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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과 연두의 이중주

작성자
Lv.1 물망아
작성
06.06.23 00:44
조회
6,916

작가명 : 나희덕

작품명 : 사라진 손바닥

출판사 : 문학과 지성사

        누가 우는가

                                      

  바람이 우는 건 아닐 것이다

  이 폭우 속에서

  미친 듯 우는 것이 바람은 아닐 것이다

  번개가 창문을 때리는 순간 얼핏 드러났다가

  끝내 완성되지 않는 얼굴,

  이제 보니 한 뼘쯤 열려진 창 틈으로

  누군가 필사적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다

  울음소리는 그 틈에서 요동치고 있다

  물줄기가 격랑에서 소리를 내듯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좁은 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창문을 닫으니 울음소리는 더 커진다

  유리창에 들러붙는 빗방울들,

  가로등 아래 나무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

  저 견딜 수 없는 울음은 빗방울들의 것,

  나뭇잎들의 것,

  또는 나뭇잎을 잃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부딪치는 나뭇가지들의 것,

  뿌리뽑히지 않으려고, 끝내 초월하지 않으려고

  제 몸을 부싯돌처럼 켜대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창 밖에 있다

  내 안의 나무 한 그루 검게 일어선다

세상은 살기가 힘들어서

멍들고 다친 가슴을 한 채 숨죽여 울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 눈물로 젖은 땅 위에서 벌써 말라버린 가슴이

마른 샘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팔딱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시들어간다는 뜻일지도...

그 시듬의 두 가지 방식, 썩는 것과 마르는 것.

썩기 전에 말리려는 풍장의 습관과 그를 습격하여 울리는 연두

        풍장의 습관

  방에 마른 열매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책상 위의 석류와 탱자는 돌보다 딱딱해졌다.

  향기가 사라지니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들은 향기를 잃는 대신 영생을 얻었을지

  모른다고, 단단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려본다.

  지난 가을 내 머리에 후두둑 떨어져 내리던

  도토리들도 종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흔들어보니 희미한 종소리가 난다.

  마른 찔레 열매는 아직 붉다.

  싱싱한 꽃이나 열매를 보며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

  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때 이른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 했다.

  바람이 잘 드는 양지볕에

  향기로운 육신을 거꾸로 매달아

  피와 살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던,

  또는 고통의 설탕에 절인 과육을

  불 위에 올려놓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달아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나는

  건조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누군가 내게 꽃을 잘 말린다고 말했지만 그건

  유목의 피를 잠재우는 일일 뿐이라고,

  오늘 아침 방에 들어서는 순간

  후욱 끼치던 마른 꽃 냄새, 그 겹겹의 입술들이,

  한 번도 젖은 허벅지를 더듬어본 적 없는 입술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비처럼 가벼워진 꽃들 속에서

        연두에 울다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풍장은 마름 연두는 젖음,

풍장은 죽음 연두는 생명,

풍장은 해탈 연두는 번뇌,

풍장은 절제 연두는 충동.

풍장은 질서 연두는 혼돈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풍장과 연두의 길항.

그러나 결코 대립 갈등은 아닌...

        재로 지어진 옷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에는

  보이지 않은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풍장으로 대표되는 마른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서는

연두로 상징되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필요합니다.

대립하는 양자의 교묘한 경계에 서서

죽음속에서 삶을 바라보고, 말라죽어버린 꽃에서 향기를 맡고, 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포옹과 화해.

시인이 궁극적으로 하고픈 말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무게추는 풍장보다는 연두 쪽으로 조금은 기울어 있습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

말림과 태움이 젖음보다 심오한 가치와 진리라 해도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고백을 옮겨 놓습니다.

존재가 시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썩는 것과 마르는 것.

아름다움이 절정을 다한 뒤에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썩기 시작한다, 그것이 꽃이든, 음식이든, 영혼이든.

그러나 썩기 전에 스스로 물기를 줄여나가면 적어도 아름다움의 기억은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건조의 방식은 죽음이 미구에 닥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영속성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게 아름다움은 순간적인 매혹의 대상이 아니다.

어서 네 안의 물기를 말려버리라고, 피와 살을 증발시키라고, 어딘가로 달아나라고, 늘 방부제나 건조제를 서둘러 찾았을 뿐이다.

마른 열매와도 같은 정신에 하루 빨리 도달하려고 젊음을 앞당겨 반납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책상 위의 마른 석류를 들여다보니 주변에 검붉은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몇 년째 썩지 않는 석류를 보며 '불멸'이라는 말을 떠올리기까지 했는데, 그 단단한 껍질을 뚫고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아, 육체란 얼마나 덧나기 쉬운가.

견고해 보이는 고요와 평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 관능의 벌레들이 오글거리고 있는 것인가.

석류를 손에 들어보니 어느새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삶이란 완벽한 진공 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차라리 안도했다.

그리고 내 풍장의 습관도 앞으로 몇 번이고 생명의 기습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라는 걸 예감했다.

그렇습니다.

연두,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극히 아름다운 생명의 기습이기 때문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 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던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먼훗날 언젠가는 진실로 이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려나간 가지가 끝없이 아파오더라도 그 아픔을 양분으로 꽃이 피었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아픈 후에는 마른 나뭇가지에도 꽃이 피리라 믿고 싶습니다.

스러져간 소중한 것들이 몸을 일으켜 새로운 생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Comment ' 6

  • 작성자
    Lv.15 LongRoad
    작성일
    06.06.23 03:03
    No. 1

    제가 좋아하는 시인인데 애독자가 여기도있었군요.
    전 어두워진다는것 시집을 제일 좋아합니다. 늘상 가지고 다니면서
    기분좋을때마다 읽곤하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물망아
    작성일
    06.06.23 11:37
    No. 2

    나희덕 씨의 시 참 좋지요.
    단정하고 온화한...
    호응해 주시니 반갑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북풍마황
    작성일
    06.06.23 12:01
    No. 3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오늘같은날 이런 시한편 좋은거 같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lo*****
    작성일
    06.06.23 13:37
    No. 4

    물망아님의 글을 읽으면 내가 얼마나 메마른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부럽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0 테사
    작성일
    06.06.24 15:21
    No. 5

    나희덕님 시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꼭 보고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가을흔적
    작성일
    06.06.26 11:20
    No. 6

    아픈 후에는 분명히 꽃이 피겠죠.
    가슴이 뜨끔하네요 ^^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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