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동성애를 주재로 했지만 나오는 인불들 대부분이 조선인들이다
조선인들이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중간에 일본인 아가씨는 그런 조선인들 틈에 살아남아 사랑을 이룬다 이영화를 보면서 조선인 개쓰래기라고 느낀건 나쁜일까 ?
덕혜옹주는 더 심히다
영화를 보다 검색한 부분을 인용해 적어 봤다
우선 고종의 시종이었던 김황진(金璜鎭)과 그의 조카 김장한(金章漢)이 마치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정말 100% 픽션입니다.
안동 김씨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을 시조로 하는 구 안동 김씨는 고려시대 귀족이었지만 조선시대 대부분 몰락을 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이 바로 구 안동 김씨입니다. 또 하나는 고려의 공신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 안동 김씨로, 이중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거두로 청나라에서 6년의 볼모 생활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문정공 청음 김상헌의 일문이 바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이끈 집안입니다. 숙종의 영빈을 시작으로 조선 말 안동 김문의 왕비는 모두 문정공 김상헌의 후손이며, 숙종 시대 송시열과 함께 장희빈에 반대를 하면서 사약을 받았던 영의정 김수항의 직계 후손이 세도정치를 이끌었던 김조순, 김문근, 김병기, 김병학 등입니다.
영화 덕혜옹주에 등장하는 김황진은 김수항의 여섯 아들 중 네째였던 노가재 김창업의 직계 후손입니다. 그가 고종의 시종이었으며, 그의 조카가 일제 강점기 기자로 활동을 했고 1950년 당시 서울신문의 일본 특파원을 하면서 영친왕을 만나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 황족의 귀국을 추진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또한 김을한의 동생이 김장한이며 그가 덕혜옹주와 정혼을 추진했던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참고로 김을한 기자의 아들은 KBS드라마 국장을 지냈던 현존인물입니다.
김을한 기자가 일본에서 영친왕과 가까웠던 이유는 안동 김문이 왕실의 외척으로서 원래 교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 황족의 귀국을 위하여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에 부탁을 하였고, 덕혜옹주가 귀국할 당시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덕혜옹주를 돌보았던 상궁들이 큰 절을 올렸던 것도 기록영화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김황진과 김장한의 독립투쟁 부분은 100% 허구를 넘어서 친일의 인물을 독립운동가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1879년 생 김황진의 직계 선조는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에 직접 관여는 하지 않았지만,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증조부 김인근은 임금의 경연관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김황진은 큰 집의 양자로 들어간 경우로, 그의 할아버지는 우부승지, 그의 양부는 해주판관을 지냈습니다. 그의 작은 아버지의 부인 달성 서씨는 친일파 이완용의 모친과 자매이기도 합니다.김황진의 친동생 김정진의 아들이 1905년 생 김을한과 덕혜옹주와 동갑인 1912년 생 김장한입니다. 김정진은 통정부에서 벼슬을 했습니다.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해는 1925년으로 나이 14세 때이고, 1929년 그녀가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사망을 하자 복상을 위하여 잠시 귀국을 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이미 그녀의 정신병은 시작되어 실어증이 심각해지는 상황이었지만, 1931년 일본 귀족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하고 이듬 해 딸 소 마사에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산후 그녀의 정신병은 더욱 악화되면서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장한의 형이자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김을한은 양정고보를 나와 1919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을 하다가 관동대지진 후 1924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매일신보의 기자를 하였고 만주로 가서 만몽일보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사실상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는 생각하면 김을한이 적극적 친일 협력자는 아니지만 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김을한이 1924년 이미 귀국을 한 것을 생각한다면, 특히 그가 1930년부터 매일신보에서 기자생활을 한 것을 생각한다면, 김장한이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완전한 허구입니다. 김장한은 그의 나이 25세인 1935년 이미 큰 아들을 낳았고 이어 1939년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1969년 형 김을한 기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더욱 심각한 역사 왜곡은 김장한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허구를 넘어서 또 있습니다. 그것은 고종의 시종이었던 김황진이 마치 독립운동의 대장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김황진의 집안인 안동 김문 중 세도정치에 관여를 했던 집안은 숙종 때 영의정 김수항의 후손을 의미하며 이들은 서울 중심인 '장동' 일대에 살았기 때문에 장동 김씨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론의 대표였던 이들은 대대로 공자를 배향한 성균관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대사전에서 유림을 대표하는 친일파의 명단 중 김황진이 등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필자가 아직까지 고종의 시종 김황진(金璜鎭)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유림을 대표하는 김황진(金璜鎭)이 동일 인물인지 확인을 하지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고종의 시종인 성균관에 관계했던 것을 볼 때, 친일파라고 규정된 김황진일 가능성은 90% 이상입니다.
물론 과거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지지했었지만, 현재의 민족문제연구소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그리고 이들의 친일 규정이 너무나 자의적이기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를 필자가 100%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일제 강점기 생존을 위한다는 변명이라고 하여도 당시 사회 지도층의 친일 행적이 있었음은 부인을 할 수가 없으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김을한의 숙부이자 이완용과 인척 관계였던 김황진이 어느 정도 친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나 뮤지컬, 역사서들의 역사왜곡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일반 국민에게 인식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명성왕후가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을 했던 구국의 영웅처럼 묘사되는 왜곡처럼, 사실상 결혼 전부터 정신분열증, 즉 조현병 증세가 심각해져 나중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던 덕혜옹주가 마치 식민지 조선의 아픔에 비통해 했거나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덕혜옹주가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황녀로서 식민지 지배에 따른 아픔을 겪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가 마치 독립투쟁을 동조하거나 민중의 아픔에 함께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그녀는 일반 민중을 접해 본 적도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친일 행적을 의심받는 고종의 시종 김황진이 마치 독립 투쟁을 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심각한 역사왜곡입니다. 지금이라도 영화 제작사는 영화 도입부에 김황진과 김장한의 독립투쟁은 완전한 허구라는 사실이라는 자막이라도 넣어야 할 것입니다.
친일청산은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친일청산을 입에 달고 살던 더민주 의원들은 단체로 덕혜옹주를 관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황진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유림을 대표하는 친일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까요? 김장한이 일본에 간 적이 없음을 알까요? 또한 덕혜옹주가 일반 민중은 접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과연 알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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