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시하
작품명 : 여명지검 5
출판사 : 청어람
(존칭 생략함)
윤극사전기, 무제본기를 시작으로 시하의 글은 모두 읽고 있다. 나에게 한 줄이라도 더 구해서 읽고 싶은 작가를 말하라면 단연코 '시하'다. 나는 일년 전쯤에 시하 때문에 문피아에 가입했다.
시하의 필명 시하는 엄처시하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시하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더 시하의 필명에서 엄처시하가 아닌, 시하(視下)를 느끼게 된다. 여타 장르작가들을 눈아래로 본다는 의미의 '시하', 독자를 눈아래로 보고 있는 '시하'. 하지만 이런 시하가 나한테는 미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이유로는 밉다. 물론 절대로 싫지는 않다.)
시하의 글 한 페이지에 묻어 있는 깊은 생각과 작가로서의 고뇌는 여타 장르소설 열권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 양의 문제를 제쳐두고 질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그 차이는 더 심해진다. 나는 시하의 소설에서는 항상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게 된다.
시하는 소재나 주제, 인물 등에서 쉽게 남의 것을 빌려오는 경우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 1, 2, 3 같은 인물조차도 시하의 소설에서 지나가는 사람은 표가 난다. 어디선가 본듯한 대사는 물론이고 자기복제의 흔적도 없이, 시하는 쓰는 글마다 자기도 가보지 못한 곳을 걸어가는 개척자, 선구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기의 글에서 많은 짐을 짊어지고 거친 돌밭을 맨발로 걷기 때문인지 시하의 글은 아주 불친절하다. 정확하게 사용되는 한자와 생소한 단어들에 대한 짧은 해석들이 다른 책들보다 풍부하지만 불친절하다는 비난은 면하지 못한다. 글은 아름답고 문장은 뛰어나고, 나타나는 정서는 미묘한데, 말하는 바는 심오하니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듯 읽어야 하고 몇 번이나 꼭꼭 씹어 대지 않으면, 혹은 그렇게 하더라도 그의 글에 담긴 맛과 향을 다 알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은 꿀꿀이죽(내가 싫어하는 오트밀) 먹는 게 시하의 글을 읽는 것보다 편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즉, 재미는 있지만 편하지는 않다.
시하는 예상치도 않는 곳에서 폭탄을 터뜨리듯이 크고 민감한 사고를 요하는 주제 또는 소재를 툭툭 까놓는다. 몹시 불편하지만 나이먹고 살다보면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결국 거름지고 장에 가는 꼴로 같이 생각하고 고민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시하의 소설을 한 번 읽으면 녹초가 된다. 머릿속에서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시하가 말하려고 했을 것들 중에서 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특히 시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서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그가 꾸민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때는 짜증마저 밀려온다.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판단하고 더 깊이 알고 싶은 부분이있어서 자료를 찾아보고 싶어도 막막한 경우는 헤어릴 수가 없다.
독서백편의자현도 아니고 그저 시하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며 머릿속에서 뭔가 잡히길 기다려야 하는 건 고통이다.
나는 직업이 가르치는 것이다 보니 적잖게 동서고전을 뒤적였고 즐기기도 하였지만 시하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시하는 대체 어디서 어떤 자료를 활용하고 무엇으로 공부했기에 이런 글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글을 잘쓴다. 이야기를 잘 만든다는 것과 다른 문제다.
윤극사전기에서는 시하의 독특하고 깊은 사고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뛰어다는 정도(무협독자에 대한 이해는 제외함), 그래서 좋은 작가, 정말 멋지게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을 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물론 그때도 나는 그의 소설을 무협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볼 수는 없었다. 그건 장르를 뭐라하기 힘든 이상한 소설이었다. 무협소설이라고만 주장한다면 코끼리를 냉장고에 꾸겨넣는 것과 비슷할 거라 생각된다.
시하에 대한 내 본격적인 충격은 무제본기에서 시작되었다.
