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백광호(문피아 ID 핵지뢰 (...핵지뢰라니, 밟고싶다.))
작품명 : 생존시대
출판사 : 스카이미디어 & 북
베어그릴스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단백질로 판단하게 하는 방법과, 물컹거리는 모든 것을 식수로 판단하게 하는 방법과, 그리고 야생에서도 먹방 찍을 수 있다는 것을 인류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지금 야생 생존의 아이콘이 되어 있습니다. 절지동물을 으적으적 씹어 먹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는 생존법의 프로메테우스라고 불러도 무방할 겁니다. 일찍이 대륙의 일부 인민들이 바퀴벌레를 씹어먹어 콜라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지만, 언제나 말보다 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인상적인 법이지요.
영국생존이능인 이야기를 제일 먼저 꺼내는 이유는, 당연히 이 책이 생존이라는 키워드와 때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어떤 행동을 왜 그랬냐는 인과관계의 균형 맞추기를 좋아합니다. 제목에 대해, 어떤 돌발행동에 대해, 누군가의 과거에 대해 적절한 이유가 맞춰졌을 때 퍼즐 풀리듯 시나리오적 재미를 느끼는 거지요.
생존시대 역시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들고나온 만큼 웃음보다는 진중한 내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극한상황을 견뎌내는 베어그릴스라는 아이콘을 떨쳐낼 수 없었던 거지요. 뭐 상관없습니다만, 생존시대 역시 뒷표지에 나온 것처럼 오지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기에, 저는 생존의 각박함을 어느 정도의 해학과 액션, 그리고 로맨스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을지, 그것을 어떻게 지루함 없이 풀어낼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책을 폈습니다.
생존시대의 첫 장면에서는 인간을 별식처럼 취급하는 장면으로 이야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자극적인 장면일 수 있고 따라서 독자는 이곳에서 이 장면의 호오를 가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독자는 이 장면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이 세상의 정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행동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인육식이 자행될 정도의 도덕적 타락,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법망의 부재, 힘없는 아이들은 잡혀 먹힐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메시지 등등.
사실 저 장면 한번으로 위에 나온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자, 생존시대의 무대는 이런 세상입니다. …라고요.
저는 첫 부분부터 흥미로웠습니다. 법이라는 최소한의 도덕이 사라지니, 살아남은 인간들은 바람난 남편 작업 들어갈 때 결혼반지 빼듯 행동과 도덕을 분리시킵니다.
먹을 게 없으면 인간을 먹으면 되잖아요? 라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극단적이지만, 이게 아니라도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려면 법보다는 힘과 불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선과 이타주의는 말도 안 되는 이상이 되었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말도 안 되는 힘이 있을 때에만 선을 지키고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이 없으니 악과 불신만 남고, 힘이 있어야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신체능력과 생존지식을 갖고 있는 주인공의 존재가 부각됩니다. 그는 혼자서도 극지에서 살아남을 육체와 지식을 갖고 있고, 주인공답게 약자를 지키고자 하는 이타주의도 갖고 있습니다. 불신과 악이 살아 판치는 세기말적 무대, 이곳에 힘과 선을 가진 자 등장! 액션씬 보여주기에 무리 없는 클리셰의 완성입니다.
이야기가 진행하는 동안 주인공의 액션씬과 난관을 헤쳐나가는 생존지식 등, 피지컬적인 내용은 탄탄했습니다. 작가의 내력을 의심하게 할 만큼 집요한 설명과 묘사는 살짝 단점까지 내비칠 정도로 내밀합니다. 긴 글은 지루함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주인공의 액션씬, 생존씬은 박진한 긴장과 과유불급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피지컬적인 내용으로는 앞서 설명한 주인공의 클리셰적인 포지션을 정당화해주지는 않습니다. 힘과 정의를 갖고있다는 것만으로 주인공을 쉽게 설치게 하는 것만큼 경박한 글도 없으니까요.
여기에 멘탈의 문제가 그 대항마로 끼어듭니다. 재밌는 것은 주인공이 갖고 있는 힘과 선에 대한 위치가, 보통 사람과는 대칭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법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 같은 것은 필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힘을 가진 사람은 경계당하는 게 자연스럽지요. 권력이든 재력이든 힘의 차이를 상대방에게 확인시키고 밸런스가 깨지면, 사람 사이에는 결과가 좋든 나쁘든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상황이 바뀐 지금, 생존시대가 된 세상에서는 권력과 재력의 사회적 힘은 전시의 화폐가치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돈이 휴지조각이 된 것처럼, 힘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물리적인 힘과 눈앞의 장애물을 치우는 지혜만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이 없을 경우, 타인에게 불신의 장막을 쳐 자신의 약함을 가려야 합니다. 총이나 칼 같은 물리적 무기는 대표적인 힘이 됩니다. 이 힘이라는 리소스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는 힘이란, 마법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힘일 겁니다.
어중간한 강함이 아닌, 압도적인 강함은 오히려 타인이 의지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죠.) 권력이 힘이 아닌, 힘이 권력이 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은 그 강력한 힘으로 관계의 구심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이 이야기의 재미는 이 아이러니에서 나옵니다. 앞서 말한 힘과 관계의 구도에 비추어볼 때, 평화로운 시대에서 주인공은 타인에게 어떤 취급을 당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선을 표현할 수 있게 된 혹독한 생존의 시대에서 그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요.
사람이 간단히 죽을 수 있는 상황을 그는 기뻐해야 할까요, 슬퍼해야 할까요. 저는 주인공이 괴로워 몸부림칠 이 딜레마가 몸서리치게 기다려집니다.
(사실 생존지식은 장식입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두서없고 정리 없이 벼락치기로 쓰고보니 어중간한 장문이 되었군요. 바쁘신 분들을 위한 요약문
1. 헐 세계 망했음. 도덕이 폐품처리되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2. 주인공 무기지식도 있고 무예도 킹왕짱이고 정의감도 투철함.
3. 오 액션씬 좋음, 와일드니스 로어(야생지식) 탄탄함.
4. 주인공 잘났네? 과거에는 은근히 따돌림 당했을 것 같음.
5. 그런데 세상 어려워지니까 사람들이 주인공만 찾네?
6. 악만이 남게 된 세상에 환영받기 시작하는 주인공. 쩌는 딜레마가 기대됨.
완결 안 났으므로, 중간결론 : 피지컬과 멘탈의 균형이 조합된 무게 있는 이야기. 간단히 말해 독자가 고민하지 않아도 재밌게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게추가 너무 많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으므로. 가벼움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면 굉장한 작품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로맨스 좀 강화해줬으면 싶은 소망이… 여자가 관계된 일에 급 싸늘해지는 주인공의 갭 모에가 은근 귀엽습니다. 로맨스 싫으면 브로맨스라ㄷ… 퍽.)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