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의 조선통신사 김인겸(金仁兼)은 저서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0만 채는 있다고 생각되는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100리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수만 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 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년 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아무 생각 없이 통신사로 오사카에 갔다가 기막혀 하는 김인겸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왜구의 노략질로 쌓아 올린 풍요로움에 놀란 것이죠.
이런 의외의 광경을 보았으면 왕부터 반성하고 자책하며 정치권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와야 마땅한데 이후 역사에는 쥐 죽은 듯 별다른 소리가 없습니다. 김인겸이 과장을 했다고 믿었거나 아니면 한심한 현실에 조선이 발전할 길이 없음을 알고 지레 포기한 것이겠죠.
조선 역사 상 이런 위상변화를 눈치 채고 왜에 일격을 가할 군주는 세종대왕이 유일했습니다.
나머지 왕이고 신하들이고는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 아무생각이 없는 것들이었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얻어 터져도 아무 말 못하는 겁만 더럽게 많은 소인배들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송자라 칭송받던 송시열을 두고 북벌론(효종 연간)을 주장하긴 하나 행동 없는 말뿐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인물도 있었으니 다른 인물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왜구들이 자주 침입하자 이종무장군을 대마도로 보내 129척의 배를 소각 포획하고 1940여 채의 가옥을 불태웠습니다. 왜구 10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포로로 잡아들이지요. 이때 동원한 군세가 병선 227척에 병력이 1만7300명 이었습니다.
완전히 빛 좋은 개살구였죠. 군의 정보가 미리 누설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니라면 대도를 들고 가서 쥐 한 마리를 죽이고 온 꼴이죠. 왜구라고 죽인 인물들도 어디 갈 곳도 없는 늙은 주민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세종대왕은 대마도주 소씨가 항복하자 아는지 모르는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대마도 만호로 임명합니다.
세종대왕의 명철한 사고력과 완전무결하리만치 뛰어난 업적을 생각해 본다면 왜구에 관한한 뜨뜻미지근한 해결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구가 자주오니 소굴이라 할 대마도를 토벌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치부할 호락한 인물이 아니죠.
아마도 왜구의 근절을 생각한 왜 본토로의 진격까지 염두에 두고 이후의 전개과정까지 그려 보았겠지요.
여기에서 문인(文人)인 세종대왕이 무인(武人)이 아닌 것이 억울할 따름입니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 승부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재는 문인의 재량으로는 왜 본토로의 진군이 감당할 수 없을 국가의 부담이라고 생각했겠죠. 또 왜가 그렇게 번영하리라 짐작하지 못한 점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약간은 탐욕스런 이종무를 보내 왜구토벌의 생색만 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종대왕의 아쉬운 포기가 이후 민족의 재앙으로 다가온 것이죠. 그 이후로는 일본 정벌 생각 자체를 할 인물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세종대왕의 실수라고 봅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이죠. 왜와 왜구가 조선의 심복지환(心腹之患)이 될 것이란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했을 겁니다.
양국의 백성을 생각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기했을 지언정 이후 후손들이 받게 된 댓가가 너무 가혹해 실수도 큰 실수라고 봅니다. 아쉬울 따름이죠.
대체역사소설을 보다가 뜬금없이 한마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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