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백론
Ⅰ. 문제제기
90년대 초중반은 우리 무협소설에 있어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조금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무협, 소위 구무협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소설들은 하나의 작품이 갖는 구조를 여러 글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진부함과 그 내용이 갖는 지나친 통속성에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것은 급기야 무협소설 전반에 걸친 침체라는 결과까지 빚어내게 되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면서 조금은 색다른 모습을 지닌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이른바 신무협이라 불리는 90년대 이후의 무협소설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풍의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두루 받고 있으며, 이후의 한국무협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좌백의 <대도오>이다. 문장의 수려함은 물론 싸움 장면의 박진감이란 무기로 화려하게 등장한 좌백은 이후 <생사박>, <야광충>, <금강불괴>, <혈기린외전>, <독행표>, <금전표> 등을 거쳐 현재 <천마군림>까지 계속해서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좌백을 따라다니는 가장 큰 장점은 사실감과 참신함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조차도 그에 대해 자부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후의 작품들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들, 특히 <금강불괴> 이후의 작품에 있어서는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모습들이 여러 군데에서 포착되고 있다. 그의 많지 않은 작품들 중 상당수가 과거의 무협들이 보이는 틀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적인 방법을 따른 기존의 소설에서 벗어나 좀더 고전적인 방법을 따른 소설을 써나가겠다는 좌백 스스로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이후로 그가 쓰는 소설이 재미있다는 평을 받기만 하면 그의 의도가 작품 속에서 완벽히 구현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말을 하고 있다. 아직은 그가 꿈꾸는 경지를 향한 노정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후에 나온 그의 작품도 충분히 재미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얼추 중견이라는 이름을 달아도 괜찮을 법한 작가에게 과연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까?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파탄의 조짐들에 대해 언제까지 시행착오일 뿐이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면죄부를 줄 것인가?
필자는 지금이 좌백에 대한 자리매김을 시도해야 하는 절실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후 그의 작품 활동에 큰 디딤돌이 되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먼저 <대도오>가 지니는 사실성이란 것에 대한 허실을 살펴보고, 이후 좌백 자신이 한때 탐닉했다던 ‘사마달류’를 따라 썼다는 <독행표>, <금전표>를 분석해 볼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서 보이는 특질들을 중심으로 그를 나름대로 평가해보는 수순으로 이 글을 진행시킬 것임도 아울러 밝혀둔다.
Ⅱ. <대도오>를 통해 본 좌백의 사실성의 허실
“국내무협의 가장 큰 단점이 너무 허무맹랑하고 사실감이 없다는 것인데,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는 너무도 완벽하게 사실적이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읽으면서도 내 자신이 그들과 함께 싸움터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듯한 착각이 여러 번 들었다.”
-용대운의 <대도오>추천사에서 발췌-
위에서 본 용대운의 추천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대도오>는 현대적인 방법-좌백 스스로 그렇게 칭하고 있다-에 따라 사실적으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일까? 이 작품은 과거의 무협에서 흔히 등장하는 한번 손짓에 산을 부수는 등의 과장된 수법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소설이 당시로선 자못 참신한 작품이란 평가를 얻게 할 수는 있으되, 사실성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협이란 장르는 작품외적인 리얼리티에 어느 정도 유연하게 허용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허무맹랑한 무공은 일반적인 소설들에 비해 무협이란 소설양식이 갖는 아주 독특하고도 유용한 수단이자 장치일 뿐이지, 그것이 무협소설의 사실성을 떨어뜨리는 약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무협뿐 아니라 모든 소설-의 사실성에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작품내적 리얼리티 즉, 작품내부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정당성과 사실성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 사실성을 논하려 한다면, 작품 속을 흐르는 사건과 인물들 간의 관계가 현실적인가를 더욱 중점적으로 살펴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대도오>는 여타 평가와 달리 사실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이 드러난다.
