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문입니다. 고인이 되신 두 사람의 생애에 누가 될까 두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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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은 공교롭게도 닮은 점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특이하게도 ‘고결함’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의 기일이다. 바로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1886-1944)와 한국의 시인 김수영(1921-1968)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이 두 사람의 생애에 누가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주기를 바란다.
마르크 블로크. 아날학파의 거장이자 유럽 중세 역사학의 새로운 신기원을 개척했던 인물. ‘기적을 행하는 프랑스 왕’을 통해 중세 제왕권의 신성함을 이루는 근간을 추적했던 그는 이후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 성격’, ‘유럽의 봉건제’를 위시한 무수한 저작들을 통해 개략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유럽 봉건사회의 이면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그가 중세 봉건사회를 연구하면서 이룬 업적은 그의 선배였던 앙리 피렌을 비롯해, 그와 같이 역사학지 ‘아날’을 창간했던 뤼시앵 페브르나, 조르주 뒤비, 엠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 자크 르 고프를 비롯한 무수한 후배 역사학자들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중세 봉건사회에 천착했던 그의 학술적 업적은 1939년 대저 ‘봉건사회’의 완성으로 하나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중세 봉건사회.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블로크가 유럽 중세사 연구를 통해 알고자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중세사의 연대기를 수놓은 왕이나 영웅들에 전혀 현혹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전 시대의 관념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역사연구를 통해 파악하고 싶었던 것은 사회, 사회환경의 일반적인 조건과 계급들의 발전, 그리고 통치조직에 대한 전반적인 파악이었다. 신성함을 입은 성유를 통해 도유식을 치른 프랑스 국왕들이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병(특히 연주창)을 치유하는 기적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국과 프랑스의 사뭇 다른 전원 풍경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중세 봉건사회에서 이 풍경이 기원한 것은 아닌지, 프랑스 농촌 형태의 기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 기원은 언제인지, 마지막으로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중세 봉건사회의 기원은 어디인지, 그것이 발전하고 정점에 이른 시기는 언제쯤인지(블로크는 11세기 중엽을 구분선으로 두고 봉건시대를 크게 둘로 구분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는지, 봉의 수여와 분봉의 정황은 무엇인지, 계급 구분의 단계, 특히 고대 노예제 사회의 해체와 중세 봉건제 사회의 명확한 구분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중세인들을 묶어두었던 혈족의 구분이 어떠한 것인지 등등. 그가 파악하고자 한 주제의식은 아주 광범위했다.
그렇다고 해서 블로크가 과거에만 관심을 갖고 현실은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동시대 어느 역사가들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현실을 파고들었다.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에 복무하여 참전한 기록이 있던 그는 1940년 당시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허무한 패배를 직접 보고 겪으면서 ‘이상한 패배’라는 뼈저린 저서를 작성했다. 블로크의 비판은 프랑스군의 무능함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뼈저린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유로운 국가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허무하게 넘어간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 없었던 블로크는 지식인의 책무, 지성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남들은 안정된 직장과 더 많은 연봉, 화목한 가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54세의 나이에 그는 몽펠리에 레지스탕스에 투신하여 대독 항전을 시작한다. 과연 내가 블로크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라고 나에게 자문한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블로크처럼 결연하게 행동하지 못할 것 같다.
결국 1944년, 블로크는 붙잡혀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한다. 6월 16일이었고, 향년 56세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진 지 불과 10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블로크는 아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펜을 들기 시작한 마지막 저서 ‘역사가를 위한 변명’에서 역사가를 두고 ‘동화 속에 나오는 식인귀처럼 인육의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존재로 설명했다. 그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그만큼 역사가가 피비린내, 즉 인간이 흘리는 피냄새를 맡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치열함’이었다. 물론 그의 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는 자신의 시가 난해하게 읽히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그런 난해함을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게 해주는 치열함이 서늘하게 살아 있다.
무엇이 그의 시를 치열하게 읽히게 하는 것일까? 김영무 교수의 지적처럼 ‘모더니스트 시의 모범적 실천자’, ‘철저한 소시민적 자학과 청교도적인 자기비판과 도덕적 순결성’, ‘언론자유의 실천자’, ‘과격한 우상파괴자’, ‘열렬한 참여파 시인’, ‘반전통주의자’, ‘반시론자’, ‘정직한 양심의 예술가’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사항이 다 들어맞을 수도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모순적인 것들을 융합할 수 있으며, 그것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젊은 시절 반생은 총기 가득한 예술가의 질곡 어린 삶이었다. 1945년에 등단하여 김광균, 김병욱, 임호권, 박인환, 김규동 등과 교우를 맺던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강제로 북한군에 입대하여 배치되었다가 탈출한다. 서울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옥같은 포로수용소행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보낸 2년 간의 지옥같은 시간 동안 그는 인간성의 잔학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동시에 자학적인 자기비판의 토대를 닦았다.
1952년 포로수용소 석방을 계기로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55년 이후로는 아예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시와 번역활동을 제외하면 일체의 다른 생업을 두지 않았다. ‘눈’, ‘폭포’, ‘사령’, ‘기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 한국문학사’, ‘풀’을 위시한 무수한 걸작들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나왔다.
그의 냉철한 감각과 개결한 정신은 거의 모든 시에서 유례없이 높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1959년에 쓴 ‘사령’이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정점에 이르고 있던 시기였다.
1960년에 터진 4.19 혁명을 보고 김수영은 전율한다. 4.19를 기점으로 그는 시대와 예술가의 참여라는 문제를 두고 씨름한다. 이 시기에 나온 시들은 유달리 메시지가 선명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한데,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시기를 지나 터져 나온 4.19 직후의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4.19는 오래가지 못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혁명은 의거로 격하당한다. 시인의 평전에서 이 시기를 다룬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산주의자 콤플렉스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외적인 시대 상황의 변화와 내적인 고통 속에서도 시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1961년 이후 타계할 때까지 시인은 가장 치열하고 수준 높은 작품들을 써 내려간다.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1965년에 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일부다. 강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고 약자 앞에서는 거만해지는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을 설파하면서 그것을 교묘하게 그 시대와 접합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김수영 아니면 결코 생각하지 못할 방식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김수영은 ‘풀’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이 시를 쓰고 고작 18일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시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 시를 통해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다. 쓸데없는 잔가지들을 모두 쳐 버린 풀의 이미지는 바람에 나부껴 눕고, 울고, 눕고, 바람보다도 빨리 눕고, 빨리 울고, 그리고 먼저 일어난다. 약하디 약한 존재이지만 결국 풀을 뒤흔드는 요인인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강한 것에 대한 약한 것의 끈질긴 저항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웃는다
그는 1968년 6월 15일 밤, 집으로 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16일 가족들의 동의 아래 호흡기를 제거했다. 향년 48세.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생이었다.
6월 16일은
그대의 제일이다
화원에 가도 마음 달랠 꽃이 없어
나는 도보로 그대, 무덤 곁으로 간다
(......)
반쪽 심장에는 올 때마다
더 많이 더운물을
출렁거리면서
우리 마음이 오늘 저녁은 아무데나 가서
맞닿아 있어 서로 빈손을
크게 벌려놓지 않으려고 한다
- 김영태, 김수영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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