매우 재미있다. 책 도입부, 나쓰에의 외도는 내용 전개상 꼭 필요했지만 중반부에 나오는 이상적인 부인의 전형적인 상을 지닌 나쓰에와는 별개의 인물로 보일 정도로 다르다. 과장을 조금 덧붙이자면 기녀와 성녀 정도의 차이랄까. 또한 게이조는 상당한 인격자로 묘사됨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복수극을 부인에게 시도하는 잔혹한 면을 보인다. 요코 또한 자아정체성이 충분히 확립되었을만한 18세 이상의 나이 동안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아이 답지 않게 자신의 거짓혈통을 알게 되자 어느 정도 고민을 거친 뒤 스스럼없이 자살을 시도한다. 그 신념은 마치 만년거성이 한순간 모래성으로 변해 바스러지는 듯, 묘한 느낌을 선사하였다. 마치 타인으로 보일정도로 아이러니한 인물들의 행동들은 이야기의 부자연스러움을 유발하기 보다는 인간의 이중적인 측면이나 내적인 갈등을 상당히 잘 나타냈다는 느낌을 주어 아주 좋았다.
다만 궁극적으로 이 책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원죄’ 인데, 나는 그 '원죄'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해 가슴이 휑 하다. ‘원죄’ 란 18년의 인생 동안 스스로는 전혀 잘못이나 죄를 짓지 않았던 요코가 마지막에 스스로의 사이시라는 범죄자의 혈통을 인정함으로 어쩔 수 없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죄를 '원죄', 즉 하나의 ‘빙점’ 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빙점’ 으로 불리 우는 ‘원죄’ 는 확실히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이 있다. 기본적으로 혈통을 빌미삼아 죄를 부과하던 연좌제는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법이 개정됨에 따라 그 법이 없어졌다는 건 결국 그 법이 잘못되었다는 가능성이 다분함을 뜻하고 따라서 연좌제는 잘못된 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럼 요코 역시 확실히 죄가 없다 보는 게 옳다. 또한 감성적 측면에서 요코 스스로 느꼈을 죄책감도 이미 나쓰에에게 끊임없이 학대당함으로 넘치도록 값을 치렀다 할 수 있다. 물론 죄란 값을 치르고 안 치르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요코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요코가 인간이 본디 지니게 된다는 설정의 ‘원죄’ 를 혈통으로 느끼게 되는 점은 뭔가 모자라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을 포함하여 아쉬운 점이 몇 가지 더 있는데 이 책이 중반부 즘에 들에 들어 시점을 요코 중심으로 갑자기 전환되었다. 이는 요코가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고 주제인 ‘원죄’ 를 살리기 위한 방편이라 보이지만 사실 내가 받은 느낌은 여태 언급한바 대로 ‘원죄’ 보다는 오히려 초반부 게이조와 나쓰에의 심리적 대립과 갈등을 통한 ‘인과응보’ 나 ‘자업자득’ 이란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따라서 시점을 초반부와 마찬가지로 계속 나쓰에와 게이조의 심리 면에 중점을 뒀으면 더 좋았을 듯싶었다. 초반부 나쓰에와 게이조의 심리 상태가 상당히 급박하고도 긴장감 있게 서술함으로써 흥미가 동하고 내가 '인과응보' 또는 '자업자득' 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태껏 나열하였다시피 '빙점' 은 어느 정도 문제성이 있지만 상당히 흥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고 교훈과 감동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빙점’ 의 후속편인 ‘속 빙점’ 의 존재를 감상문 도입부에서 이야기했었다. 이 '속 빙점' 에서는 전편의 주제인 '원죄' 를 성장한 요코가 ‘용서’ 함을 글로 풀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속 빙점' 도 내 관점으로 보았을 때 빙점과 비슷하게 작품 주제의 근거가 부실하고 그 주제가 모호하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역시 읽기에는 부담 없는 작품이라 보여 진다. 단 원작 넘는 후작은 없다고, 스토리의 긴박감이나 인물간의 갈등이 ‘빙점’ 보다는 모자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마지막으로 이 '빙점' 을 시간이 남아 즐거움을 갈구하는 사람이나, 인간사의 묘한 감동을 바라거나, 한 인물의 성장기를 즐기는 분, 또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재미있게 읽고 싶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뱀발 - 글에 억지로 멋을 내려는 치기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거 같아 약간 씁쓸합니다. ^^; 멋은 우러나야 제맛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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