먼저 싸움장면이 그 첫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닌 부분이다. 겉으로 보기엔 과장된 무공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싸움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알게 해준다. 그것은 변변찮은 무공을 지닌 주인공 대도오가 뛰어난 내공과 무공을 갖고 있는 고수들을 별다른 묘사도 없이 그저 그냥 이긴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대도오와 강구심의 대결장면에서 승부가 갈리는 대목을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둘이 부딪히고 강구심은 죽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칼을 어떻게 휘둘렀고 어떻게 적중시켜 죽였다는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혁련소천과의 마구잡이식 싸움이란 전혀 사실성 없는 상황마저 연출해내고 있다. 그것은 평소 혁련소천의 화려하고 신랄한 무위(武威)에 비추어 볼 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장면은 결말 부분 종남 장문인과의 결투에서 극에 달한다. 싸움을 제대로 묘사하기는커녕 “삼검(三劍)을 날렸으되, 너의 일도(一刀)만 못했구나!” 라는 말로 끝맺는 결투장면은 시답잖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공허하기만 하다.
물론 작가는 싸움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다보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고 이야기 구조가 싸움에만 치우치게 된다는 단점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인물들의 싸움을 묘사함에 충분히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더 많은 설명이 따라야 할 주인공의 싸움장면만 유독 허무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안이하고 비사실적인 장면들은 내공도 갖지 않은 인물이 고수들을 이기는 식의 이야기 전개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를 해결해보고자 작가는 대도오가 무저갱에서 독고홍에게 내공을 물려받는, 다분히 억지스런 장면까지 삽입했지만 이조차도 근본적인 해결은 될 수 없었다. 내공을 물려받은 대도오가 이후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공을 전혀 배우려 하지 않는 등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 의도했던 그림과 사건 진행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사이에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작가의 가련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즉, 강하지 않은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충분히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의욕적인 설정이, 정작 싸움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게 되는 상황을 야기하게 되고, 능력 밖의 상황에 당황한 작가는 근본적인 해결 없이 이를 어영부영 처리해버리고 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도오>의 사실적이지 못한 두 번째 부분은 작중인물에 대한 설명의 부족에서 나오고 있다. 작품 속에서 대도오란 인물은 내일의 희망을 생각하지 않는, 대체로 삶을 허무하게 바라보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작품의 주인공의 성격 설정에 대해서 그 단초가 되는 과거를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이를 어찌 사실적이다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서두에선 그가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있다는 것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작품 중간에는 사생아란 말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작품의 일관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용기준이란 인물도 상당히 어설프게 설정되고 있다. 동생의 눈물어린 하소연에 칩거를 깨고 새롭게 일어서려다 종남의 세(勢)에 밀려 주저앉는 대목에 있어, 평소 철기맹의 개선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 지경에 이를 때까지 허송세월만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개선의 의지는 있었다는 인상을 주는 표현이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작가가 일관성도 없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어설픈 설정으로 때워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독고청청의 경우, 처음 그녀를 묘사했던 부분과 후반부에 나타나는 부분 간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여기엔 어떤 개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런 변화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저 노대란 인물의 “그녀도 기본적으론 좋은 심성을 지녔다”라는 말만으로 어영부영 넘어가고 있을 뿐이다. 작품에 나타나는 그녀의 잔인한 고문방법이나 어린 시절 잠자리 대가리를 따내는 모습들 어디에서 그녀가 기본적으로 좋은 심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것인지 작가에게 묻고 싶은 대목이다.
