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하지은
작품명 : 얼음나무 숲
출판사 : Nobless Club
안녕하세요. 너무 좋은 책이 있어서 이렇게 처음으로 감상란에 글을 올려 보는데요. 그런데 이 책의 초판 인쇄 날이 2008년 1월 23일 이더군요. 1년 넘게 뒤쳐진다고 생각하니 약간 올리기가 께름칙하더군요(나만 너무 뒤쳐진 건 아닐는지...). 하지만 얼음나무 숲에 대한 감상란을 쭉 한번 다 읽어 본 후, 저랑 비슷한 감상문을 적은 사람이 한 사람 밖에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올려 보려고 합니다.
처음에 ‘얼음나무 숲’ 제목을 봤을 땐, 제 이미지는 이랬습니다. 1년 내내 눈만 내리는 차가운 지방이거나, 전설 속에서 나오는 요정이나 엘프, 뭐 이런 판타지 소설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지없이 제 생각을 깨뜨려 버리더군요. 이 소설은 장르 문학이 아니라 대중문학과 장르 문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음악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었던 것입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서 저는 얼음나무 숲이 가지는 의미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2000년 전 익세가 사랑하는 한그루의 나무, 그 나무를 태우게 됩니다. 그리고 초고온 상태에서는 이상하게도 나무는 활활 타오르지 않고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버린다고 하는데... 저는 이미 제목자체에 작가가 장난을 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제목으로 옮긴다면 ‘초고온 상태에서 얼음장처럼 변해 버린 나무’가 더 옳은 표현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작가가 ‘얼음나무 숲’이란 문구를 제목으로 사용한 이유는 뭘까요?
자, 제목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고, 약 2000년 전 익세가 만든 에단. 그리고 그가 사랑한 나무의 가지로 만든 여명. 이 여명의 주인공 바옐. 바옐로 비롯해서 이 모든 이야기는 전개 되는 돼요. 그는 음악에서 여타의 학생들 보다 뛰어난 두각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미 학생의 신분일 때 ‘드 모토 베르토’를 뽑는 카논홀에서 삼중주를 하게 되는데요. 이것만 봐도 그가 엄청난 초천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바옐의 천재답게 성격이 보통 사람과 달리 자기중심적이고 자존감이 굉장히 셉니다. 음악에 미쳐있고 약간은 비상식적으로 하나에 집착합니다. 그 자신의 음악을 자신과 똑같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단 한명의 청중 말입니다. 이미 그 곁에 그와 맞먹는 친구 고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리러니하게도 그의 음악을 이해 할 수 있었던 건, 고요도, 키욜백작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듀크레. 익세 듀드로였던 것입니다. 오직 그만이 바옐의 음악을 듣고 음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옐이 연주하는 그 근원 깊숙한 그곳, 치열하고 처절한 절규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전 죽었다고 여겨졌던 에단의 전설적인 사람이었습니다.(전 익세 듀드로가 정체를 밝힐 때 약간 오싹했다는....)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 간 악마였습니다. 클롭스 뮈너는 물론 그의 애인, 그리고 바옐의 약혼녀 등등 많은 사람들을 죽여 버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같은 이들을 자행했는데요, 바로 바옐의 장속곡을 듣기 위한 광기어린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그 광기어린 집착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여 버리고 자신마저도 죽여 버릴 정도로 엄청난 것인데요, 저는 익세 듀드로가 가장 바옐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세 듀드로는 2000년이나 넘는 세월을 자신이 사랑한 나무 에나두 밑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긴 세월동안 에단은 많은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이미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타락해 버린 예술, 음악의 신인 모토벤의 입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조악하게 전락해 버린 음악. 이미 순례자들의 도시로서 보존해야 할 그 모든 유산을 잃은 에단.(본문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에단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을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2000년 전 에단을 음악의 도시로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에 대한 광적인 집착, 그리고 몰락해 가는 에단을 가장 슬프게 바라보던 한명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그 자신마저도 뛰어넘어 버린 바옐을 향해 ‘아버지’라고 말하는데요(윽 2000년 넘게 나이 차이 나면서...), 그만큼 그는 에단에서 잃어버린 예술을 목격하고 엄청난 상실감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자, 다시 제목으로 넘어 가죠. 책을 읽는 내내 제목이 제 머릿속에 아른 거렸습니다. ‘얼음나무 숲’이란 초고온 상태에서 얼어붙는 나무를 뜻하는데요, 이는 제목 자체부터가 거짓입니다. 그리고 모순이기도 합니다. 불과 얼음은 한 데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음나무 숲’을 읽는 내내 거짓과 모순이란 단어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데요, 이 책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단어는 바로 ‘거짓과 모순’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음나무 숲이란, 에단의 오랜 전설로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한 마술사가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참혹한 진실이 있습니다. 바옐이 그토록 원했던 청중, 키욜백작은 사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마술사(악마.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매혹당한 사람들을 놀리며, 마지막에는 비열한 방식으로 뒤통수를 침.)였고, 단 하나의 청중이라고 생각했던 익세 듀드로는 음악에 광기 어린 집착을 지닌 미친놈이었던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가짜로 뒤바뀌고 모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본문 중에
p,374 '순식간에 모든 것들이 거꾸로 솟았다. 하늘이 뒤집혀 땅에 섞여 들어갔으며 물이 공기를 마시고 불을 토해 냈다. 밤에 침식당한 낮이 별을 향해 탄원했고 번개는 구름을 던지면 포효했다. 진실이 거짓을 호도하고 시간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면 우리가 있던 그 자리는 모습을 바꾸었다. 꿈이 현실 속에 자리했으며 과거가 미래를 역전하고 추한 기억들은 우리를 향해 그 장면을 벌름거렸다.
라는 문장을 보고 더욱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나무 숲은 제목 그대로 모순과 거짓을 담고 있으면, 그것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사람의 감정 중 하나인 ‘집착’을 더욱 더 부각 시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요. 이는 사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바옐이 아니라 고요를 주인공으로 일인칭 시점으로 내세운 것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는데요, 고요는 듀프레가 죽기 전 까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음악을 그 역시 듣기를 원했습니다. 듀프레가 에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살인 사건의 주모자였으면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음에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 고요는 바옐의 음악에 대해 집착을 지니고 있으며 단 한명의 청중에 대한 열망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소리입니다.
이미 이 소설의 고요의 시점으로 시작한 것 자체가 집착을 나타내고 있었던 겁니다.
얼음 나무 숲 중 고요가 울고 웃고 하는 행동 대부분은 바옐로부터 비롯됩니다. 얼음나무 숲은 거짓과 모순을 이용해 인간을 집착을 다룬 소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착에다가 대상에 대한 사랑이 버무려져 있다면 어떨까요? 바로 ‘애증’입니다.
tip. 키세가 왜 고요를 대신해서 제물이 되었던 걸까?
주인공인 고요가 죽어 버린다면 소설이 끝난다는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본문 중에 키욜 백작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고요 씨의 음악이(바옐씨의 음악보다) 더 좋습니다. 그 안에는 누구라도 말 할 수밖에 없는 순수가 있지요.’
이는 키세 역시 그의 음악에 반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바옐의 곁에 누가 있어야 할 지 이미 예언을 통해 알았던 것이 아닐까요?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쓴다고 애먹었습니다... 다시 책 내용 찾아보고 또 읽어 보고... 아무튼 고3이후로(참고로 지금 21살입니다) 판타지나 무협지에 손을 되지 않았던 저로서는 ‘얼음나무 숲’이 또다시 저를 판타지 세계로 끌어 들일 것 같습니다. 뭐 어찌되었든 간에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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