무제본기에서 나는 고대유교에 대해서 시하가 아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끔 나오는 말들이 적은 이해를 바탕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말로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놀랐다. 내가 배우면서 선생님조차 대답해주지 못해서 의문을 가졌던 부분들에 대한 확실한 답들을 여러 개나 발견했다. 머리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병법에 대한 시하의 서술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소위말하는 육도삼략이나 손자병법 같은 것은 책 조금 읽은 사람치고 안 읽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시하가 병법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준 답글이랄까 그런 것을 본적이 있지만, 나는 그때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에 시하에 대한 의문만 키웠다. 시하는 분명히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지만 어쩌면 시하는 '김해병서'니 뭐니 하는 걸 몰래 얻은 게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만큼 병법에 대한 시하의 서술은 손자병법과 육도삼략을 우습게 만들만큼 놀라웠다.
삼묘씨의 이상한 성풍속에 대한 설명은 그것대로 또 이상했다. 시하는 삼묘씨를 통해서 엄격한 규칙에 근거한 자유와 성적문란이 문화발전으로 이어지는 어떤 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대사회를 풍자하고 경고하는 섬뜩함도 있었다.
성에 대해서 봤을 때, 윤극사전기를 읽을 때는 윤극사와 이영의 사랑을 보면서 '이 양반 멋진 사랑을 해본 모양이군' 하고 생각했는데 여자와 성에 대해 거침없는 무제본기를 읽으면서는 놀다가 도통해서 초연한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여명지검을 읽으면서는 확신을 가졌다. 룸살롱에서 진짜 화끈한 애들과 많이 놀았구나 하고.(5권에서는 룸살롱 마담의 경영방법이라 할만한 것도 나왔다. 모함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시하는 여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성심리를 잘 표현한다.)
어쨌든 나는 시하소설의 백미는 무제본기라고 생각한다. 일부 4권에서 말한 내용이 그 정도일때, 전권이 다 나왔을 때는 그 안에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골치아프고 내가 그의 눈 아래로 보일지라도 그의 책이 내게는 보물상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명백히 나는 그의 지식을 부러워하고 자유롭고 치밀한 사고에 놀라워하며 그의 재능에 질투하고 있다. 그리고 독자로서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어떤 작가보다도 더. 그럴 수 있게 된 계기는 무제본기 1부 네 권으로서 충분했다.
여명지검은 그에 대한 신비감을 더해주었지만 나는 이미 시하에게 더 이상의 보낼 감탄이나 찬사를 갖고 있지 않다. 미칠 것 같은 갈증과 호기심만 증폭할뿐이다.
여명지검은 1권을 읽을 때부터 시하가 완전히 작정하고 팩션을 썼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시하의 소설은 무협소설이라는 진부한 타이틀을벗어던졌어야 했다. 무협소설이 가지고 있는 통념으로서는 그의 소설을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여명지검은 묘하게 무협적이면서도 역사적이고 무엇보다도 종교적이다.
여명지검에서는 서안이라는 국제도시의 특성을 이용해서 네스토리우스교(경교)가 등장하는가 하면 회교, 불교(선종, 정토종), 도교, 사마교(배화교)도 거론되고 있다. 아직 어떤 것은 단초만 보였지만 불교에 있어서는 선종과 정토종의 종지를 제대로 휘어잡고 채찍질하는 느낌마저 든다. 석가모니가 임종 직전에 했다는 말에 대한 악심의 해석을 읽고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해석하고 있는가 하고 찾아보기도했다. 제법 찾아보았지만 악심처럼 절묘하게 말되도록 깊이 해석해 놓은 걸 발견하지 못했다(아직까지는). 나는 또 생각한다. 그러면 악심의 해석은 시하의 불경해석인가? 그런 후에 혼란스러워한다. 이제 시하라는 작가는 내게 아지랑이가 되어버린다. 그의 소설에서 내용이어떻게 진행될지 예측불가능한 것처럼, 그 역시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조금은 불쾌해지고 미워진다.
선도의 악심의 구도심을 표현한 것을 읽으면서 혹시 시하도 그런 구도심을 가지고 스님이 되려 했던 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좁은 마음은 그랬기를 바랐다. 그 절절한 구도심을 표현하려면 그만한 구도심이 꼭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여명지검에서 이런 것들을 제쳐두고 가장 가슴을 뜨끔하게 했던 것은 말과 약속, 맹세에 대한 시하의 생각들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사문의 율법이라는 형태로 설명되어졌지만 내가 얼마나 세상을 무르게 대충 살고 있나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참된 자유를 위해서 적이 필요하다는 단영사, 전설속의 여와처럼 생명을 창조해버린 기녀 화연, '세상이 좋아진단다.'하는 가슴 뭉클한 말을 남기고 죽은 왕재상이 나오는 5권은 이전에 깔아놓았던 복선들과 새로 나타나는 인물과 설정들이 만나는 장이었다.