<대도오>의 사실성에 의문을 주는 마지막 부분은 사건에 대한 설명부족에 있다. 작품은 처음 철기맹과 구륜교와의 대립이 철기맹을 삼킨 종남파와 구륜교를 흡수한 녹림맹과의 싸움으로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녹림맹과 종남파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작품 중간에 갑작스레 등장하여 하루아침에 철기맹은 종남에 구륜교는 녹림에 흡수되었다고 공표하는 양상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듯 최소한의 설명조차 하지 않은 채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은 아마도 초창기 고전소설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엉성한 구성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밖에도 조금은 지엽적이지만, 가짜 독고홍이 독고청청을 범하려 한 후, 그녀가 남녀관계는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이라 이해하는 대목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부분이다. 조금 전만해도 그녀에게 냉소맹주와 동침한 사실을 스스로 언급한 마당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또 구륜교에선 아직 교주가 바뀐 것을 알지 못하는데, 하향 월을 교주가 갇힌 곳에다 가둔다는 것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대도오>는 인물과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 인과관계가 정연하지 못하고 개연성도 없는 등 엉성한 구성으로 일관한 작품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런 점은 이 작품이 작가의 의욕적인 허울에 비해 내부적인 사실성 획득에 있어서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 있어 전혀 무리가 없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향해 용대운 등은 참으로 과분하게도 대단히 사실성 있는 작품이라고 평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작품내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도 없이 그저 전투장면에서 간혹 보이는 몇몇 참신한 부분만 보고 작품을 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백이라는 작가의 설익은 솜씨와 더불어 용대 운이란 작가의 어설픈 안목마저 확인해 주는 셈이 되어 씁쓸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Ⅲ. <독행표>, <금전표>를 통해 본 좌백
앞서 말했듯이, 좌백은 <금강불괴>이후 자신이 평소 심취했던 사마달류의 무협을 본떠 보다 고전적인 방법을 통해 작품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특히 <독행표>, <금전표>는 80년대 무협과 90년대 무협이라는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서로 아우르고자 하는 의도 하에 썼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의 무협은 지금까지 수많은 비난을 받아 오고 있다. 지나친 통속성이나 줄거리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부함 등은 구무협이 비난받는 이유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군데군데 드러나는 사건들 간의 개연성 부족도 또한 비난의 대상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구무협이 존재가치가 없을 만큼 단점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이들은 진부함이란 비난을 받는 대신, 역으로 대단히 많은 수의 작품이 존재하고, 그 만큼 함유하고 있는 내용 또한 충분히 풍부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즉, 그것은 더 나은 발전과 변화를 위한 훌륭한 단초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독자들에게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준다는 면에서는, 지금 출간되는 어느 무협소설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의 무게감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무협과 신무협의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과거 무협을 지향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무협에 녹아있는 배움직한 특질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버려야할 것들마저 껴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한국무협의 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애초 신․구의 조화라는 의도를 전면적으로 퇴색시키는 결과만 낳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행표>와 <금전표>에는 필자가 경고하고 있는 구무협의 부정적인 면 즉, 작품 내적인 개연성 부족과 그에 따른 억지스러운 전개 등의 함정에 빠져 엉성한 작품구조를 형성하는 모습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그 파탄의 모습들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독행표>를 살펴보자면, 삼이(三異)가 용유진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대목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들 삼이는 공손조덕이나 용유진이 죽게 되면 자신들도 자동적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해약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작품에선 그들이 공손조덕에게 남은 시간이 없어 내기라는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용유진을 후계로 삼으려한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각자가 미행자까지 붙여 놓고 용유진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위해만 가하지 않는 한, 용유진의 죽음이 자신들의 내기 승리라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용유진을 방치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용유진의 생사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음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내기 상황이 작품 전체에 걸쳐 가장 중요한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작품구조 자체를 엉성하게 몰아가는 주적(主敵)인 셈이다.
