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중 하나인 정복자(사생아) 윌리엄은 어린 시절에 부친을 잃은 후 어린 공작이 되서 침대 아래 숨어서 자신의 보호자가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뜬눈으로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런 윌리엄은 사생아 콤플렉스를 가진채 성인이 되었고, 어느 날 한 성을 공략하던 중에 성의 수비군이 윌리엄의 모친이 가죽쟁이의 딸이란 것을 가지고 놀리자 격분하며 성을 함락해 수비군을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죽였습니다. 산채로 가죽을 벗기기도 했던 것 같은대, 이건 기억이 좀 애매모호해서 확실친 않습니다.
여태후를 봅시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자 유방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을 잡아다가 사지를 자르고 눈을 멀게하고 입에 독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고 귀에 황산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 인간돼지라 부르며 똥통에 가둬 똥만 먹다가 똥독에 올라 죽도록 했습니다. 흠좀무...
이건 한 중세 실화를 다룬 책에서 봤던겁니다. 한 귀부인은 그녀 남편의 기사와 친밀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귀족은 그의 아내가 기사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아내를 쳐죽이고 기사도 잡아오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기사는 ‘아 새우젓 됬구나’ 하더니 그대로 도망쳤지만 귀족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지요. 그런대 서로간에 대화를 해보니 사실 이 모든게 귀족의 오해와 착각이였음이 드러났고, 귀족과 기사는 화해한 후 화기애애하게 잘 살았습니다. 물론 죽은 아내는 오래전에 잊혀진 후...
카이사르를 봅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백만명이 넘는 켈트족을 죽였습니다.
징기스칸을 봅시다. 징기스칸은 전세계를 누비며 패기롭게 천만명 단위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콩쥐팥쥐를 봅시다. 콩쥐는 팥쥐를 죽여 젓으로 담군다음 계모에게 보냈습니다.
소시지를 봅시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나무 의족을 가지고 소시지를 만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소시지 공장에 쥐가 나오던 안 나오던 사람들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고, 가끔은 쥐가 기계에 잘려서 소시지에 함께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에는 카타르라는 약간 맛 간 기독교 종파가 횡행했습니다. 여자를 죄악을 쑹쑹 낳는 죄악공장으로 보는 좀 맛 간 종파였는대, 더 맛 간 것은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이 카타르가 세력을 얻자 위협감을 느끼고서는, 놀라지 마세요, 무려 십자군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왕 필립 2세는,
“이단을 쳐죽이자!”
라면서 자신의 봉신을 때려잡는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물론 이것에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북부에 자리잡은 카펫 왕조에 반항적이였던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 백작령을 이 기회에 복속시켜 왕실의 영향력 안에 밀어넣겠다는 정략적 속셈이 있었지만, 여전히 막장스럽습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프랑스왕 필립2세와 교황 이노센트 3세, 그리고 땅은 없지만 야망은 많은 귀족과 용병들이 잔뜩 몰려들어 프랑스 남부에 헬게이트가 열린 와중, 베지에라는 한 도시가 십자군에게 함락됬습니다. 도시를 함락한 후, 십자군들은 문득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네요. 일단 도시를 함락하기 전까지야 도시를 함락하는 것만 생각해왔는데, 정작 함락하고나니 새로운 문제가 생긴게, 도시 안에서 이교도와 이교도가 아닌 자를 어떻게 구별할지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교도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한다 말한 다음 십자군이 물러나면 다시 이단에 빠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고민하던 십자군들은 교황이 보낸 교황 특사이자 이단심판관인 아노르 아말릭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노르 아말릭이 답하길,
“모두 죽여라. 주께서 직접 가려내실 것이다.(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그러자 십자군은 ‘아, 이리 간단한걸 왜 미리 생각 못했지.’ 라며 아노르 아말릭의 선견지명에 감탄한 후 베지에의 시민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아노르 아말릭이 직접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남작들과 카톨릭 포로들을 풀어주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던중, 병사들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걍 처죽여서 2만명 넘는 시민 모두가 죄다 죽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맞을까요.
솔직히 제가 이런 중세시대로 회귀한다면 사방에 만연하는 살인과 폭력에 반쯤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한 소설을 보는데 사람을 복속시키고, 사람을 굴복시키고, 사람을 처벌하고 사람에게 폭력과 죽음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휘두르는게 당연하고 휘두르지 않는게 호구다라는 논지를 현대인이 말해서 좀 흠좀무하단 생각에 한번 써봤습니다. 저런 생각을 현대인이 가졌다면 제 생각에 저 현대인은 정신상담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대 저 현대인의 생각은 작가의 생각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저 소설 쓴 작가가 정신상담 받아야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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