시하의 소설이 원래 그렇듯이 여전히 이야기는 어떻게, 어디로 갈지 추측불가능이다. 추측하려면 시하와 머릿싸움을 해야한다. 몇 번이나시도했지만 참패했다. 진행된 이야기를 보고 나서야 처음부터 그렇게 가도록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뒷북이다.
여명지검 6권이 나온다 해도 나는 패배자가 되거나 봉사가 되어서 시하가 데려가는 대로 따라가서 그 맛을 음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하의 필명이 시하인 이상 나는 그에게 친절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인 윤극사와 황산고와 단영사가 보이는 고집들로 봐서 그가 태도를 바꿔 친절해질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없을 것이다.(이점에서 나는 시하를 엄청나게 미워한다. 하지만 그가 소설에 들였을 엄청난 공을 생각하면 또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여명지검 5권을 읽으면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잡았다.
시하의 소설 전체를 일관하는 것은 인류의 진보라는 사실이다.
윤극사전기에서도 여명지검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상이 나왔었다.
절대고수들이 모여서 비무하는 골짜기는 일반 무협소설의 상식에서는 불가능한 곳이었다. 무림일통을 우습게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은 멋모르는 것들로 치부하는 절대고수들이 했던 말도 '한 사람이 나아간 곳은 인류전체의 영역이 된다' 였다.
여명지검에서는 그것이 시무제 황산고의 뜻이었던 것처럼 나온다.
이것과 이어서 생각할 때 세상이 좋아진단다 하는 왕재상의 말은 바로 작가 시하 자신의 바람일 것이다.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시하가 소설로써가 아닌 현실에서 자기의 꿈을 이루어 주었으면 하는 것은 내 바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소설 그만 쓰면 절대곤란이다. 시간은 상관없다. 내가 죽기 전이기만 하면 된다. 여명지검 완결(1부완결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완결)과 무제본기 2부부터 완결까지는 죽어도 읽어야겠다. 책이 안 나오면 나는 그의 스토커가 될지도 모른다.(거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베르고 벨러서 작심하고 적었다. 그러나 나는 이 조금의 글과 짧은 표현력으로는 시하와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을 충분히 표현해 내지 못한다. 글을 쓴 사람도 있는데 감상조차 만족하게 쓰지 못한다는 것이 속상하지만 나는 시하의 소설을 재미를 떠나 배우기 위해서 읽는다고 고백한다. 무협소설에서 뭘 배우느냐고? 나도 내가 한심스럽다. 차라리 그 잘난 '신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이라도 떼어 버렸으면 좀 덜 한심하려나? 다른 책에서 가르치지 않는 걸 가르치는데 이걸 읽지 않고 어디서 배우나? 그래서 작가 시하가 자기 지식과 사상의 원천을 논문색인처럼 정리해서 책 뒤에 기록해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새책을 읽는 재미를 준다. 나는 그 이유가 복선에 있다고 본다. 읽을 때마다 발견되는 복선은 이전에 읽었던 느낌과 이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다. 이것도 내게는 수수께끼다. 먼저 이 복선을 다 준비하고 썼다고 믿기에는 복선의 분량이 너무 많고 그냥 막썼는데 그게 절로 복선이되었다면 허탈한 웃음밖에 안 나온다. 무제본기 병법에 대한 시하의 답변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출판사에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이런 책을 편집실이나 기획실에서 이렇게 밖에 못 내놓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시하의 책을 무협소설로서 아웃사이더 정도로 여기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나는 시하가 다작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역량을 짐작 못하면서 감히 하는 추측이지만 시하도 사람인 한 한계는 있을 거라 믿는다. 나를 포함한 시하의 독자들은 어쩌면 시하가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더 먼 길을 개척해주기를 빌어본다.
이렇게 주절거린 까닭은 나 같은 독자도 있다는 걸 시하가 알기를 바라는 때문이다. 또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시하의 독자분들이 문피아에도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말꼬투리잡고, 어쨌으니 패스 하는 그런 글들을 보면 내가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서 나는 시하의 글을 말에 때묻지 않는 곳에 숨겨 놓고 혼자 읽고 싶다.
(위에서 생략된 존칭은 극존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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