두 번째는 용유진이 영약을 이용해 내공을 급증시키려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임독양맥의 타통에 실패하는 장면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에 의해 일어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 달 동안에 반박귀진의 경지도 꿈꾸는-사실 이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그것까지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람이 당황하여 실패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실수를 알고 난 후 하루 뒤, 나머지 두 영약마저 한꺼번에 복용하고 오히려 내공이 처음보다도 못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운 진행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훗날 북신이 용유진의 내공이 대단한 경지란 것을 알게 되면 용유진의 생명이 위협받을 상황에 처함이 당연하고, 그로 인해 이야기 전개가 어려워질 것이기에, 앞뒤를 짜 맞추기 위한 억지스러운 조작에 불과하다. 이를 피하려면 보다 자연스럽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전개가 필요함에도 좌백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억지스러움은 구무협에서조차 쉬이 찾을 수 없는, 치졸하기까지 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금전표>에서도 위와 같은 점을 자주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권정이 동창의 명령에 따라 용유진을 암습하는 부분도 어색하다. 전에 맺었던 용유진과 황제, 군주 간의 인연이나 군주와 권정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일개 동창 당두의 명령에 그렇게 쉽게 굴복하는 것도 좀처럼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이란 말이다. 뿐만 아니라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왕소팔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서, 일국의 황제가 오행마궁과 같은 집단과 손을 잡고 일을 벌인다는 발상 자체도 그다지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금전표>에서 더 문제되는 것은 그 파탄이 단순히 개연성 부족이나 억지스런 전개 등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전표>는 작품 전반에 걸쳐 군데군데 복선만 가득하고 이야기를 질질 늘여 빼고 있을 뿐, 사건진행에 있어서 실질적인 전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 죽어도 될 만한, 아니 상황적으로 죽어야 할 인물들-중주사견(中州四犬)을 필요이상으로 계속 등장시키며 트러블 메이커의 역할을 맡기고 있다. 심지어 그들에게 개발의 편자 격인 ‘천마불사공(天魔不死功)’까지 부여해가며 그들의 생존에 얽매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진 후 서문하를 만나는 장면에선 과거 무협에 비교적 풍부하게 등장하는 기연의 한 양상으로 설정된 듯하나, 사건의 전개와 그다지 연관이 없는 인물을 상대적으로 꽤 많은 분량에 걸쳐 등장시킴으로써 사건의 전개를 더욱 지지부진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듯 지루할 정도로 산만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결말부분에 도달하여서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설명만으로 뛰어 넘고 있다.
이런 점들은 구무협에선 거의 찾을 수 없는 특질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오히려 중국무협의 잔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금전표>라는 작품을 읽는 내내 번역된 글을 읽는 듯한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무협을 본보기로 삼든 말든 그것은 작가의 재량일 뿐이다. 필자는 다만 굳이 중국무협의 좋지 못한 특질까지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좌백의 무능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아울러서 위와 같은 특질들 하나하나가 제각각 이야기 구조를 매우 엉성하게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하여, <금전표>라는 참으로 어설픈 작품 하나를 낳아 놓았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독행표>와 <금전표>는 작품 내적으로 개연성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다분히 억지스런 진행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금전표>의 경우는 중국무협에서 보이는 지지부진하고 산만한 전개를 그대로 답습하여 작품의 구조와 결말이 엉성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이는 신·구무협의 조화라는 좌백의 의도는 그저 허울일 뿐, 실제작품은 그의 말과는 전혀 동떨어진 작품이 되고 말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고 보니 이젠 좌백의 의도가 진심이었는지조차 의문이 일고, 설사 진심이었다 해도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저 서문하와 왕소팔의 이름에 얽힌-이름이 맘에 들지 않아 서문하의 하(蝦)자를 하(霞)로 바꿀 수는 있으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설명으로, 스스로 하고 있는 고민의 흔적을 남겨놓은 채 말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본문에서는 “<대도오>는 사실성 있는 작품이다”라는 세간의 평가는 잘못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독행표>와 <금전표>는 “80, 90년대 무협의 조화를 이루려는 의도에 의해 썼다”는 좌백의 말과는 달리, 80년대 무협의 부정적인 면 혹은 중국무협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밝혔다. 결국 좌백의 작품은 평자들의 평이나 스스로 말한 작품의도와 동떨어진, 다분히 어설픈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간극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단순히 좌백 자신만의 무협을 구축하는 노정 속에서 오는 필연적인 시행착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에 대해 단연코 ‘아니다’라는 답을 내리고 싶다.
