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먼먼 옛날, 이몸 체셔냐 옹이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이던 때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면벽 수련만 3년, 여자의 존재를 완벽히 잊고 있던 그때, 수능을 앞둔 저에게 빼빼로 데이라는 근본없는 천한 기념일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외쳤습니다.
"아!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구나! 이 날은 엄연히 농업인의 날! 너희가 먹는 쌀 한 톨, 김치 한 점에 그분들의 얼과 뜻이 서려 있거늘!! 또한 이 날은 몸이 불편한 이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그들을 위해 뜻으로 사리고 몸으로 행하지는 못할 망정! 에에잇, 고약한 하루도다!"
뭐 진짜로 저랬단 건 아니고.
아무튼 수능 준비로 한참 바쁘던 때라 저와 저의 뜻을 같이하는 30여인의 동지들은 기념일 같은 건 생각치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저에게 다가오는 한 학생이.
명찰을 보니, 오호라 2학년이로구나 후배여.
그 후배는 저에게 빼빼로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수능 잘 보세요."
아아, 너의 그 갸륵한 마음이 어찌 내 심금을 울리지 않을쏘냐.
허허, 이토록 훈훈한 정서가 바로 빼빼로 데이를 기념하는 이유였던 것인가.
저는 그리 생각하며 후배를 크게 칭찬하고 돌아서서 무척 불편한 마음과 고통스러워하는 제 눈을 추스르며 집으로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참고로 저는 대한민국 성북구에 위치하는,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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