좌백의 처음 작품들은 그런대로 참신한 맛이라도 있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그에게 큰 기대와 찬사를 보냈고, 평자들은 그에게 분에 넘칠 정도로 후한 평가를 통해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좌백은 작품을 거듭할수록 그런 참신함은 잃어버리고 점점 더 과거 무협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은 등장한 시기나 무협문단에 있어 받는 평가 혹은 무협을 향유하는 이들이 갖는 기대 등에서 그와 여러모로 비슷한 설봉과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설봉의 경우도 그 등장에 있어 참신함은 돋보였다. 그러나 설봉의 최대의 장점은 무엇보다 정통무협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적절하게 녹여내는 기술에 있어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구무협이 갖는 긍정적인 면의 하나는 독자들에게 깨달음이나 진리에 대한 단상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다. 설봉은 이런 구무협의 장점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중심으로 접목하여 하나의 조화로운 작품을 창출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모는 필자가 여태껏 출판된 한국무협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는 <천봉종왕기>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천봉종왕기>에도 결말부가 약하다는 등의 단점은 있으나, 여기서는 좌백을 고찰하는 자리이니 만큼 생략한다.) 여하튼 좌백이 말하는 80, 90년대 무협의 접목을 설봉의 경우는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위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면 이제 그 답은 명쾌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좌백은 아직 과거 무협이 갖고 있는 진정한 장점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또 자신의 작품에 중심에 세울 수 있을 만한 자신만의 스타일조차 명확히 설정해 놓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신·구무협의 접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천착이나 진지한 노력도 없이, 그저 욕심에 찬 말만 공허하게 뱉어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좌백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은 없이, ‘작품이 재미만 있으면 만족한다’는 둥,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변화를 시도했기에 나로서는 발전이다’는 둥의 적절치 못한 식견의 변명 같은 말만 일삼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작품을 내면서 함께 내놓는 고백들은 대체로 작품이 갖는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을 피해가기 위한 도피구로서 심어놓는 세작(細作)에 불과할 뿐, 거기에 그의 진심이 담겨있는 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남을 뿐이란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정황으로 위에서 던진 의문처럼, 좌백의 작품은 그의 말과는 더욱더 먼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현재 출간 중인 <천마군림>에서 보이는 지나친 통속성과 부자연스러운 전개 등의 과거 무협의 고질적인 병폐 속에서 허덕이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처음 좌백을 접했을 때 참신함을 느꼈고, 이후로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께름칙한 부분이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음에 내심 고민해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 좌백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마당에 서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까불까불 말장난이나 일삼는 좌백의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임시방편으로 때우기만 해선 곤란하다. 그것은 작가에게 있어 엄연히 능력의 부족이고 수치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모름지기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자신의 작품으로 증명하고, 자신의 작품으로 책임져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작가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태도인 것이다. 만일 여기서 벗어난 이가 있어 스스로 작가라 칭한다면, 그는 두 가지 부류의 인물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지독한 사기꾼이든지, 아니면 단지 자아도취에 빠진 삼류 글쟁이든지.
※ 여기서는 써야할 공간이 너무 적어 가급적 내용을 압축하기 위해서 작품에 직접적인 근간이 되는 부분만 다루었기에 실례를 통한 작품 분석에 많은 애로가 있었음을 밝혀둔다.
위에서는 좌백이 갖는 커다란 한계에 중점을 두고 논했기에 그를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되었으나, 그에게도 많은 장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하루 빨리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단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 있는 훌륭한 모습의 작가가 되어 대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서 훗날엔 봄볕 가득 받은 도서관 창가에 앉아 정말 제대로 된 무협에 대한 논문을 꺼내들고 읽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졸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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